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공작님이 이토록 신임을 보이시니 대공 전하께서는 참으로 든든하시겠습니다. 그런데 오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입니다. 저희들이 개별적으로 대공께 진상하기 위해 모은 것들을 전부 풀어 주셨다지요?”
“우린 추격을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것뿐, 다른 임무를 받은 적이 없다.”
“하핫,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대공께서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한 건 이미 십 년도 더 넘은 일입니다. 아, 하긴 공작님이 그 일을 내키지 않아 하신다는 말을 듣긴 했었죠. 그 때문에 대공 전하와도 여러 번 충돌을 빚었다고 말입니다. 공작님 같은 충신이 설마하니 전하의 뜻을 거역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해서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
카리브디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작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 아십니까? 노련한 사냥꾼은 사냥개에게 토끼를 물어오라 시킨 뒤, 모든 사냥이 끝나면 개도 같이 잡아먹습니다.”
“…….”
“수도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대공께서 사냥개를 요리할 준비를 마쳤다고 말입니다.”
잠시간 침묵이 깔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리브디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조금 전처럼 독설을 뱉어내지도 않았다. 그것을 위축된 것이라 해석한 백작은 한껏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덕분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께선 이번 연쇄 살인과 무기와의 연관성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더군요. 그런데도 일을 이렇게 늦게 처리한 건 분명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전 이번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대공 전하께 상세히 보고드릴 겁니다. 희생된 기사들의 숫자와 그로 인한 손실 금액까지 전부 말입니다.”
“보고라…….”
“과연 대공께서 어떤 조치를 하실지 궁금해지는군요.”
의미심장하게 덧붙인 백작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카리브디스는 그 뒷모습을 잠시간 응시한 뒤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맹세하겠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더러워져도, 제 피가 그것을 덮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언젠가의 대화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미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일은 언제나 바로 어제 있었던 것처럼 선명했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스스로 사냥개의 멍에를 메었다. 뒤집어쓴 굴레들이 이따금씩 그를 숨 막히게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맹세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뭐, 뭐야, 넌?”
“……?”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카리브디스는 짧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당황한 음성은 세트니오 백작의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금 백작 쪽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문 앞, 한 흑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외모는 물론 차림새까지 전부 하나같이 낯선 자였다. 심지어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두 팔로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그로부터 떨어지고 있는 물들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냐!”
“…….”
“네 이놈! 뭐냐고 묻는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닥쳐.”
“다, 닥……?”
무엄한 단어에 굳어 버린 백작을 제치고, 사내는 상자를 든 채 뚜벅뚜벅 카리브디스 앞으로 다가왔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들고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사내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곤 들고 있던 상자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쿠웅! 묵직한 소음이 울리며 떨어진 반동으로 닫혀 있던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덕분에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사들은 모두 눈을 부릅떴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화려한 장식이 달린 무기들이었다. 그것이 며칠 전 그들이 수거해서 바다에 내다 버린 마법 무구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이건!”
“뭐, 뭐야! 이걸 네놈이 어디서 구한 거지?”
뒤따라온 백작 역시 그것을 알아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듯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발끈해서 쳐다본 백작은 문득 사내가 상당한 미형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칙칙한 흑발, 조금 신경질적인 얼굴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화려한 생김새를 지닌 미남이었다.
사내는 말없이 주위를 훑었다. 그의 눈동자는 머리칼만큼이나 새카만 색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동공은 선명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흔치않은 빛깔이니 거부감이 드는 것이 정상인데도 오히려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백작만이 아니라 기사들 역시 넋을 잃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굳게 다물어져 있던 사내의 입이 열렸다.
“어떤 놈이냐?”
“뭐, 뭐?”
“누가 이거 바다에 내버리라고 했냐고.”
눈동자에 홀렸던 탓일까. 잠시간 백작과 기사들은 그가 하대를 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굳혔을 때, 낮은 음성이 대답했다.
“나다.”
대답한 사람은 카리브디스였다.
그는 사내가 등장했을 때부터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상태였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겨진 찰나,
촤아아악! 채앵!
거센 바람과 함께 날카로운 소음이 울렸다. 직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백작과 기사들은 경악했다. 어느새 사내와 카리브디스가 검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 공 각하!”
그들 중 누구도 검을 뽑아드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당황한 기사들은 서둘러 다가서려 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카리브디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나서지 마라.”
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눈앞의 사내에게 고정된 채였다. 사내 역시 그들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오직 카리브디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들은 주춤거리며 멈춰 선 채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한눈에도 심상치 않은 상황인 것은 확실한데, 돌아가는 정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귀족가문의 출신으로 평생 정론만 공부해온 그들은 한낮에(심지어 이렇게 대놓고) 공작을 시해하려는 암살자가 나타날 것이라곤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사내의 말이 그들을 다시 경악하게 했다.
“초대장은 잘 받았다, 빌어먹을 자식아. 감히 내 무기들을 바다에 수장했다 이거지?”
내 무기들.
그 표현 하나만으로 사내의 정체는 명백했다. 보이지 않는 적, 그동안 대공의 기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연쇄 살인범이었던 것이다.
“정말 찾아왔군.”
