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외모도 외모지만 저 소년이 한눈에 인간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던 건 머리칼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귀 때문이었다. 둥그렇고 작은 편인 인간들의 것에 비해 소년의 귀는 토끼처럼 뾰족했고, 옆으로 길게 솟아 있었다.
“정말 엘프군요.”
카이테인은 당황하면서도 감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엘프 소년을 발견한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그가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삽시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왔다!”
“엔딜!”
“엔딜, 어서 와!”
이미 이곳에서는 꽤 유명인사인 건지 소년을 보는 사람마다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광장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는 곧 구름 떼 같은 인파 속에 파묻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몰려들었고, 소년은 능숙하게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갑자기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한 광장을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인기가 굉장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종족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 더 그렇겠지요. 그나저나 나이가 어려 보이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요.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것 같은데, 어린 엘프가 혼자서 인간들의 터전에 내려오다니…….”
카이테인은 인간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엘프 소년을 자못 염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폐쇄적인 성향이 강한 엘프 일족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이를 마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규칙을 갖고 있었다. 소년이 이곳에 있다는 건 결국 규율을 어기고 몰래 나왔다는 뜻이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과 친한 걸로 봐선 하루 이틀 어울린 게 아닌 것 같았다.
이 세계는 아직 노예 제도가 건재한 곳이고, 특히 이종족의 아이는 노예 사냥꾼의 표적이 되기 쉽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 스스럼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 불안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부모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 있지 않을까. 어느 종족이든 아이란 존재는 눈만 떼면 사고를 치는 건 매한가지인 듯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엘프 일족은 인간보다 오래 사니까 저렇게 보여도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이는 제일 많을걸요? 본인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 혼자 마을을 나왔겠죠. 지금까지 몸을 지킨 걸 보면 그렇게 약한 녀석은 아닐 거예요.”
“그렇긴 합니다만, 사람들의 나쁜 술수에 넘어가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자들은 피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이종족은 인간 사회에 익숙지 않다 보니 그런 걸 잘 감지하지 못하거든요. 특히 노멀 엘프는 성격이 워낙 온순해서…….”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그 순간 멀찍이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소리친 사람은 다름 아닌 화제의 주인공 엘프 소년이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는 자신보다 한 자는 더 큰 사람과 대치한 채, 있는 힘껏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벌하게 치켜뜬 눈에서 당장에라도 불꽃이 튈 것 같았다.
“싸움이 났나 보네요.”
“이런, 어서 말려야…….”
그렇지 않아도 우려하고 있던 일이 벌어지자 카이테인은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바로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을 목격하기 전까진.
“개새끼야, 변명은 다 끝났냐?”
“……!”
돌연 엘프 소년의 입에서 험악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청순하고 귀여운 외모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입담이었다. 당황한 카이테인이 잠시 주춤거리는 순간, 그가 상대에게 달려들어 모질게 배를 걷어차는 광경이 이어졌다. 누군가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맞은 상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것만 봐도 소년의 완력을 짐작할 만했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쓰러진 사람 위에 올라타 멱살을 움켜쥐었다.
“씨발! 이 곤죽을 쳐서 떡을 만들어 입에 쑤셔 박아도 모자랄 새끼가! 너 나이 몇이야? 니가 나보다 몇 살이나 더 처먹었는데 내 앞에서 감히 훈계를 읊고 지랄이냐고! 대가리도 큰 새끼가 뇌는 쥐똥만 하냐? 어디서 감히 생각 없이 주둥아리를 나불거려? 확 뱃가죽을 뒤집어서 내장을 다 꺼내 버린다!”
“허, 헉! 에, 엔딜, 진정 좀 하고…….”
“진정? 지금 진정이라고 했어? 이 멸치 눈깔 같은 새끼가 지금 뭐라고 그러는 거야? 좆까, 이 새끼야! 니가 먼저 나한테 헛소리를 지껄였잖아요~. 근데 나더러 왜 진정하래? 니 눈엔 내가 호구로 보이냐? 호구인 것 같냐고!”
