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영주관에서 내게 무슨 일로?”
아무리 이종족이라도 신경은 쓰였는지 엔딜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남자들은 만족한 얼굴로 엄격하게 말했다.
“엔딜이라는 이름의 엘프가 미래를 본답시고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그에 대한 사실 여부 조사를 위해 영주님께서 직접 우리를 보내셨다. 대체 목적이 뭐지? 왜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거냐?”
“하! 거짓말이라니, 누가 거짓말을 해?”
“그럼 정말 예언을 한다는 건가?”
“아우씨, 진짜 말귀 더럽게 못 알아먹네! 예언이 아니라 예측이라니까? 예측이 무슨 말인지 몰라? 짐작하는 거라고, 짐작! 그리고 내가 맞히는 건 날씨뿐이거든? 그거 좀 알려 주기로서니 내가 선동이란 말까지 들어야 해?”
“흠, 단순한 짐작만으로 항해 중의 날씨를 맞힐 수 있다는 얘기냐? 엘프가 인간보다 감각이 예민하다고는 들었는데, 그 때문인 건가?”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내 경우엔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게 뭐지?”
“궁금해?”
남자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엔딜은 씩 웃었다. 그 미소에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찰나, 당황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엔딜이 팔을 뻗음과 동시에 강한 물기가 퍼져 나가는 모습이었다. 직감적으로 나는 그가 물의 정령을 소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덥수룩한 머리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 바람에 드러난 이마를 보니 계약의 징표가 찍혀 있었다. 분명 물의 인장이었다.
‘뭐야, 물의 정령사였어?’
그것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정령사였다. 내가 멀거니 눈을 깜빡이는 동안 순식간에 솟아오른 물기둥이 공중을 선회하며 그 자리에서 새파란 형체를 이뤄 냈다. 이윽고 등장한 것은 날렵하고 거대한 물의 늑대, 시큐엘이었다.
“자, 어때?”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늑대를 과시하듯 내보이며, 엔딜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들은 하얗게 굳은 얼굴로 그와 시큐엘의 모습을 한참 동안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령이로군.”
“그것도 그냥 정령이 아니지. 물의 상급 정령 시큐엘이란 말씀!”
“사, 상급?”
연달아 헛숨을 삼킨 남자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상급 정령의 힘은 대단위 마법만큼이나 파괴력이 강하며 계약자 자체가 극히 드물다. 제국들이 소드 마스터, 대마법사와 더불어 서로 데려가기 위해 안달이 난 존재이기도 했다. 엔딜은 그들의 당황한 모습을 음흉하게 둘러보며 웃었다.
“이제 내가 무엇을 근거로 예측하는지 알겠어?”
“……이거 정말 실례가 많았소.”
남자들의 말투가 정중해졌다. 천 가지 대답을 늘어놓는 것보다 가장 확실한 긍정이었다.
그들이 단번에 상황을 납득한 것도 당연했다. 정령 자체가 자연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보니, 가장 밀접한 관계인 정령사 역시 자연스레 계절과 날씨를 읽는 눈을 가지게 된다. 특히 상급 정령사는 정령과의 교감 능력이 극도로 발달한 존재라서 마음만 먹으면 며칠, 혹은 몇 달 후의 날씨까지도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었다. 즉, 살아 있는 기상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건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엔딜은 폭풍이 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장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억지로 외면했던 가설이 분명하게 와 닿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추궁하던 남자들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엔딜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위풍당당한 시큐엘의 모습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굉장해, 엔딜! 저 오만한 관료들을 찍소리도 못 하게 만들다니!”
“흥, 당연한 걸 갖고 뭘 그렇게 유난이야. 아무튼 봤냐? 저 새끼들 시큐엘 보니까 완전 쫄아가지고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하긴, 샌님들이 어디서 이런 정령을 볼 기회가 있었겠어?”
“물론이지! 평소에 기고만장하던 사람들이 벌벌 떠는 걸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더라. 넌 우리 마을의 자랑이야, 엔딜!”
“푸하하! 그걸 이제 알았냐?”
