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아무튼 난 알렸으니까 트로웰에게 연락해 봐.』
“트로웰은 왜?”
『블레스터를 지하에 묻은 게 그 녀석이거든. 아마 그 일에 가장 관심이 많을 거야.』
“흠, 그렇구나. 알겠어. 그럼 지금 바로 연락해 볼게.”
일단 정령을 보내서 소식을 전하면 되겠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슬슬 통신을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그러자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라피스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 내 얘기 다 안 끝났거든? 혹시나 싶어서 미리 말해 두는데, 연락 수단으로 물의 정령을 보낼 생각이라면 관둬. 가급적 땅의 정령에게 전달하게 하는 게 좋을 거다.』
“응? 왜?”
『혹시 엉뚱한 화풀이 당할지 모르니까. 그 녀석 열 받으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거든. 괜히 귀한 정령 하나 잃게 될지도 모르잖아.』
“설마…….”
『설마는 무슨. 넌 그 녀석의 좋은 면만 봤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내가 장담하는데, 이번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성격이 더러운 건 트로웰일걸?』
“이번?”
『그전엔 전대의 엘퀴네스가 있었으니까.』
“…….”
묘하게 울컥하면서도 이해가 되는 건 왜일까. 그래, 솔직히 말해서 엘뤼엔 성격이 조금 나쁘긴 하다. 하지만 트로웰에 대한 평가엔 별로 동의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상당히 성격 좋은 편 아닌가? 늘 웃고 있는 데다 짜증을 내는 모습조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당연한 것을 물을 때도 귀찮아하는 법이 없고 항상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보통은 그런 사람을 두고 ‘다정하다’고 말하지, 아마?
『글쎄, 그건 네가 아직 그 녀석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니까.』
미심쩍어하는 내게 라피스는 혀를 차며 말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라 나는 발끈했다.
“트로웰의 동족은 나거든?”
『그 녀석을 더 오래 알아온 건 나지. 넌 설마 네가 태어나서 본 몇 달간의 모습이 그의 전부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윽, 그거야…….”
『아무튼 난 충고했어. 괜히 저질렀다가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라고.』
진지한 경고를 마지막으로 통신은 완전히 끊겼다.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거멓게 화면이 꺼지고 있는 구슬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말을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사실 트로웰에게 내가 모르는 이면이 있다는 것보단, 라피스의 장난에 걸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더 컸다. 그 녀석이라면 날 골릴 작정으로 연극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고민 끝에 난 그냥 시큐엘을 통해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깊은 바다 위라 땅의 정령을 찾는 게 번거롭기도 했고, 무엇보다 라피스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것에 반발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가 소심한 성격 아니랄까 봐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데, 염려와는 다르게 시큐엘은 아무렇지 않게 소식을 전하고 돌아왔다.
―알려 주신 대로 전해 드리고 왔습니다.
“어, 으응, 트로웰이 뭐라고 해?”
―땅의 왕께서 말씀하시길, 그 일에 관해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십니다. 어차피 매미의 우화일 뿐이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매미의 우화?”
―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거, 매미 유충이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는 걸 말하는 거 아닌가? 블레스터가 나타난 게 매미 우화랑 같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난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슬쩍 시큐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기, 근데 트로웰의 기분은 어때 보였어? 화난 것 같았어?”
―예? 아뇨, 딱히 별다른 내색은 없으셨습니다.
“그래? 아무렇지 않아 보였단 말이지?”
―예, 평소와 같으셨습니다.
뭐야, 그럼 그렇지. 역시 라피스가 괜히 겁을 준 거였잖아. 속았다는 생각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생각해 보면 트로웰이 그럴 리가 없었는데, 잠시나마 그를 오해할 뻔했다는 게 너무 미안하고 창피했다.
덜컥! 그때 선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얼굴을 빼꼼 디밀었다. 조금 상기된 모습의 이사나였다.
“엘! 곧 항구에 도착한대!”
“아, 응, 알았어. 나갈게.”
육지는 오랜만이라 그런지 그는 평소보다 훨씬 들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잠시 주춤했다. 근처에 놔둔 통신석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통신이 끊겨 평범한 구슬로 돌아온 그것은 이미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속에 라피스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엘?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내가 다신 라피스 말을 믿나 봐라.’
나는 신경질적으로 통신석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 * *
“카리브디스 공작?”
“응, 어떤 사람이야? 구체적으로 알려 줘.”
본격적인 하선(下船)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이사나에게 대공의 오른팔이라는 남자에 대해 물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던가. 트로웰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위험한 정령검을 손에 넣은 장본인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는 알아 둬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사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이름은 파이런, 평민 출신 기사로 현재 서른한 살이야. 열아홉 살에 소드 마스터가 됐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이듬해인 스무 살에 공작 작위를 받았어. 카리브디스라는 성은 작위를 받을 때 선황제께서 내려 주신 거야.”
