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마음에 들지 않는 신붓감을 데리고 온 아들을 대하는 시어머니의 심정이 이럴까? 내 평생 경험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감정인데,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그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화내고 싶은 기분을 눌러 참으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계약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다른 방법도 많잖아. 심지어 계약자를 골라도 하필이면 저런 녀석을…….”
―보, 보시는 것만큼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여기엔 그럴 만한 사정이…….
“아니, 됐어. 변명은 나중에 들을게. 일단 지금 당장 계약을 해지해.”
―왕이시여!
“나도 이런 식으로 남의 계약에 관여할 생각은 없어. 네 계약자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네가 선택한 거니까.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전부 감수한다는 거겠지. 그래서 네 의사를 존중하려고 했어. 하지만 이건 아냐.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
―…….
아무리 상급 정령이라고 해도 친화력을 강제로 유지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빠르게 흩어지는 친화력을 다시 멀쩡해질 만큼 복구하려면 가진 힘을 다 퍼부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정령왕의 경우 일단 계약만 하면 제한을 받는 일이 별로 없는 편이다. 계약자의 능력에 따라 쓸 수 있는 폭이 정해지긴 하지만,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힘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정령을 실체화시키는 것은 제외).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상급 이하의 정령들은 오직 계약자의 마나에 의존해야만 능력을 쓸 수 있다. 만약 스스로 힘을 쓰려면 고통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을 소비해야 한다. 즉, 지금 시큐엘은 자신의 수명과 맞바꿔 계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당연히 시큐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늑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픈 현실을 일깨웠음에도 여전히 미련이 남는 건지, 그는 계속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없던 두통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잘 생각해, 시큐엘. 이건 네 계약자를 위한 길이기도 해.”
―예?
“어차피 넌 오래 버티지 못해. 길어 봤자 몇 년?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 무너질 수도 있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더 클 거야.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 계약은 오래지 않아 끝나. 이건 너 스스로도 이미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저 엘프는 어때? 저 녀석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
―그건…….
그럼 그렇지. 허를 찔린 듯 찔끔한 표정을 짓는 늑대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 계약도 그리 오래되진 않았겠지. 그런데 벌써 저 엘프는 예언자로서, 정령사로서 수많은 활약을 하고 있어. 지나치게 네게 의존하고 있다고. 지금이야 네가 옆에 있으니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없을 거야. 하지만 네가 사라지면? 그땐 어떻게 될까?”
―…….
“아직 어린 엘프야. 이런 일상에 익숙해질수록 나중에 널 잃고 난 후에 찾아올 현실을 더 감당하기 어려울 거야.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네 계약자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어?”
시큐엘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계약자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자신만 희생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지, 설마하니 그런 부작용까지는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길 차분히 기다렸다. 잠시간 계약자를 지켜보던 그는 곧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직후 이어지는 말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용서하십시오, 왕이시여. 그래도 전 그를 돕고 싶습니다.
“……시큐엘, 너 정말…….”
―계속 고집을 피우겠단 뜻이 아닙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함께하겠습니다. 이번 항해를 무사히 마치는 것만은 지켜보고 싶습니다. 부디 그때까지만…….
“…….”
사그라지듯 작아지는 목소리가 안타까워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물러섰는데 내 주장만 펼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짧게 한숨을 토한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이번 항해까지만이야.”
―저, 정말입니까?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게 해야 네 마음이 편하다면 할 수 없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시큐엘은 진심으로 기쁜 듯이 웃으며 연거푸 절했다. 고작 그 정도 허가에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그래서일까. 원하던 방향으로 마무리되었건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마치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매달린 것 같았다.
* * *
옛말에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전생의 삶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공감해 본 적이 없던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적용된 적이 없었으니까. 언제나 두려움에 시달리며 잠 못 이루던 쪽은 나였고,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는 누구보다 평온했다. 적어도 그 시절의 내 세상은 그랬다. 그런데 한평생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말이 이제 와서 새삼 와 닿을 줄은 몰랐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날, 시큐엘에게 들었던 마지막 인사는 며칠 동안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광경에 잠까지 계속 설치고 나니, 자연스레 가슴속을 장악한 무거운 돌의 정체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양심……이겠지.’
나는 쓰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슴 부근을 꾹 눌렀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을 한 거다. 아마 내가 아니라 다른 정령왕이었더라도 그 상황에선 같은 판단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일방적으로 괴롭혔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과연 그 방법만이 최선이었을까?
‘아니.’
스스로 건넨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선명했다. 내겐 다른 방식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단지 그러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시큐엘이 내 설득을 받아들였다는 건 지나치게 독선적인 생각이다. 애초에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정령의 입장에서 다른 선택권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아아…….”
무심코 내뱉은 한숨 소리가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옆에서 대화 중이던 이사나와 카이테인이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엘? 무슨 일 있어?”
“왠지 요즘 계속 한숨만 쉬시는 것 같군요.”
“으음, 그게 말이죠…….”
나는 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자세 그대로 물끄러미 이사나를 응시했다. 내가 말없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이상했는지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엘?”
“이사나. 만약에 말이야, 네 아들이 굉장히 부족한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뭐? 아들?”
불쑥 건넨 질문은 내가 생각해도 매우 뜬금없긴 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편인 이사나의 눈동자가 더 휘둥그레졌다.
“난 아들이 없는데?”
“아니, 그냥 예를 들어 보자는 거야. 언젠가는 너도 결혼할 테고, 아이도 낳을 거잖아. 훗날 그 아이가 누가 보기에도 부족한 배우자를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아직 어린 소년답게 이사나는 결혼이란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눈에 띄게 수줍어했다. 하지만 대답하는 자세는 의외로 진지했다.
“으음, 글쎄. 내 아들이라면 장차 제국을 다스릴 차기 황제겠지? 난 딱히 상관하진 않을 것 같아.”