서로 다른 종족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신나서 떠드는 얼굴 역시 그 또래의 소년답게 천진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것을 좋은 기분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시큐엘의 모습이었다. 엔딜이 정령사의 신분을 이용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건 그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이곳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정령들을 기만했다고 여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들러리 역할을 감내하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주인을 따르는 하급 정령이라면 모를까, 상급 정령은 그 가치만큼이나 높은 자존심과 긍지를 지닌 존재다. 이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접근해서 말을 걸어 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곳을 떠나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녀석이다. 찝찝하긴 했지만 저 엔딜이라는 엘프를 추종하는 무리에 접근하는 것도 꺼림칙했고, 시큐엘에게도 나름의 생각이 있을 텐데 괜히 간섭하는 것 역시 내키지 않았다. 그저 거짓말을 멈출 수 없게 되기 전에 그가 알아서 잘 처신하길 바랄 뿐이었다.
이후 배에 올라 배정받은 선실에 짐을 풀 때까지, 나는 엔딜을 보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완벽한 오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거대한 배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출항을 시작한 건 정화 의식을 마치고 정확히 일 각이 지난 후였다. 어느 정도 육지에서 멀어진 다음에야 갑판에 나온 나는 그곳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금발의 엘프 소년―엔딜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어?’
그는 배 안에서의 생활이 익숙한 듯 뱃전에 앉아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마을에 자주 오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들르는데, 그 이유가 이 배의 중간 정착지인 리튼 항에 다녀오기 위해서라는 것 같았다. 왠지는 모르지만 두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앞으로 근 보름간은 싫어도 저 얼굴을 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괜히 근처에 있다가 엮이고 싶지 않아 다시 선실로 돌아가려는데, 주변에 있던 선원들이 우물거리며 그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기척을 느낀 엔딜이 물끄러미 응시하자 그중 한 사람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엔딜, 이번에도 그거 좀 부탁해도 될까?”
그의 은근한 말투에 엔딜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또 멀미냐? 넌 뱃사람 된 지가 얼만데 아직도 비실거려?”
“아, 아냐. 이제 멀미 안 해. 실은 어제 밤을 좀 샜거든.”
“뻔한 새끼. 내가 온다는 거 알고 일부러 밤새워 놀았지?”
“헤헤, 그렇지 뭐.”
어색하게 웃는 얼굴은 확실히 부족한 잠을 증명하듯 허옇게 떠 있었다. 오가는 대화를 통해 난 그들이 무엇을 부탁하는 건지 눈치챘다. 치유술을 쓸 수 있는 나만큼은 아니지만, 물의 정령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육체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특히 시큐엘이라면 일시적인 피로 회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거뜬하도록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가능했다. 바로 그것을 부탁하러 온 것이다. 엔딜은 선원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응, 나 오늘은 좀 피곤한데.”
“에이, 그러지 말고. 부탁 좀 할게. 응?”
“응? 은 무슨, 덩치 큰 사내자식이 어디서 역겹게 귀여운 척을 하고 지랄이야? 부탁을 하려면 좀 더 존경을 담아 해 봐, 새끼야.”
“네, 네, 분부대로 합지요. 오오, 우리 위대하신 엔딜 님, 이 미천한 몸을 갸륵하게 여기사 하해와 같은 은총을 내려 주소서! 이러면 어때?”
“크큭, 미친 새끼.”
욕설과는 다르게 웃고 있는 얼굴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 즉시 시큐엘을 소환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래도 친한 사람들에겐 선심도 쓸 줄 아네.’
불만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걸 느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다. 정령의 소환을 끝마치자마자 그가 불쑥 선원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내가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선원이 미리 준비해 둔 걸로 보이는 동전을 꺼내 내려놓았다.
“헤헤, 그럼 잘 부탁합니다요.”
“오냐.”
‘……돈을 받고 해 주는 거였냐!’
동전을 냉큼 품에 챙겨 넣는 엔딜을 보며 나는 속으로 탄성을 토해 냈다. 물론 정령사라고 해서 무조건 공짜로 베풀라는 법은 없다. 자신의 마나를 소비해 가면서 능력을 쓰는 위험 부담을 생각하면 오히려 적당히 사례를 받아 두는 게 무분별한 부탁을 방지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노력과는 별개로 왠지 모를 불쾌감이 가시질 않았다. 워낙 첫인상이 나쁘게 박혀서 그런 건지, 그의 모든 행동들이 다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 불쾌감의 원인을 확실히 깨닫게 된 건 배가 본격적으로 깊은 바다에 진입한 후였다. 마침 점심때이기도 했고 유속도 나쁘지 않았기에, 바람을 쐴 겸 나는 일행들과 함께 갑판으로 나왔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한산하던 갑판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글쎄? 가까이 가 볼까?”
