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쏴아아―
선실에서 나오자 차가운 밤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날이 저문 하늘은 배에 매달아 놓은 등불만을 의지해 희뿌옇게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바다는 그 무엇보다 어둡고 은밀해진다. 별빛조차 비추지 않는 물의 표면은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새카맣기만 했다. 그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홀로 빛을 밝히며 전진하는 배의 모습이 마치 죽음의 강을 건너는 사신의 나룻배 같았다. 만약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조금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령왕이 된 지금, 물은 더 이상 내게 두려운 미지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잠든 시각이라 잡음 없이 고요한 바다를 보고 있으려니, 정령계에 있는 물의 영역에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뱃전 너머로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다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겠다, 갑판이나 천천히 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걸음을 멈춘 건 구석진 곳에서 들려온 작은 소리 때문이었다.
“……다……네.”
“그래서…….”
‘응? 대화 소리?’
마치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는 내가 서 있는 발판 아래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살피자 기둥 귀퉁이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워낙 구석진 곳에 있는 데다 어둠 때문에 모습을 분간하기가 힘들었지만 둘 다 남자라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이 시간에 밖에서 뭘 하는 거지?’
이성 간이라면 밀애를 즐기는 연인인가 보다 할 텐데, 남자 둘이라니 그림이 영 서질 않았다. 게다가 무슨 대화 중인지 두 사람의 분위기가 매우 심각해 보였다. 그저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 위해 서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때 마침 구름 사이로 드러난 달빛이 숨어 있는 인영들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췄다. 일반인에겐 별 차이가 없어도, 정령왕인 내게는 시야를 구분하기 충분한 빛이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모습을 확인하게 된 나는 바로 얼굴을 굳혔다. 지금 내가 만끽하고 있는 심란함의 원흉―엔딜이 바로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저 녀석을 만날 게 뭐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설마 이런 시기에 저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다행히 그들 쪽에선 내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나아졌던 기분이 급속도록 하락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괜히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뭐라는 거야. 사고를 위장해서 사람을 죽여 달라고?”
“……!”
평온한 어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대사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발을 멈췄다. 아직 앳된 음성은 엔딜의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돌아보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에 비해 마주 선 남자는 굉장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파이프를 꺼내 느긋하게 불을 붙이며 말했다.
“이해가 빠르군. 넌 여느 때와 똑같이 생활하면 된다. 평소와 똑같이 손님을 받고, 그를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면 돼. 단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손님이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게 된 것뿐이야. 그 정도는 네겐 아주 간단한 일이겠지?”
“씨발, 말이 되는 소릴 해. 누구 장사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영업 중에 그딴 사고가 일어나면 다음에 누가 이용하려고 하겠어?”
“물론 보수는 섭섭지 않게 주겠다. 평생 그런 장사는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말이야.”
“뭐야, 만 골드라도 주시려고?”
“10만 골드.”
마음껏 빈정거리던 얼굴은 이어진 대답을 듣는 순간 빠르게 굳었다. 평범한 사람은 일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액이었으니 당연했다.
“미친…… 10만 골드라고? 지금 구라 치는 거지?”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니야? 10만 골드가 뉘 집 개새끼 이름도 아니고.”
“물론 큰돈인 건 맞다. 하지만 이 정도 거사를 치르기에 아까운 돈도 아니지. 네가 잘 처리해 주기만 한다면.”
“대체 죽이려는 새끼가 뭐 하는 인간이기에…….”
“거기까진 네가 알 것 없다. 모르고 있는 편이 네 기분도 더 편할 거고 말이야. 어때? 10만 골드다. 정말 좋은 기회지 않나? 그저 약간의 사고인 거다. 누구에게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우연이 발생한 것뿐이지.”
“우연…….”
“그래, 우연. 길을 걷다가도 우연히 날아온 눈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게 사람이야. 흔치 않은 체험 중에 약간의 불운이 작용한 걸 누가 이상하게 여기겠나? 수습은 우리 쪽에서 다 알아서 할 거고, 널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고작 10분, 그 시간만 눈을 감으면 넌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얻게 된다.”
