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25화 (125/608)

제125화

“너 설마 그 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내내 의기양양했던 존재가 굳어 있는 모습에 카리브디스는 의아해졌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한 다음 순순히 대답했다.

“블레스터라고 하더군.”

“……!”

메세테리우스로선 차라리 듣지 않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그때 만들어진 검의 이름이 바로 블레스터였으니까!

‘제기랄! 말도 안 돼! 저게 블레스터였다고? 저게 왜 세상에 나와 있어! 분명히 다른 정령왕들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봉인되어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를 갈았다. 반신의 힘이 깃든 검이다. 풍문에 의하면 저 검을 만들기 위해 상급 정령 하나를 희생한 걸로 모자라 자신의 수명까지 깎았다는 말도 있었다. 오죽하면 지켜보다 못한 다른 정령왕들이 미네르바를 미쳤다고 판단, 차라리 소멸시키자는 의견까지 분분했다고.

그렇게 만들어진 괴물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원수의 손안에!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지금 눈앞에 미네르바가 있다면 욕이라도 한바탕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여유롭게 즐기는 척을 하긴 했지만,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는 걸 잊은 건 아니었다. 본신인 드래곤의 육체도 벨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다. 일단 한번 주도권을 잡으면 얼마든지 그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시작부터 전력을 다해 몰아붙였다. 애초에 반격할 기회를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지금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려 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도움을 청해야 하나?’

정령왕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건 같은 정령왕뿐이다. 블랙 드래곤인 그는 땅의 정령왕과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트로웰은 그들 형제의 대부기도 했다. 도움을 요청하면 그는 당연히 와 줄 것이다. 그러나…….

‘안 돼! 그런 창피한 짓을 할 순 없지!’

일말의 자존심이 당장이라도 부르고 싶은 충동을 가로막았다. 그렇지 않아도 드래곤의 세계는 좁은 편이었다. 전투 도중에 남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보전하다니, 그 사실이 알려지면 그는 온 일족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 비웃음은 어찌 감당할 것이며, 일족의 명예를 최우선으로 하는 아버지 앞에는 무슨 낯으로 설 것인가. 특히 그의 잘난 동생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게 분명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싸울 순 없고…….’

소드 마스터에게 반신의 힘이라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다. 이미 승산이 없는 전투를 감행할 정도로 그는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구걸해서 살아남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인간의 손에 죽는 것도 놀림감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인간의 손에 죽은 일족은 드래곤 계보에 이름을 남기지도 못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 쪽에선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메세테리우스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흠흠, 이제 충분히 혼쭐이 났겠지?”

“……뭐?”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그는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너도 모르고 한 짓인데 내가 너무 심하게 군 것 같아서 말이다. 뭐, 내 물건들은 이미 다 찾았고, 너도 이만하면 내 분노를 알아들은 것 같으니 대충 여기까지만 해 두도록 하지. 너 정말 운 좋은 줄 알아. 내가 이렇게 관대하게 나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거든.”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군. 딱히 관대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만.”

“뭐야? 거참, 상대가 호의를 베풀면 받아들일 줄도 알라고. 넌 그렇게 싸움이 좋아? 동료들이 피 흘리고 쓰러지는 게 아주 기뻐 죽겠어? 내가 네 부하들을 전부 다 도륙해 줬으면 좋겠냐고! 이거 멀쩡하게 생겨서 완전 잔악무도한 놈 아니야?”

정작 일방적인 살육을 벌인 쪽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메세테리우스는 뻔뻔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한소리들은 카리브디스는 그답지 않게 주저했다. 상대의 행동이 워낙 뜻밖이기도 했고, 본래 말재간이 없는 편이라 이런 상황에서의 대처 방법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치? 역시 아니지? 너도 이쯤에서 끝나는 게 낫다고 여기는 거지?”

“그건…….”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거봐, 내가 이렇게 남의 마음을 잘 안다니까? 난 참 배려심도 좋단 말이지.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난 이만 간다! 이제 다신 보지 말자고!”

“뭐? 이봐!”

뒤늦게 의미를 파악한 카리브디스가 얼굴을 찌푸렸을 땐, 이미 메세테리우스는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계책―줄행랑을 친 것이다.

우당탕!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한 무리의 병사들이 문을 부수며 들이닥쳤다. 폭발음을 듣고 뒤늦게 달려온 자들이었다.

“공 각하! 무사하십니까?”