궁금해져서 무리 속에 들어가 본 나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 한가운데 엔딜이 시큐엘과 함께 뱃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그랬듯 상급 정령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엔딜은 화려하게 엮은 꽃다발을 목에 두르고, 글씨가 적힌 피켓을 손에 들고 있었다. 마치 관광지나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는 행사장 같다는 느낌이 들 찰나, 우렁찬 엔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야! 물의 상급 정령과 함께하는 바닷속 탐험! 미지의 세계였던 바닷속을 구경할 수 있게 이 정령사 엔딜이 도와드립니다!”
‘……뭐?’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전혀 목적을 짐작할 수 없는. 황당해서 눈을 깜빡이는 동안 엔딜은 현란한 화술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물속에 들어가는 걸 겁내지 마십쇼! 시큐엘이 공기 막을 만들어 줘서 숨이 막힐 염려가 없어요! 물론 귀하고 아까운 옷이 젖는 일도 일절 없습니다! 정령과 해저 체험을 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 단 2골드로 모십니다!”
“…….”
한순간 찬물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야 알았다. 내가 계속 불쾌했던 이유. 단지 거짓말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는 것도.
지금까지 만난 어느 누구도 자신의 탐욕을 위해 정령을 이용한 적은 없었다. 하다못해 이사나는 목숨이 경각에 달한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내 도움을 받는 걸 미안해했다. 적어도 정령사라면 누구나 다 그럴 터였다. 정령은 일생을 함께 영위하는 동반자이자 가족이지, 아무렇게나 팔아도 되는 상품 같은 게 아니니까. 그러나 엔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단지 정령을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장사꾼일 뿐이었다.
너무 화가 나면 도리어 차분해진다더니,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고요했다. 그래도 굳은 표정만은 여실히 드러났는지 옆에 있던 이사나와 카이테인이 연신 내 기색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엘…….”
“으음, 미안, 이사나. 죄송해요, 카이테인 씨. 이만 들어가죠. 못 볼 꼴을 봤더니 기분이 별로 안 좋네요.”
“예,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들 역시 불편한 얼굴로 엔딜의 모습을 곁눈질했다. 나는 애써 몸을 돌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숨을 크게 삼켰다. 그동안 엔딜은 쏟아지는 사람들의 질문에 열심히 응대하고 있었다.
“물속 어디까지 갈 수 있어요?”
“손님께서 원하는 구간까지 가능합니다! 다만 너무 깊으면 추가 요금이 붙습니다!”
“해저 탐험을 하면서 물고기도 잡을 수 있나요?”
“에이, 물고기란 게 얼마나 잽싼 새끼들인데요. 직접 잡기는 힘들걸요? 그래도 정 갖고 싶으면 시큐엘에게 한두 마리 잡아오게 하죠.”
“어? 그런 게 가능해요?”
“당연한 질문을 하시네요. 그런 것도 못해서야 상급 정령이란 이름이 아깝죠.”
“…….”
아마도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던 모양이다. 나는 조용히 선실로 가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내 돌발 행동에 당황한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엘?”
뭘 하려는 거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나는 그냥 행동으로 답했다. 그 자리에서 바닷물을 일으켜 엔딜을 덮치게 한 것이다.
쏴아아! 촤아악!
“꺄아악!”
갑자기 거대한 파도가 갑판을 덮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물론 희생자는 엔딜 한 명뿐이었다. 속수무책으로 파도에 휩쓸린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 갑판 구석에 나동그라졌다. 축 늘어진 머리칼이 얼굴을 죄다 가리자 물에 젖은 생쥐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가는 것 같았다.
“흥, 쌤통이다.”
경악한 일행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나는 보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녀석을 향해서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뒷수습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기분만큼은 후련했다. 사고를 쳐 놓고도 후회가 되지 않은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