“…….”
엔딜은 침묵했고, 나는 불안에 빠졌다. 당장에라도 입을 열어 고함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대 쪽의 제안은 아무리 달콤한 말로 위장해도 명실공히 살인 청부다. 설마 시큐엘에게 그런 짓을 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거의 노려보다시피 엔딜을 응시했다. 만일 그가 이 제안을 수락한다면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무슨 원망을 듣든 계약을 강제로 깨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친 생각을 한 걸까. 다음 순간 엔딜이 냉담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하, 그동안 내가 돈 더럽게 밝힌다는 인상을 주긴 했나 보네. 이렇게 뒤가 구린 새끼들이 몰려드는 걸 보니.”
“……뭐라고?”
예상을 거스른 그의 반응엔 상대 남자 역시 당황한 듯했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동요가 서리자, 엔딜은 짧게 혀를 차며 비소를 흘렸다.
“왜, 설마 고맙다고 그냥 덥석 물 줄 알았냐? 내 모습이 어리다고 완전 우습게 봤나 본데, 나 이래 봬도 너희들보다 몇십 년은 더 살았어. 그렇게 큰돈까지 내주면서 죽이려는 인간이 뒤탈이 없을 거라고?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설령 진짜 뒤탈이 없다고 해도 그딴 더러운 짓은 안 해. 씨발, 날 뭐로 보고.”
“……돈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하! 내 뒷조사까지 하셨어? 당연히 필요하지. 너희들 인간 종족은 풀 쪼가리 하나도 돈 주고 사고팔잖아. 안 필요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그런데…….”
“그래도 이딴 식으론 안 벌어! 엘프가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종족이라는 거 못 들어 보셨나 봐? 아무리 내가 마을에서 이탈했다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심지어 난 정령사거든? 그것도 대륙에서 손에 꼽는다는 상급 정령사! 물의 왕이 직접 선택한 몸이라고!”
마지막 말에선 그가 가진 자부심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도 정령사로서 일말의 자각은 가진 채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최악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굳어 있던 남자는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순간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정령사라…… 흥, 지금까지 들어 본 것 중에서 가장 재밌는 말이군.”
“뭐야?”
남자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엔딜의 두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그것을 본 남자가 더 크게 조소했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대부분의 정령사들은 국가에 귀속되려는 경향이 있다. 정령사라는 사실을 밝히면 나라에서 꽤 극진하게 대접해 주거든. 그래선지 그들 스스로 자신이 꽤 존귀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 같더군. 하지만 그거 아나? 나라에서 그렇게 하는 건 단지 그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거나, 귀족이 되는 대가로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전장에 나가는 거나 그 둘이 뭐가 다르지? 명예? 공훈? 그거야말로 값싼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지. 그래 봤자 결국 똑같은 살인자 아닌가?”
“난 그런 짓…….”
“너는 다르다? 하지만 난 오히려 제대로 적임자를 찾은 것 같은데. 너야말로 정령을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지 않나. 내가 알기로 정령사는 자신의 정령을 사사로이 다루지 않는다고 하던데 말이야. 아, 설마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건가?”
“그, 그건…….”
정곡을 찔린 탓인지 엔딜은 쉽게 변명을 잇지 못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
“제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시장 바닥을 굴러다니면 고작 그 정도 가치밖에 안 될 뿐이지. 이미 진창을 구르고 있는데 손에 오물을 묻히는 건 불결하다니, 고결하신 엘프들은 자존심의 기준이 인간과는 아주 다른 모양이야? 난 미천한 인간이라 그런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 그게 네가 말하는 자존심인가? 고작 그따위가?”
“…….”
