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33화 (133/608)

제133화

“10골드 5실버!”

“난 거기에 20실버 더 추가!”

“10골드 30실버!”

순식간에 갑판 안이 경매장으로 변했다. 이미 지난 항해 동안 자주 벌어지던 광경이라 크게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평소보다 경매 금액이 매우 높다는 거랄까. 아무래도 행사(?)의 막바지가 다가오니 다들 마음이 더 급해진 듯했다.

그 정신없는 광경 속에서 나는 조용히 새벽에 본 남자를 찾았다. 엔딜은 하루에 두 명의 손님만 받으니, 이제 그도 슬슬 움직여야 할 때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 건지 그는 그저 방관자인 양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을 뿐, 조금도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표적이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예상외의 행동에 당황한 건 엔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웃고 있었지만, 이따금 초조한 표정으로 남자를 주시했다. 그사이 경매는 시작가의 10배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20골드 50실버!”

“에잇! 20골드 51실버!”

“20골드 52실버!”

“……25골드!”

소년의 마지막 외침에 경쟁자들의 입 안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숨 섞인 그 소리가 내게는 패배를 인정하는 선언처럼 들렸다. 아마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치열했던 열기가 한순간에 훅 식으며 조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드디어 경매가 끝난 것이다. 소년은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며 엔딜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다들 양보해 주시려는 것 같네요.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거죠?”

“음, 네, 그렇긴 한데…….”

엔딜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선으로 남자를 찾았다. 그때까지도 그 남자의 얼굴이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혹시 계획을 철회한 걸까? 번민에 찬 엔딜의 표정만큼이나 나 역시 기분이 복잡해졌다.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소년은 혼자 꿈에 부풀어 연신 떠들고 있었다.

“아, 좋아라. 이번엔 좀 더 깊은 곳까지 가 볼 수 있을까요? 아까 봤던 그 물고기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해초 같은 것들도 만져 보고 싶은데…… 내 말 듣고 있어요?”

“아, 예, 물론이죠, 손님. 자, 그럼 다시 가실까요?”

찝찝한 표정으로 남자 쪽을 흘끗거리던 엔딜은 이내 장사꾼의 얼굴로 돌아와 다시 미소 지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는지 내심 후련한 얼굴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런, 이런. 도련님, 정말 또 하시려는 겁니까?”

“……!”

돌연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귀에 몹시도 익은 목소리였다. 바라본 곳에는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엔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예상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새벽의 그 남자였다.

“무스 씨.”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은 환한 얼굴로 그를 대했다. 남자는 엔딜 쪽엔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로 소년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한 번만 하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로키를 너무 걱정시키지 마십시오.”

“그치만 너무 재밌는걸요. 무스 씨도 한번 해 보세요. 그럼 날 이해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물속은 정말 위험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문제없어요. 이미 안전하게 돌아온 거 봤잖아요. 그리고 여기 무스 씨가 준 수호 부적도 있는걸요.”

소년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목에서 긴 줄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 끝에는 작은 금색의 메달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본 남자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하하, 정말 어쩔 수 없는 분이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조심히 잘 다녀오십시오.”

“응, 고마워요!”

대화가 오가는 동안 엔딜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굳어 있었다. 숨을 쉬기나 하는 건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소년의 이마에 입을 맞춘 다음, 느긋하게 엔딜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 도련님을 다시 잘 부탁하네.”

“…….”

어느 한 곳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는 자연스러운 당부였다. 하지만 난 그것이 남자가 보낸 신호라는 것을 눈치챘다. 엔딜의 눈빛 역시 한층 더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설마 청부 살인의 대상이 이렇게 어린아이일 줄이야. 내가 경악한 것만큼이나 엔딜도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았다. 그는 한참 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안 가요, 엔딜?”

“네? 아아, 네, 갑니다.”

결국 소년 쪽이 먼저 재촉하고서야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린 듯 표정을 수습했다. 엔딜이 서둘러 보낸 손짓에 시큐엘이 성큼 다가오자 소년은 흥분한 얼굴로 눈을 반짝거렸다.