안으로 들어선 병사들은 폐허로 변한 방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 하나가 거의 날아가다시피 한 상태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리브디스는 잠시간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저들이 말려들지 않게끔 먼저 물러난 건가?’

뼛속까지 기사인 그는 설마 상대가 결투 중에 도망을 쳤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토록 고강한 힘을 지닌 존재가 자신에게 겁먹었으리라곤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메세테리우스가 마지막에 던지듯 건네고 간 말을 그대로 믿는 쪽을 택했다.

‘무고한 살상을 피하려고 하다니, 생각보다 악인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오해가 깊어지고 있었다.

* * *

“젠장!”

메세테리우스가 공간 이동 마법으로 도착한 곳은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숲 안이었다.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이를 갈았다.

이름이 카리브디스라고 했던가? 그 건방진 소드 마스터는 그가 세운 복수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제물이었다. 다른 소유자들은 다 찾아 없애면서도 그자만은 끝까지 남겨둔 것도 오직 이 날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설마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이런 식으로 어이없게 실패할 줄이야.

‘으아아, 열 받아! 처절하게 짓밟아 죽인 후에 본보기로 시체를 성벽에 걸어 두려고 했는데! 제대로 시작도 못 해 보고 물러나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비실거리고 있을 때 바로 숨통을 끊었어야 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됐는데, 괜히 폼을 잡는다고 시간을 끌었던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됐다. 역시 소드 마스터에겐 빈틈을 주어선 안 된다. 이미 알고 있었던 교훈이 새삼 가슴을 파고들었다. 심지어 그자는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다. 미네르바의 힘을 얻었으니 인간 중에서는 물론, 드래곤 중에서도 그의 기척을 읽어 낼 수 있는 존재는 없을 터였다. 그 과정에 자신이 일조했다 생각하니 기분이 더 더러웠다.

‘가만, 근데 저거 그대로 둬도 괜찮은 건가? 세상에서 사라진 힘이 다시 튀어나왔는데 정령왕들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블레스터의 존재를 알리려면 발견 경위도 함께 밝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인간에게 능욕당한 과정도 전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할 순 없지. 누가 아는 척할까 보냐?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그래, 난 오늘 이곳에 오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게 없단 말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는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듯이 중얼거리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그의 정체가 직접적으로 드러날 만한 흔적은 일부러 남기지 않았다. 이대로 떠나기만 하면 아무도 그의 개입을 알아내지 못할 터였다. 메세테리우스는 그렇게 자신했다. 바로 다음 일을 겪기 전까지는.

따악!

“으악!”

순간 무언가가 그의 뒤통수를 강하게 강타했다. 압력에 밀려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 엄청난 충격이었다.

“뭐, 뭐야! 감히 어떤 자식이야!”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한 그는 얼얼한 머리를 부여잡고 돌아보았다. 기분도 더러운데 잘됐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혼쭐을 내주리라 내심 결심한 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생각하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을 공격하는 정신이상자는 흔치 않으며,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덤빌 수 있는 존재 역시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직후 시야에 잡힌 광경에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존재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흐응, 이게 누구야. 메테 아니야? 어디서 낯익은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

서릿발처럼 차가운 얼굴, 빈정거리는 말투마저 익숙했다. 느긋하게 팔짱을 낀 상태로 서 있는 그는, 한 손으로 작은 돌멩이를 공중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만 봐도 조금 전 그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 뭐였는지는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너, 너……!”

메세테리우스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픔 따위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충격이 더 컸다. 맙소사, 말도 안 돼. 왜 이곳에 이 녀석이 있는 거지? 이런 건 계획에 전혀 없었던 일인데?!

경악한 심정을 읽은 듯, 눈앞의 그가 빙긋 웃었다. 그러자 싸늘하기만 하던 인상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워지며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몇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숱한 자들을 설레게 하고, 동시에 두렵게 만들던 바로 그 미소였다. 메세테리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핏물을 머금은 것 같은 눈동자, 타오르는 것처럼 화려한 붉은색의 머리칼이 아프도록 그의 눈에 선명히 박혔다.

“오랜만이야, 형님.”

라피스라즐리, 그의 최악의 동생이 바로 그곳에 서 있었다.