그 뒤로도 차마 듣기 민망한 육두문자들이 폭언과 함께 고래고래 쏟아졌다. 행패는 일방적으로 엘프 소년만 부리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말리기에 급급했다.
카이테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나는 침울해진 그를 향해 어색하게 위로를 건넸다.
“뭐, 어디든 예외는 있잖아요.”
“……예.”
* * *
우리가 엘프 소년을 다시 만난 건 며칠 후 다음 배를 타기 위해 도착한 선착장 앞에서였다.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채 무언가를 열심히 떠드는 중이었다. 청중은 대부분 선장과 선원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그들 중에 우리가 타고 갈 배의 선장도 보였다. 그들은 무리지어 앉은 채 모두 진지한 얼굴로 소년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다 큰 어른들이 자기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소년(실제 나이는 많다곤 해도)의 이야기를 선생님의 강의라도 경청하듯 듣고 있는 모습은 충분히 이상했지만, 그게 이곳에서는 별로 이상한 광경이 아닌 것 같았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대부분 우리 같은 여행자들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소년의 말을 경청하는 건 잡일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장들처럼 대놓고 앉아서 듣진 못했지만 그들 모두 근처를 배회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탓에 부두의 일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는데도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감독관마저 그 무리 중에 섞여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창을 떠들던 소년이 연설(?)을 마무리하고 어디론가 사라지자 그제야 앉아 있던 사람들도 각자 일을 하러 흩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후련한 얼굴인 반면, 유독 우리가 탈 배의 선장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근심 어린 얼굴로 연거푸 한숨을 내쉬더니 곧 결심을 굳힌 듯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잠시간 자리를 비운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땐 옆에 신관 몇 명을 대동한 채였다. 복장은 일반적인 신관의 의복과 같았는데, 특이하게도 그들 모두 머리와 허리에 검은색 노끈을 감고 있었다. 자애의 여신 일리야의 사제군요, 내 옆에서 카이테인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만나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신관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선 중급신인 것 같았다.
‘갑자기 웬 신관들이지?’
선장은 자애의 신관들과 함께 배에 올라 내부를 구석구석 돌기 시작했다. 때때로 멈춰 서서 기도를 하거나 물을 뿌리는 둥, 무언가 의식으로 보이는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화 의식입니다.”
“정화?”
“앞날에 불운이 닥치지 않기를 바라며 신의 가호를 빌어 더러운 액들을 떨치는 의식이지요. 보통 큰일을 앞둔 사람들이 신전에 청해 하는 의식입니다. 선장이 이번 항해가 많이 불안했나 보군요.”
아마 이 세계에서의 제사나 고사 같은 것인 모양이다. 왠지 재밌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해서 마냥 구경하고 있는데, 뒤쪽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구두쇠로 유명한 선장이 무슨 일이래? 정화 의식은 효과도 별로 없고 돈만 많이 든다고 지금껏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잖아?”
“이번에 가는 항로에 폭풍이 일 거라는군.”
“아하! 그래서 저리 부리나케 신관들을 모셔온 거구만. 이번에도 엔딜의 예언이야?”
“응, 그렇다나 봐.”
“잘 생각했네. 괜히 무시했다가 개죽음당하느니 아까워도 돈 몇 푼 쓰는 게 낫지.”
“암, 엔딜의 예언이면 틀림없으니까.”
확고한 음성 속에 섞인 낯설지 않은 이름에 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처음 엘프 소년을 봤을 때, 사람들이 그를 향해 ‘엔딜’이라고 불렀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엘프가 예언자였나?’
이제야 사람들이 그에게 앞다투어 몰려들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난히 인기가 많다 싶더니 예언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트로웰의 고유 능력이 혜안이기 때문일까. 극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땅의 기운을 강하게 타고난 사람들 중에선 간혹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을 갖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았다.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앞날을 궁금해하고 또 알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시대를 불문하고 예언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수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엔딜은 사랑스러운 외모에 엘프라는 종족의 특수성까지 더해진 만큼 충분히 사람들의 환심을 살 만했다.