“헤에, 평민 출신이었구나. 성격은 어때?”
“글쎄, 그 부분은 나도 잘 모르겠어. 워낙 과묵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서. 다만 예전부터 병사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아주 좋았어. 아무래도 소드 마스터니까 당연하겠지만. 출신도 그렇고 이례적인 출세 때문에 질시도 많이 받았을 텐데 단 한 번도 소음이 일어나지 않았던 걸 보면 통솔력이 있는 남자인 것만은 분명해.”
“흠, 그렇구나. 그런 대단한 사람이 왜 하필 대공 밑에 있는 거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를 뒷받침해 준 사람이 바로 숙부거든.”
대답과 함께 이사나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작이 되기 전의 그는 원래 마신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신관기사들의 시중을 들면서 검을 몰래 훔쳐 배웠는데, 우연히 그가 홀로 훈련하고 있는 것을 본 대공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자가 됐다. 그로부터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대충 어떤 관계인지 알겠어. 한마디로 자신의 재능을 처음으로 알아준 사람이라는 거네. 으음, 이렇게 되면 회유하기 쉽지 않겠는걸.”
“공작을 회유하려고?”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이사나를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일단 생각만 해 두는 거야.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면 그게 좋잖아.”
“으음, 그렇긴 하지만 아마 힘들 거야. 공작은 숙부에게 충성 서약을 했거든. 숙부는 마신전에서 지낼 동안 대신관들을 대표하는 신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그게 다 공작이 세운 공이라는 말도 들었어. 그가 숙부를 신관장으로 만들려고 배후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다 도맡아서 했대.”
“그, 그래?”
“응, 그리고 이건 확인되지 않은 소문인데, 당시 마신전에는 숙부 말고 또 다른 황족 출신의 대신관이 있었거든. 내게는 막내 숙부가 되시는 분이었지. 낙마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그 일을 공작이 주도한 거라는 얘기가 있어. 사실 그 때문에라도 나는 그를 좀 달갑게 여기지 않아.”
“……!”
그 얘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신전 내 권력이 양분되어 대립 구도를 이루던 시기에 일어난 공교로운 사고였다고 했던가? 그 사건으로 대공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고 하더니, 구체적인 소문까지 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까지 하는 꼴을 봐서는 단순히 헛소문이 아니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 것 같지만. 그걸 시킨다고 하는 쪽도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결국 공작도 똑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단 말이지. 그런 사람의 손에 정령왕이 힘이 들어가다니, 정말 괜찮은지 모르겠네. 미네르바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아직 본 적도 없는 대공이 광소를 터트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충직한 신하가 더 강해졌으니 지금쯤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것이다.
애초에 미네르바는 왜 정령왕의 힘이 담긴 검을 만든 걸까? 그로 인해 벌어질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구보다 이성적인 미네르바가 그랬다니 더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힘을 나눴다면 지금 그의 상태도 온전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평소 유난히 나른하고 힘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당장에라도 찾아가서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나는 꾹 눌러 참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는데 괜히 실수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미네르바 특유의 분위기가 내겐 아직 조금 어려웠다. 경솔한 질문으로 그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면 나는 분명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트로웰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가 아무 문제없다고 하면 정말 문제가 없는 거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머릿속의 잡생각을 털어 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 *
배가 정박한 곳은 국경에 가까운 해안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다음 배를 타고 카리프 해를 건너면 스왈트 제국 영토에서는 완전히 벗어나는 셈이었다. 그러나 검문이 엄격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지금껏 거쳐 간 어느 마을보다 병사들의 숫자가 적었다. 오랜 수행으로 이곳저곳을 많이 다녀 본 덕에 제국 지리 정보에 밝은 카이테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지역은 엘프의 영역과 근접해 있어 제국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일종의 중립 지역이라고 해야 할까?
“헤에, 엘프의 영역이라…….”
“아주 가깝진 않지만 며칠 이내로 닿는 거리입니다. 제국의 입장에선 통제하기 버거울 수밖에 없죠.”
물론 그렇다 해도 엄연히 다스리는 영주가 있고, 경비대도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우리 일행은 필수로 후드를 착용했다. 사실 새삼스럽다고 할 수도 없는 게, 항해 중에도 선실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늘 후드를 착용하고 다닌 편이었다. 좁은 장소에서 괜히 사람들 눈에 띌 필요가 없다는 카이테인의 조언 때문이었다.
