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씨발, 그때 나한테 물 퍼부은 새끼가 너냐?”
“…….”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오히려 역효과였나 싶어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도 내 행동이 충분한 경고가 되긴 한 모양이다. 당장에라도 덤벼들 듯하던 그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이 느껴졌다. 그 대신 가시가 사라진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날 어쩔 생각이야.”
외모의 힘이란 참 위대하다. 워낙 귀여운 얼굴 때문일까. 직접 대면하면 무조건 단호하게 나가자고 다짐했는데 막상 풀죽은 모습을 보니 금방 마음이 약해졌다. 본성을 뻔히 아는데도 엔딜의 긴장한 얼굴이 겁먹은 동물처럼 보이다니, 이래서 미인계가 있는 건가 보다. 나는 시큐엘을 다시 돌려보낸 후 한숨처럼 말했다.
“걱정 마. 아무한테도 말 안 해.”
“말 안 한다고?”
“물론 조건은 있어. 네가 그 남자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하, 그걸 말이라고 해? 그딴 일 당연히 안 해! 날 뭐로 보고.”
“그치만 마지막에 돈 받았잖아.”
“……젠장, 그 시커먼 밤중에 더럽게 자세히도 봤네. 대체 어디에서 본 거야? 내가 엘프라 인간보다 감이 훨씬 예민한 편인데, 누가 근처에 있었던 기척은 전혀 없었거든?”
“쓸데없는 소리 말고 대답이나 해.”
내 말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곤 기운이 빠진 듯 허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후우, 봤으면 알 거 아냐. 그 돈은 그 새끼가 나한테 강제로 떠안긴 거야. 오늘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다고.”
“정말이지? 뭐, 어차피 그 계획은 실행하더라도 분명히 실패할 거야. 내가 방해할 거거든. 괜히 쓸데없이 힘 빼지 말라고 미리 경고해 두는 거야.”
“좆같네, 진짜. 안 해! 안 한다고!”
버럭 소리친 엔딜은 씩씩거리며 몸을 돌렸다. 지난밤의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기세등등해진 것 같았다. 내가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할 때였다. 별안간 그가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야, 네가 봐도 내가 진창이야?”
“뭐?”
“넌 정령사니까 이 상황이 더 객관적으로 보일 거 아냐. 그러니까 시큐엘을 괴롭히지 말라고 한 거겠지? 내가 씨발, 밤새 고민해 봤는데. 내가 하는 짓이 그렇게 추잡해? 정령사는 본인 능력 이용해서 돈벌이 좀 하면 안 되는 거야? 사람을 죽이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야?”
생각지 못한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의 모습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거친 입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매우 비장했다. 다가올 비난을 겸허히 감수하겠다는 듯, 애초에 내게서 좋은 대답을 기대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 같은 모습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내린 나는 들어온 광경에 다시 살짝 숨을 삼켰다. 엔딜의 두 손은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저 드높은 자존심에 떨리는 손을 감출 생각조차 안 하는 걸 보면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정령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건 분명 기분 나쁜 일이다. 그러니 그 점에 관해서는 모질게 말해 줘야 하는데, 그게 맞는 건데 생각과는 다른 대답이 입에서 튀어나간 건.
“……진창 아니야.”
“어?”
“시큐엘한테 억지로 시킨 거 아니잖아. 상급 정령이 강제로 시킨다고 따를 만한 녀석도 아니고. 정령사가 무슨 일을 하든 계약한 정령의 동의만 얻었으면 된 거지. 남이야 뭐라든 무슨 상관이야.”
물론 내뱉은 즉시 후회가 밀려들었다. 내가 미쳐! 대체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해 주는 거지?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뒤늦게 혀를 깨물고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이 대답엔 엔딜조차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은 사람처럼 멍하니 두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다, 당연하지.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써.”
에라,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나는 반쯤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말했다. 그래도 확실히 어색한 티가 났는지 엔딜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근데 너 나한테 물 뿌렸잖아.”
“……에잇, 그건 그거고! 암튼 살인이 더 낫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러니까 나도 방해하러 온 거지.”
“그런가.”
“그래! 새벽에 그 남자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애초에 그 사람은 사람이 사는 목적이 전부 돈에 있다고 여기는 것 같던데, 그런 편협한 사고에 휘둘릴 필요 없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전부 달라. 당연히 삶의 목적도 어느 한 사람이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냐. 기사가 전부 부자가 되고 싶어서 영주를 섬기는 게 아니듯, 마찬가지로 정령사가 나라에 귀속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돈이 목표라고 할 수는 없어. 하지만 청부 살인은? 그건 정말 돈을 벌기 위해서일 뿐이잖아. 가치가 전혀 달라.”