“아까 했던 말 잊지 않았죠? 이번엔 좀 더 깊이 들어가는 거예요?”

“예, 그러죠. ……근데 실례지만 손님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저요? 올해 열네 살이에요.”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소년은 별다른 경계 없이 대답했다. 그 순간 엔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씨발.”

“응?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손님이 제 동생이랑 같은 나이라구요.”

“와, 그래요? 엔딜에게 동생이 있었군요.”

환하게 웃는 소년을 향해 엔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결 복잡해진 얼굴을 보니 소년의 모습에 자신의 동생을 투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아주 잠깐 무스라 불린 남자와 엔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찰나의 시간, 엔딜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대놓고 이를 갈지 않았을 뿐 그 눈빛에 서린 건 명백한 적의였다. 그러나 무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것에 더 격분한 듯 엔딜이 소년을 돌아보았다.

“저기요, 손님…….”

“아참, 그거 아십니까, 도련님? 베일이 얼마 전에 아끼던 새를 잃었다고 하더군요.”

무스가 끼어든 탓에 엔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엔딜은 입을 다물었고, 소년은 바로 관심을 보였다.

“베일이 아끼는 새라면…… 희귀종이라고 했던 그거요? 베일이 집 근처에 있는 산에서 둥지를 발견했다던.”

“네, 맞습니다. 혹여 달아날까 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구경하는 걸 즐기고 있었지요.”

“저런, 그 새를 잃다니. 대체 어쩌다가요?”

“실수로 사람들 앞에서 새에 대해서 말했다지 뭡니까? 소문을 들은 사냥꾼들이 잡아간 모양입니다.”

“세상에…… 베일의 충격이 크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입을 조심하라고 그렇게 누누이 일렀건만. 귀한 것일수록 말을 아껴야 지킬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녀석이었죠.”

‘……즉,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마라, 인가.’

무스가 전하려고 하는 뜻은 분명했다. 단조로운 잡담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 엔딜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그 역시 느꼈는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무튼 정말 안됐어요. 베일에게 위로의 꽃이라도 보내야겠네요.”

“도련님이 그리해 주시면 기뻐할 겁니다.”

“알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엔딜, 조금 전에 나한테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소년의 질문과 함께 무스의 뱀 같은 시선이 엔딜에게 가 닿았다. 남들에겐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그를 압박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엔딜은 무언가 입을 뻐끔거리다 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준비가 끝나셨으면 이제 출발하자구요.”

“앗, 그럼요. 준비 다 끝났어요.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은 생긋 웃으며 답했다. 그 모습을 본 무스가 나직이 비소를 흘렸고, 엔딜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불같은 성격에 당장 달려들지 않고 참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소년의 환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다시 바닷속에 들어갔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행사는 저절로 파장의 분위기를 띠었다. 어차피 엔딜이 돌아오는 시점에서 끝나는 건 마찬가지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릴없이 자리를 지키는 몇몇을 제외하곤 구경하던 인파의 대부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별다른 염려는 하지 않았다. 엔딜이 소년을 향해 지은 복잡한 표정이라든가, 무스에게 보내던 적개심만 봐도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건 분명했으니까. 무엇보다 그가 내게 한 약속을 믿고 싶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무스 쪽이었다. 그 역시 엔딜의 거부 의사를 읽었을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태연하던 반응을 보면 엔딜에게 결정권을 줬을 때부터 이런 상황 역시 예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는 엔딜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당장 입을 막아 두긴 했지만 그것으로 안심하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무스 쪽의 상황을 살폈다. 그는 기둥에 기대선 채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소년의 하인이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핀잔을 건네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속내를 짐작하긴 어려웠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건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왠지 이번엔 좀 오래 걸리지 않아?”

“으음, 그러게.”

뱃전에 서 있던 선원 몇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엔딜이 물속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더라? 나는 속으로 빠르게 시간을 가늠했다. 그가 물속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약 10분 남짓. 보통은 한계치에 임박하기 전에 미리 올라오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을 초과했는데도 수면이 잠잠했다.

‘설마…….’