확실히 내 머리색이나 이사나의 외형은 매우 튀는 편이었고, 달갑지 않은 호기심을 살 우려가 있었다. 이제 라피스가 있어 마법으로 우릴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일들은 가급적 삼가야 했다. 왠지 이 여정이 끝날 때까지 후드와 떨어져 살 수 없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나마 예전처럼 필사적으로 감출 필요는 없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랄까.
그러나 암울한 현실이야 어쨌건, 지금 당장 내 흥미를 끈 것은 근방에 산다는 엘프들의 존재였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그들의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드래곤보다 더 기대되는 종족이었다.
“그러고 보니 엘프 종족은 숲에서 산다면서요?”
“아, 그건 노멀 엘프입니다.”
“노멀 엘프? 엘프에도 종류가 있어요?”
처음 듣는 말에 관심을 보이자 카이테인은 빙긋 웃으면 설명을 이었다.
“하이 엘프와 블루 엘프, 그리고 다크 엘프까지 포함해서 총 네 개의 일족으로 구분됩니다. 보통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엘프의 모습은 노멀 일족이죠. 피부가 진주처럼 하얗고, 색이 빠진 것처럼 옅은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지닌 것이 특징입니다. 숲에 사는 것이나, 곡식과 과일, 꿀 같은 채식만을 즐기는 것은 노멀 엘프만의 성향입니다. 같은 엘프라고는 해도 각자 생김새도 다르고 주식도 전부 다르거든요.”
“그렇구나. 그럼 다른 엘프들은 어떤데요?”
“일단 노멀 엘프와 가장 비슷한 성향을 지닌 것은 하이 엘프입니다. 외형도 제일 비슷하죠. 다만 이들은 신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제사장 일족이라 엘프라기보다는 거의 신족으로 분류됩니다. 엘프들 사이에서도 귀족 계층이기도 하고요. 드래곤들도 이들 일족에겐 예우를 갖춘다고 들었습니다.”
“헤에, 그리고요?”
“블루 엘프와 다크 엘프는 피부색으로 구분합니다. 블루 엘프는 푸른색 피부에 은발을, 다크 엘프는 검은색 피부에 회색 머리칼을 지닌 것이 특징이죠.”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그들의 주식물이었다. 다크 엘프는 육식을 즐기는데 대부분 날 것으로 먹고, 블루 엘프는 해산물과 어패류를 주식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 일족은 노멀 엘프보다 숫자가 매우 적고 서식지의 접근이 까다로워 인간과의 교류가 원만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서식지라면…….”
“다크 엘프는 사막 한가운데서 삽니다. 운 좋게 마을을 발견해도 이튿날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신기루 왕국이라고도 불리죠. 블루 엘프는 바다에 있는 바위섬들에서 산다고 들었습니다. 하이 엘프를 제외한 세 일족 중에선 블루 엘프가 가장 인간에게 배타적인 편입니다. 그들의 육체에 내재된 몬스터의 성향 때문이라고도 하더군요.”
“엑? 몬스터요?”
“네, 이건 저도 그냥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오래전에 인어의 모습을 한 세이렌이란 일족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아름답지만, 인간을 홀려 잡아먹는 습성 때문에 몬스터로 분류되는 일족이었죠. 그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모습이 변화하면서 지금의 블루 엘프가 된 거라는 설이 있습니다.”
“윽, 그게 사실이면 그냥 이름만 엘프인 거네요.”
“그래도 지금은 인간을 잡아먹진 않으니까요. 인어의 후손이라니 오히려 매력 있지 않습니까? 전 기회가 되면 한 번쯤은 만나 보고 싶은데요.”
카이테인은 소년처럼 들뜬 얼굴로 말했다. 어른스러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런 전설이나 동화 같은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이사나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낮게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덩달아 들뜬 기분으로 말했다.
“이곳에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바다에 가까운 해안 도시고, 가까이에 동족의 영역도 있잖아요.”
“하하, 아뇨, 그건 어려울 겁니다. 엘프는 같은 일족끼리라도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거든요. 심지어 마을에서 나오는 일 자체가 드뭅니다. 게다가 정도의 차이만 있다 뿐이지, 인간에게 배타적인 건 다 마찬가지라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런 마을 아래까지 내려오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에이, 그럼 노멀 엘프도 볼 수 없겠네요?”
“예, 유감스럽지만…….”
“어? 엘프다!”
“……!”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들려온 이사나의 외침에 나와 카이테인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보낸 나는 멀찍이서 총총걸음으로 뛰어가는 사람을 발견했다. 밀가루를 뿌린 것처럼 흰 피부에, 거의 은발에 가까울 정도로 옅은 금색 머리칼을 지닌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