“응? 오히려 반대 아니야? 황제니까 결혼 상대에 더 많은 제약이 따를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는 그런 편이지. 하지만 우리 스왈트 황가엔 조금 특별한 황법이 있어.”
“황법?”
이어진 이사나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스왈트 제국에선 오직 황제만이 황비의 선출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평생 수많은 제약들에 묶이는 대신, 배우자만큼은 원하는 여인으로 맞이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법안이라고 했다.
“실제로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자유연애를 했어. 선황이신 내 아바마마께서도 그랬고.”
“헤에, 그럼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괜찮아?”
“응, 문제없어. 황비가 되는 순간 이미 신분이 달라지는걸? 과거의 신분이 어떠했든, 일단 황족이 되고 나면 황족이라는 그 자체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 제국의 기본 이념이야.”
물론 현실은 그렇게 이상적이진 않아서, 실제로 평민 출신의 황비가 나오면 무시하는 귀족들도 있긴 하다는 것이 이사나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높은 신분임에는 틀림없고, 황실의 비호가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대놓고 황비를 공격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흔히 가문 간의 규합을 통해 더 강한 권력을 누리려는 귀족 세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굉장한 일이었다.
“아무튼 부족하다는 부분이 재물이나 권세 쪽이라면 난 반대하지 않을 거야. 그 정도는 우리 황가가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
“가진 재주나 능력이 부족한 건?”
“그것도 가르치면 괜찮지 않을까? 누구나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지만 가르쳐 봐도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한들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아.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사람들을 곁에 두게 하면 되니까.”
“그럼 성격이 엄청 더러우면?”
아무리 이사나라도 이번 예시는 허용 범위를 벗어난 걸까. 지금까지 자신 있게 대답하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건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다른 건 다 괜찮아도 성격에 결함이 있으면 좀…….”
“그치? 그건 좀 그렇지?”
“어? 으응.”
나도 모르게 너무 반색했는지 이사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내 기대를 배신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아들이 좋다고 한다면.”
“윽, 그냥 감수하겠다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인데? 그런 사람이 황비가 되면 제국에 심각한 누를 끼칠지도 몰라.”
“그래도 그건 아직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닌 거지? 결국 나 혼자만의 판단인 거 아냐?”
“그, 그건 그렇지만……?”
“응, 그렇다면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할래. 정말 어떻게 될지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분명 내가 아는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인 건 아닐 거야. 애초에 아들이 선택할 정도라면 그럴 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의외로 아주 좋은 황비가 될지도 몰라. 난 아들의 눈을 믿어 볼래.”
“아들의 눈을 믿는다…….”
“내 아이잖아. 난 그 아이가 누구보다 곧고 현명하게 자랐을 거라고 믿어. 돌아가신 아바마마께서도 날 그렇게 생각해 주셨을 거라고 믿으니까.”
“……그래, 그렇구나.”
일순 무언가 커다란 것이 쿵― 하고 가슴속을 두드린 기분이 들었다. 비록 원하던 것과는 거리가 먼 대답이었지만 이사나의 말은 내게 수많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확신과 신뢰로 가득한 그의 얼굴은 별처럼 빛났고, 눈이 부실 만큼 환했다. 그의 올곧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마치 내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때 우리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카이테인이 지나가듯이 물었다. 마치 내 마음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잔잔한 눈빛이었다. 너무 대놓고 속내를 드러냈나 싶어 나는 속으로 조금 찔끔했다.
“으음, 별거 아니에요. 그냥 어떤 게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요.”
“어떤……?”
“한 사람이 조금 참으면 두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거든요. 그치만 그게 정말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그 일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반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반대요?”
“참으면 후회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으니, 참지 않는 상황을 가정해 보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괜찮은 겁니까?”
그 말에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으니까. 카이테인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둘 다 후회하는 건 마찬가지라면, 조금 덜 후회하는 쪽을 선택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뭔지 모르겠는걸요.”
“결정을 내리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그저 마음이 더 편해지는 쪽을 고르면 되죠.”
“그러다 결과가 잘못되면요?”
“글쎄요, 어쩌면 그 선택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걸요. 게다가 신중하다고 해서 다 좋은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조근조근 이어지는 말투는 그의 성정만큼이나 차분하고 부드러워서 묘하게 사람을 수긍시키는 힘이 있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그는 다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고난이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속엔 반드시 그만의 혹독한 겨울을 품고 있지요. 그러니 어떤 선택을 해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자기 자신을 믿고 마음에 날을 세우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결국 스스로 생각하기 나름이란 거군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분명한 건, 신은 또 다른 선택지를 내려 주신다는 겁니다.”
아마 누구보다 그다운 대답일 것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엘뤼엔의 기운 때문일까. 말투와 어조는 전혀 다르지만 마치 엘뤼엔이 직접 내게 그렇게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괜찮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그러나 맑아지는 머릿속과는 반대로 마음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아니,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카이 씨. 참고할게요.”
“혹시 무례한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충분히 도움 됐어요. 아, 그러고 보니 중간 정착지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했죠?”
“아마 나흘 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군요. 나흘…… 나흘이라…….”
엔딜은 중간 정착지에서 내린다. 그와 남은 인연도 그 정도가 다라는 소리였다.
“엘?”
혼자서 멍하니 중얼거리는 내가 이상했는지 이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내 목적을 바로 눈치챈 듯 카이테인이 물었다.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이 시간에 나가시려는 겁니까?”
“조금 답답해서요.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올게요. 기다리지 말고 먼저들 주무세요.”
내 말에 두 사람은 뭔가 말을 건네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혼자 내버려 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쓸데없이 일행들을 걱정시킨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앉아서 한숨을 내쉬느니 이편이 나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