“……그 돈으로 누군가를 구할 수 있어도?”
착각일까. 왠지 질문하는 엔딜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금 의아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더 웃기지. 남의 것을 강탈한 사람이 자신의 것은 지키려고 한다? 이미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한 시점에서 그는 스스로 그럴 자격을 잃은 거야.”
“전장에 나간 사람도 결국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상대를 죽여.”
“그거야 전쟁은 지키지 않으면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게다가 상대는 적이고, 둘 다 동등하게 싸우는 입장이잖아. 어떻게 보면 서로 목숨을 건 공평한 관계지. 하지만 청부 살인은 일방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해치는 일이야. 그건 누구도 공평하다고 보지 않아. 그리고 돈을 버는 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어. 잘 생각해 봐. 누군가 물었을 때, 과연 그 방식이 최선이었다고 답할 수 있겠어?”
엔딜은 한참 동안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심각해진 표정을 보니 내 설득이 어느 정도 먹히긴 한 모양이다. 괜히 우쭐해지는 기분에 나는 더 신이 나서 말했다.
“아무튼 그 남자는 사상 자체가 기분 나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의 말엔 전혀 신경 쓰지 마. 아무리 네가 조금 치졸한 방법을 써서 돈을 번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살인자와 동급 취급을 해? 비교할 게 따로 있지, 정말.”
“……치졸한 짓이라고 생각하긴 하는 모양이네.”
“뭐? 윽! 아, 아니 이건…….”
이런, 실수로 너무 본심을 드러냈나 보다. 당황해서 입을 다물자 엔딜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장 욕부터 내뱉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한 표정이었다.
“너 거짓말 잘 못 하지?”
“……미안.”
“됐어, 솔직히 나한테 그딴 말은 비난 축에도 못 껴.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살인은 나도 최악이라고 여기지만, 그렇다고 내가 깨끗하단 생각도 안 해. 애초에 똥파리도 더러운 물에 꼬이는 법이니까.”
“아니, 그건…….”
“동의를 얻었으니 됐다고 했던가? 그래, 확실히 시큐엘과 합의를 보긴 했어. 하지만 내가 하는 짓이 멀쩡한 정령사라면 하지 않는 일들이라는 것도 알아. 씨발, 그거 아냐? 나 이것만 하는 거 아냐. 시큐엘에게 물을 만들게 해서 그걸 팔기도 하고, 가끔 서커스 같은 짓도 해. 누가 봐도 시큐엘을 앵벌이 시켜서 돈 벌고 있는 꼴이지. 다 알면서도 물어본 거야. 그냥 갑자기 푸념이 하고 싶어서.”
“너…….”
“하긴, 나 같은 건 푸념할 주제도 못되지. 누가 이 소리를 들으면 당장 기겁할 거다. 나 따위가 어떻게 푸념을 해? 진짜 내가 감히 뭐라고. 하하, 그거 아냐? 사실은 말이야. 난 지금 물의 왕에게 저주를 받아도 할 말 없는 처지거든.”
“어? 물의 왕?”
“바보 같긴.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님 말이야.”
“어어?”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이름에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엔딜은 그저 언급 자체에 놀란 것이라 인식한 듯 별로 수상히 여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무, 물의 왕이 왜?”
“아직 소문을 못 들은 모양이네. 실은 나 내 힘으로 정령사가 된 게 아니거든. 오히려 정령사가 될 소질이 전혀 없는 쪽이었지. 그랬는데 어느 날 물의 왕이 내게 시큐엘을 선물로 내려 줬어. 그래서 하루아침에 상급 정령사가 된 거야.”
그 이야기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시큐엘의 기가 막힌 사기극이었지.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얼굴을 찌푸리는데, 엔딜이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귀한 선물을 이렇게 막 다루고 있으니. 아마 그분도 나한테 굉장히 실망했을 거야. 그렇지?”
“으음, 뭐…….”
“맞아. 그래서 내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 거겠지. 내가 아무리 간절히 바라고 기원해도…….”
아니, 지금 나 네 앞에 있긴 있는데.
근데 이 녀석, 지금 간절히 바란다고 한 건가? 괜히 머쓱해져서 딴청을 피우다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엔딜을 바라봤다.
“물의 왕을 만나고 싶어?”