노골적인 힐난에 엔딜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모습을 그림처럼 감상하던 남자는 곧 품 안에서 작은 자루 하나를 꺼내어 엔딜의 손에 쥐여 줬다. 내용물은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그것을 응시하는 엔딜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날이 밝으면 계획대로 일은 진행될 거다. 결정은 네게 맡기지.”
“난…….”
“충고 하나 할까? 어차피 돈벌이를 할 거라면 좀 더 영리하게 굴도록 해. 뭐가 더 자신에게 이득인지 잘 생각해 보라고.”
“…….”
남자가 떠난 후에도 엔딜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나 역시 보이지 않는 자리에 서서 계속 그를 응시했다.
엔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저 내 기우인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손에 들린 것을 말없이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롭게만 보였다.
* * *
이튿날 하늘은 매우 맑았다. 여느 때와 같이 화창한 날씨였다.
궂은 날 한 번 없이 평온하게 이어지는 순항에 가장 크게 감동한 사람은 선장이었다. 그는 이미 며칠 전부터 이 모든 결과가 자신이 정화 의식을 한 덕분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사람들에게 생색내고 다니기 바빴다. 더불어 예언을 통해 풍랑을 경고해 준(사실은 전부 사기지만) 엔딜에게도 공을 돌렸는데, 덕분에 엔딜은 배 안에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갑판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미 이번 항해의 명물로 자리 잡은 엔딜의 ‘바닷속 체험 시간’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였다.
물론 서민이 부담하기엔 다소 높은 가격인 만큼 실제 고객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배 안의 인원이라고 해봤자 대략 300명 정도고, 그중에서 부유한 사람은 불과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여러모로 불안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소수의 고객만을 보유한 상태에서도 엔딜의 장사는 언제나 성업이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나섰던 사람들이 이젠 바닷속 광경에 매료되거나, 또는 남에게 부를 과시하기 위해 연거푸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 단 두 명이라는 제한이 승부욕을 자극하는 모양인지 날이 갈수록 그들끼리 경쟁하는 구도를 보이는 중이었다. 그 날 하루 치를 전부 전세 내어 경쟁자를 미리 차단하는가 하면, 경매처럼 가격을 높여 불러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때문에 구경꾼들의 최대 관심사 역시 ‘누가 오늘의 손님이 될 것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나는 갑판을 가득 채운 인파 사이에서 어제의 남자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그는커녕 비슷한 인상을 가진 사람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몇몇 귀족들은 엔딜이 장사를 시작한 후에 느긋하게 등장하곤 했는데, 아마 그 무리들에 속한 듯했다.
그 사이 준비를 마친 엔딜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매우 피로하고 수척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타나자 짜 맞춘 듯 어제의 남자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필 근방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상태였다. 곧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엔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에 덴 듯 황급히 피하는 시선엔 아직 채 다스리지 않은 번민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좋지 못한 전조였다.
나는 엔딜이 이용하는 통로에 서서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내 앞을 스치는 간격에 맞춰 그에게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시큐엘을 더는 괴롭게 하지 마.”
“……뭐?”
엔딜은 내 말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나는 당황하는 그의 모습을 힘껏 노려보았다. 그래 봤자 후드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겠지만.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그럼 너 말고 누구한테 하는 말이겠어?”
“대체 무슨…….”
“새벽에 있던 일 다 봤거든.”
“……!”
어리둥절해하던 엔딜은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을 사납게 굳혔다. 두 눈 가득 머금은 형형한 살기에 하마터면 무심코 어깨를 움츠릴 뻔했다. 그대로 두면 당장에라도 공격할 것 같은 태세라 나는 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미리 말해 두는데, 네 능력은 나한테 별로 통하지 않을 거야. 괜한 시도는 하지 마.”
“……뭐?”
“정령은 너한테만 있는 게 아니거든.”
대답과 동시에 나는 시큐엘을 불러 실체화시켰다. 물론 라피스의 마나를 빌린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상급 정령의 모습에 엔딜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잠시간 멍하게 시큐엘을 바라보던 그는 곧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