* * *

출발 한 달 차의 여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정령왕인 내가 타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위험하다고 알려진 구간에서도 배는 단 한 번의 소동 없이 무사히 순항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선실은 넓고 쾌적했고, 일행들 간의 호흡도 잘 맞는 편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편안한 여정이었다. ……매일같이 뻔질나게 울리는 호출음만 빼면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도망쳤어.』

“도망을 쳐?”

『쯧, 순식간에 사라져서 놓쳤어. 안 본 사이 제법 머리가 컸단 말이지. 감히 내 앞에서 도주를 시도해? 아무래도 날 잡아서 다시 교육을 해 줘야겠어.』

“교육이라니……. 형이라며.”

『그러니까 해 주는 거지. 아무 관계도 없는 놈이면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할 것 같아? 내가 이래 봬도 혈육에 대한 정은 있거든. 꽤 아껴준다고.』

그건 아끼는 게 아니라 괴롭힌다고 하는 거거든?

이죽거리는 라피스를 향해 나는 차마 그렇게 소리치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동그란 구슬 속에선 녀석의 찌푸려진 얼굴이 흐릿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통신석이라고 하던가? 떠나기 전에 필요할 거라면서 라피스가 준 것이었다.

이 세계에는 특이한 성질을 지닌 돌이나 보석이 많은데, 이것 역시 그런 것 중 하나다. 마석으로 분류되는 이 돌은 마력을 주입하면 근처의 사물을 영상으로 투영하는(화질이나 음질이 썩 좋진 않지만)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반으로 나누면 쌍방이 연결되어 각자 비추는 영상을 서로에게 투영해 준다는 사실이다. 다른 통신석과는 연결되지 않고 오직 같은 통신석을 나눈 것끼리만 가능했는데, 그래서 반려석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고 했다.

아무튼, 그런 성질 때문에 이 돌은 보통 한 쌍으로 제작되어 통신 수단으로 쓰인다고 했다. 물론 내 경우엔 마력을 주입하지 못하는 관계로, 라피스 혼자 일방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심지어 호출음이 엄청나게 커서 무시할 수도 없었다. 영악한 녀석은 그 점을 악용해서 매일같이 연락해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줘도 받지 말걸.’

차라리 바다에 던져 버릴까? 하루에도 몇 번씩 달콤한 유혹이 일었지만 그랬다간 당장에라도 쫓아올 게 분명하니 차마 시도하지는 못했다.

그는 보통 쓸데없는 용건으로 연락했지만 가끔은 유용한 정보를 줄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가 그랬다. 클모어까지 바짝 쫓아왔던 대공의 추격대가 얼마 전 일부만 남기고 철수했다는 것이다. 관저에서 벌어진 모종의 사건이 원인이었다는데, 왠지 그 일에 라피스의 형이라고 하는 블랙 드래곤 메세테리우스가 깊이 개입한 것 같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관저 하나를 불태울 정도로 엄청난 소동을 벌였고, 그 일로 지휘관이 수도로 이송돼 심문을 받게 되었단 것이다.

라피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사건이 벌어진 직후 도주 중이던 메세테리우스를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었다. 비록 순식간에 도망쳐서 전부 캐내진 못했지만, 짧은 사이에도 쓸 만한 정보를 몇 가지 얻어 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내용은 대공의 기사 중 대다수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손에 ‘블레스터’라는 정령검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블레스터?”

『과거에 미네르바가 만든 검이야. 그의 힘이 강하게 깃든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돼.』

“많이 위험한 건가?”

『정령왕의 힘이 깃든 건데 당연하지. 정령검도 종류가 많지만 블레스터는 특히 위험해. 적어도 한낱 인간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되는 물건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지. 그래서 아주 오래전에 지하 깊숙한 곳에 묻혔다고 들었어.』

“헤에, 그걸 누가 빼낸 거지?”

『바로 그걸 알아보려는데 잽싸게 도망을 치더라니까? 분명 그놈의 소행일 거야. 옛날부터 고대 유물 모은답시고 멀쩡한 땅을 파고 다녔거든. 내 언젠가 그놈이 큰 사고 칠 줄 알았지.』

“흠, 아무튼 지금은 그걸 추격대가 갖고 있다는 거지?”

『그래, 정확히는 그쪽 지휘관의 손에 있다고 하더군. 이미 각성까지 마친 것 같아.』

‘지휘관이라면 대공의 오른팔이라는 그 남자인가.’

나는 항구에서 흘낏 보았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령사도 아니면서 이상할 정도로 바람의 향기가 진하게 풍기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 검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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