“그래, 정말 찾아왔다. 씨발, 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 내가 이걸 되찾으려고 무슨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흑발의 사내―메세테리우스는 이를 갈았다. 채 마르지 않은 물기는 그가 조금 전까지 어디에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퍼랭이 놈. 감히 내 물건을 갖고 나랑 흥정을 했다 이거지.’
처음 무기들이 한곳에 모이는 것을 감지했을 때만 해도 그는 여유로웠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하나씩 찾아다니며 죽이는 것에 싫증이 나려던 참이었기 때문에 상대가 이쪽의 의도를 눈치챈 사실이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 자,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는 들리지도 않을 누군가에게 질문하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하지만,
……설마 그대로 바다에 내다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 그래도 거기까진 괜찮았다. 인간은 나약한 종족이니 겁을 집어 먹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차피 마법 무구는 녹이 슬지 않는 것이고, 바다에서 건져 내기만 하면 된다. 이 정도쯤은 마지막 발악이려니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존재가 그의 여유로운 작업(?)을 방해했다. 하필이면 상자가 떨어진 곳이 바닷속에 사는 수룡, 블루 드래곤의 영역 안이었던 것이다.
같은 드래곤끼리 그게 뭐가 문제인가 싶겠지만, 그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블루 일족은 그에게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의 동생인 라피스라즐리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그의 괴짜 동생은 물의 정령왕과 계약하지 못한 앙갚음으로 다른 드래곤들에게도 엘퀴네스와 계약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실제로 누군가 소환을 시도하면 귀신같이 찾아가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의 행동은 명백히 부당했지만 중재를 맡은 드래곤 로드는 일족의 존속이 걸리거나 헤츨링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어지간한 한 나서지 않았다. 성룡 간의 분쟁은 힘의 논리에 따라 알아서 해결하라는 주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래곤 일족의 불행은 성룡 중에선 라피스를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조금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성룡은 라피스를 낳은 부모로, 이들은 도리어 자식의 편을 들었기에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다. 유일한 희망인 고룡들은 대부분 수면기에 들어가 언제 깨어날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말해, 당분간은 라피스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새 물의 정령왕이 태어난 것을 알면서도 아직 대면조차 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것에 가장 큰 불만을 품은 것은 수(水) 속성을 지닌 화이트와 블루 일족이었다. 특히 바닷속에 터전을 마련하고 사는 블루 일족은 일상생활에서 엘퀴네스의 도움을 곧잘 필요로 했다. 특히 최근엔 오랜 가뭄으로 망가진 레어를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터전을 다시 닦는 과정에서부터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 물론 하위 정령들에게 부탁하면 되긴 하나,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일부러 어렵게 돌아가야 하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피스에게 항의하기엔 담력이 부족한 관계로, 그들의 불만은 고스란히 그의 형인 메세테리우스에게 쏟아졌다.
사실 형제라고 해도 일반적인 드래곤 세계의 관념에서 보면 그들은 이미 성룡인 데다 어차피 일족이 달라 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드래곤들이 그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평소에 라피스라즐리의 태도를 두둔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로서는 매우 억울한 오해였다. 그 역시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의 주장은 다른 드래곤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 진짜! 그거 내 거라니까! 내 기운이 스며 있는 걸 보면 알잖아! 돌려달라고!”
“흥, 싫어. 일단 바다에 들어왔으면 블루 드래곤인 내 거지.”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있지. 억울해도 할 수 없어. 애초에 자기 물건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네 탓이잖아?”
“아, 진짜 이렇게 나오기냐!”
“그러게 평소 행동을 잘했어야지. 누가 그 재수 없는 라피스 편들래? 그놈의 행동에 동조한 이상, 결국 너도 똑같은 놈이란 소리야.”
“그건 나도 협박당한 거라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진짜야! 걔가 남들 앞에서 사이좋은 형제처럼 굴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단 말이야! 그 녀석 성격 몰라? 내가 거역할 수 있을 것 같냐고!”
“하나도 안 들려.”
“으아, 진짜 미치겠네!”
그 뒤의 기억은 끔찍하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목 높여 간청하고, 울며 애원한 끝에야 간신히 돌려받았다. 덕분에 지난 며칠간 바닷속에 묶여 있었던 그는 지금 몸도 마음도 전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아오, 진짜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그게 다 네놈 때문이라고!”
그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카리브디스는 자신을 똑바로 가리키는 손가락을 무심히 응시하며 대꾸했다.
“내 알 바 아니지.”
“하! 너 지금 말 다 했냐? 그러고 보니 무기들 중에서 하나는 수장하지 않고 남겨놨던데, 그건 무슨 뜻이지? 혹시 날 네 쪽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냐?”
“짐작한 그대로다.”
“흥, 자신만만하시군. 소드 마스터라고 실력을 너무 과신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나쯤은 간단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적이면 벤다, 단지 그뿐.”
“……오냐, 그래. 이 씹어 먹어도 성에 안 찰 놈아. 넌 오늘 세상 다 산 줄 알아라.”
메세테리우스는 시커먼 눈빛으로 카리브디스를 노려보았다. 그 눈동자에 담긴 건 섬뜩한 살의였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리브디스는 문득 자신의 몸이 굳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무심코 쥐고 있던 손바닥 안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대는 인간이 아니로군.”
그 말에 메세테리우스는 눈을 잠깐 깜빡였다가 피식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다니 유감인데, 그래도 넌 오늘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