문제는 그 예언이 틀렸다는 거다. 적어도 물의 정령왕인 내가 탄 배가 폭풍에 휘말릴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으니까.
이 세계에서 자연적인 현상들은 대부분 정령들이 일으키는 행위다. 폭우나 풍랑 역시 마찬가지. 내가 보기엔 한동안 풍랑을 일으킬 계획도 없어 보였지만, 설령 사전에 예정된 일이었더라도 내가 나타난 이상 전부 보류되었을 터였다. 감히 자신들의 왕과 그 계약자가 탄 배를 뒤집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그것뿐이었다면 난 그냥 엔딜의 예언 능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미래는 수많은 변수의 작용이니 예지력이 약하면 얼마든지 잘못된 유추를 내놓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때마침 우연히 보게 된 광경이 그런 생각을 바꾸게 했다. 정화 의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신관들이 근처에 있던 엔딜을 발견하더니, 그에게 다가가 은밀히 무언가를 건네준 것이다. 순식간에 이뤄진 일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똑똑히 목격했다. 물건을 받아 든 순간 엔딜의 얼굴에 떠오른 만족스러운 미소까지도.
“……이거 어째 일이 묘하게 흘러가네.”
착각이 아니라면 절그럭거리면서 건네진 자루는 아무리 봐도 돈주머니였다. 정화 의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신관이 대체 무슨 용건으로 엔딜에게 돈을 건네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에이, 설마…….”
문득 이 상황에 가장 들어맞는 그럴듯한 가설이 떠올랐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그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예언자가 신전과 결탁을 하다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것도 고결한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인데 말이다.
비록 말투가 좀 험하긴 하지만 엘프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오늘 처음 만난 상대를 확실치도 않은 정황만으로 판단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 신관과는 개인적인 다른 용건이 있었을 수도 있고, 내가 잘못 봤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워낙 수상쩍은 상황이라 그런지 목격한 광경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 예언자가 맞기는 한 걸까? 그러고 보니 그런 능력을 지닌 것치곤 지나치게 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성으로 치자면 오히려 물에 더 가까웠는데 그조차도 희미해서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다. 즉, 지극히 평범했다.
“네가 엔딜이란 이름의 엘프인가?”
그를 수상하게 여긴 건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신관에게 받은 자루를 품에 넣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엔딜을 향해 성인 남자 몇이 접근했다. 무슨 기관에 속해 있는 것인지 모두 정복 차림이었다. 낯선 자들의 접근에 경계심을 느꼈는지 느긋하게 기대어 서 있던 엔딜의 표정이 바로 사납게 변했다.
“……니들은 뭐야?”
“그건 우리가 할 말이다. 네 이름이 이 근방에서 엄청 유명하던데. 예언 능력을 가진 게 정말 사실이냐?”
흥미를 담은 사내들의 눈이 탐색하듯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의외였던 건 엔딜의 반응이었다.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금시초문이라는 듯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뭐? 예언? 그게 무슨 개소리야?”
“발뺌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이미 신뢰하는 정보통을 통해 전부 확인 절차를 거치고 온 참이니까.”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제대로 알아먹게 얘기해.”
“이 마을 사람들이 다들 그러더군. 네가 하는 말은 전부 다 맞는다고 말이야. 심지어 항해 중의 날씨도 척척 맞힌다고 하던데.”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엔딜의 표정에서 짜증스러움이 사라졌다. 그 대신 떠오른 건 날이 서린 비소였다.
“뭐야, 그런 얘기였어? 난 또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인정하는 거냐?”
“내가 하는 말이 다 맞는 건 그만큼 아는 게 많아서 그런 거고. 날씨 예측은 말 그대로 예측이지, 병신아. 그게 어떻게 예언이랑 같냐? 너 돌대가리냐?”
“……입이 매우 험한 놈이로군.”
“놈? 씨발, 이래 봬도 내가 너보다 오십 년은 더 살았거든? 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리는 영주관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영주관?”
영주관에서 파견되는 사람들은 대개 공직자들이다. 여느 세상이 다 그렇듯 이곳에서도 관료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아니, 즉결 심문이나 심판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한국의 관료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