“뭐야, 넌 안 그래? 정령사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 으음, 그건 그렇지.”
내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자 엔딜은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곤 이내 피식 웃었다.
“시큐엘이 말해 줬는데, 물의 왕은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더라. 허리까지 내려오는 짙은 물색의 머리칼, 눈동자 색도 바다처럼 파랗다고 했어. 그의 숨결 한 번에 파도가 일고, 손끝으로 쓸면 아무리 지독한 병마도 달아난다고 하지. 솔직히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안 가. 상급 정령인 시큐엘이 그렇게 멋진데, 정령왕은 얼마나 굉장할까?”
“아하하, 뭘 그렇게까지야…….”
“……왜 네가 쑥스러워 하냐? 널 칭찬한 것도 아닌데.”
“어? 아니, 뭐어. 그, 그러게? 그냥 왠지 갑자기 남사스러워서? 아하하하…….”
“이상한 녀석.”
이번에도 엔딜은 황당해하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래도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는지 표정은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뭐, 어쨌든 이번 일은 안심해. 말했다시피 나도 살인은 별로니까. 난 확실히 이미 더러운 상태일지도 모르지만, 같은 진창이라도 진흙과 똥밭은 구분할 줄 알거든.”
“아, 그건…….”
“그래도, 아니라고 말해 줘서 고마웠어.”
“……!”
마지막 말은 거의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내 귀엔 선명히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땐 엔딜은 이미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자연체의 모습으로 멀찍이서 눈치만 살피고 있던 그의 시큐엘이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나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선 채 못다 한 변명들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하다못해 사연이라도 들어둘 걸 그랬나? 물어본다고 해서 쉽게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지만, 왠지 그렇게 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생각보다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다는 거 말이다.
* * *
촤아악!
파도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수면에서 둥그런 물체가 떠올랐다. 유리구슬처럼 안쪽이 훤히 비치는 거대한 공이었다. 구체의 표면은 물로 이뤄져 있었는데, 그 안쪽엔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방금 전 해저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엔딜과 그의 손님이었다.
“오오, 돌아왔다!”
“레너 님!”
갑판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길지 않은 엔딜의 영업시간 중에서 가장 호응이 좋은 순간이었다.
이윽고 물속에서 완전히 떠오른 구체는 배로 넘어와 갑판에 안전히 착지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에 맞춰 커튼이 걷히듯 천천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흩어졌다. 그렇게 증발한 물은 순식간에 공중에서 다시 한데 모여 익숙한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시큐엘이었다.
“우와아!”
“시큐엘 멋지다!”
구체가 해체되고, 그것이 다시 늑대의 모습으로 변하는 광경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 사람들은 또다시 환호했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물속에서 숨을 쉬게 하려면 산소막을 만들어 줘야 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정령은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구체를 따로 생성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시큐엘이 직접 틀이 되길 선택한 건 엔딜의 마나가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엔딜은 이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자, 그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정말 재밌었어요!”
첫 번째 손님은 아직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느 귀족가의 도련님이었다. 이번이 첫 도전인데도 시작부터 이용 금액의 다섯 배를 제시해 치열한 단골들의 경쟁을 물리친 행운아(?)이기도 했다. 엔딜이 능숙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소년은 별처럼 눈을 빛내며 아낌없이 칭찬을 건넸다.
“이렇게 재밌는 줄 알았으면 진작해 볼걸! 로키가 위험하다고 말려서 그동안 구경만 했는데 정말 아까운 짓을 했네요.”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빈말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중간 정착지에서 내린다고 했죠? 그럼 이제 얼마 못 하는 거잖아. 너무 아쉬워요.”
“도, 도련님―.”
폭포수처럼 재잘거리는 소년의 옆에서 왜소한 남자가 울상을 지었다. 소년이 물속에 들어가 있던 내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하인이었다.
“기다려 봐, 로키. 지금 대화 중인 거 안 보여? 아, 그래! 내가 첫손님이었으니 아직 이용 횟수 한 번 더 남아 있죠? 그거 내가 또 할래요. 그래도 돼요?”
“그건 상관없지만, 다른 손님들과도 의논해야 해서요.”
영리한 소년은 단번에 엔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다른 사람보다 비용을 더 주면 되는 거죠? 좋아요. 내가 조금 전 낸 금액이 10골드였던가요? 난 이번에도 10골드를 내겠어요. 도전하실 분 있나요?”
소년의 외침에 기다리고 있던 단골들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앞다투어 가격을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