나는 반사적으로 무스를 바라봤다. 스스로 의식하고 한 것이 아닌,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 순간 목격한 광경에 흠칫 몸이 떨렸다. 무스는 웃고 있었다. 가늘게 접힌 그의 두 눈은 짙은 희열에 휩싸인 상태였다.

‘젠장!’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 그렇게 느낀 즉시 나는 빠르게 형체를 벗어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물의 정령인 내 몸은 공기 중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수중에 있을 때 더 감각이 예민해진다. 물속에 잠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호흡이 편해지고 시야가 더 선명해졌다. 그 상태로 잠시간 가만히 있으려니 곧 아래쪽에서 술렁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틀림없이 엔딜이었다.

나는 온몸의 감각을 개방한 채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엔딜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게다가 우려와는 달리 둘 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소년은 구체 밖으로 팔을 뻗고 있었고, 그 옆에서 위험하지 않도록 엔딜이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적어도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에 안도하려는 찰나, 문득 스치는 위화감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소년을 붙잡고 있는 엔딜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고, 힘을 쓰는 듯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실제로 뒤쪽에서 소년을 끌어안은 그의 팔엔 핏대가 강하게 솟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실태가 좀 더 분명하게 보였다. 소년은 단순히 팔을 뻗고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구체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엔딜은 그것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소년 쪽에서 문제를 일으킬 줄이야. 당황한 나는 조금 더 가까이 접근했다. 호기심에 떼를 쓰는 것인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소년의 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이,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의아한 기분에 자세히 살피자 소년에게서 묘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인위적으로 비틀린 흐름은 소년의 가슴 부근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그 위에 있는 물건을 확인하고 얼굴을 굳혔다.

‘저 목걸이…….’

수호 부적이라고 했던가? 무스가 소년에게 줬다는 목걸이였다.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분명 평범한 메달이었는데, 지금은 표면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익숙한 도형과 문자들이 빛 속에서 넘실거리듯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법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꼬마야, 제발 정신 차려! 내 말 들려? 야!”

엔딜이 안간힘을 쓰며 소리쳤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이미 물속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엔딜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소년의 저항까지 막으려 하니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컥!”

아니나 다를까. 구체가 크게 흔들린다 싶더니 엔딜이 울컥 피를 토했다. 고통 때문에 그의 팔이 느슨해지자 소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삽시간에 구체 밖으로 튀어나갔다.

“씨발! 시큐엘!”

마지막 순간 아슬아슬하게 소년의 팔을 낚아챈 엔딜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출렁! 그와 동시에 엔딜과 소년은 차례로 물에 빠졌고, 시큐엘은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엔딜!

물속에 빠진 상태에서도 소년의 저항은 계속됐다. 엔딜이 어떻게든 붙잡고 위로 헤엄치려고 해도, 소년은 버둥거리며 떨어지려고만 했다. 시큐엘은 즉시 엔딜을 도왔다. 그 역시 소년의 목걸이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가까이 다가가 목걸이를 물어뜯으려 했다.

‘……앗, 잠깐!’

순간 느껴지는 불길한 기분에 나는 빠르게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시큐엘과 닿은 목걸이에서 강한 마력이 솟구쳤다. 누군가 강제로 뜯어내려 할 경우 반발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퍼엉!

―큭!

반동으로 튀어나온 마력이 시큐엘의 몸을 그대로 덮쳤다. 아마 멀쩡한 상태였다면 별 무리 없이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계까지 달한 엔딜의 마나는 그 파장을 견디지 못했다. 시큐엘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연결된 엔딜의 마나가 역류하고 있었다. 강제로 정령계에 돌려보내지고 있는 것이다.

부글부글!

역소환의 충격은 엔딜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비명을 지르듯 크게 벌어진 입에서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토해져 나왔다. 짧게 경련을 일으킨 몸은 이내 축 늘어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한 것이다.

‘이런!’

나는 짧게 혀를 차곤 엔딜에게 급히 다가갔다. 소년 역시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일단 두 사람의 얼굴에 공기 막을 씌운 다음, 수면 위로 올라가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소년의 목에 걸린 메달이 이번엔 내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붙잡자, 더 강한 마력의 저항이 느껴졌다. 물론 내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