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22화 (122/608)

제122화

‘그래, 마법. 친위대 중에는 마법사가 없을 텐데…….’

황제의 친위대는 전통적으로 기사들로만 구성된다. 그럼에도 카리브디스가 당시에 그 소견을 신경 쓰지 않았던 건 그들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정령사 페리스의 비호가 그랬다. 그는 친위대 소속은 아니지만,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그들을 돕고 있었다. 거의 다 잡을 뻔한 상황에서 그 때문에 놓친 횟수만 수두룩하다고 들었다. 황제의 행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고 있는 만큼 그사이 새로운 협력자가 나타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이 다른 유추를 떠올리게 했다.

그날, 기사단이 겨룬 상대가 정말로 황제의 친위대였을까? 전멸한 사단 역시 그때의 전리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친위대가 아닌 전혀 다른 적을 만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본격적인 연쇄 살인이 시작된 것이 그즈음이었으니 얼추 시점도 맞아떨어졌다.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카리브디스는 낮게 혀를 찼다.

연쇄 살인으로 죽은 자들에게선 모두 공격 마법의 흔적이 발견됐다. 공격 마법이라고 해도 대개 계열과 학파에 따라 속성이 정해지는 법인데, 그런 것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주문이 사용됐다. 범인은 마법에 매우 능통한 자거나 적어도 두 명 이상으로 구성된 인원일 터였다. 사단 하나를 전멸시킬 정도라면 예상보다 규모가 큰 적일지도 몰랐다.

“내가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됐지?”

“무기 회수 말씀이십니까? 말씀하신 대로 그때 오크들에게서 습득했던 전리품들 중 남아 있는 것들은 전부 수거했습니다.”

“개수는?”

“검과 창 종류로 총 열다섯 자루입니다.”

“상자에 담아 열쇠를 채운 뒤 바다에 던져라.”

“전부…… 말입니까?”

“그래, 전부.”

카리브디스의 말에 기사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무기가 아무리 아까워도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스르릉―

기사가 나가고 난 뒤 카리브디스는 그의 허리춤에서 대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당시의 수많은 전리품들 중에서 그가 유일하게 취한 것이었다.

대검은 아무런 무늬도 새겨져 있지 않은 일견 평범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다른 화려한 마법 무구를 마다하고 그것을 선택한 이유는 검에 서려 있는 묘한 느낌 때문이었다. 시린 겨울의 한기와 비슷한 서늘한 기운. 그것은 모든 것을 감싸 안듯이 잔잔하면서, 동시에 휘몰아치는 거친 바람 같기도 했다.

이 검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서려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카리브디스는 냉정한 눈으로 검신을 훑었다. 이제 그는 그때의 전리품을 소유한 사람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한 명일지 집단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가정대로라면 범인은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베일에 가려진 적의 정체도 분명히 드러날 터였다.

* * *

카리브디스의 예상대로 무기가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연쇄 살인이 멈췄다. 한동안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면서, 처음엔 불안에 떨던 기사들도 점차 안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카리브디스만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적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그는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마치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이었다.

“클모어 공작은 아직 그대로인가?”

“예, 여전히 저택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가신들의 동태는 어떻지?”

“그쪽도 계속 살피고 있지만 딱히 눈에 띌 만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카리브디스는 수하들과 함께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황제가 수도를 벗어난 지 어느덧 세 달가량. 지금쯤이면 충분히 클모어에 당도할 시각이었다. 그러나 클모어 공작은 여전히 아무 움직임이 없었고, 대공의 병사들이 영지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도 방관했다. 아침저녁마다 정기적으로 하는 기본 훈련 외의 군사 훈련은 전무(全無), 가신들의 소집 회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물자가 대량으로 이동하는 흔적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보기에도 전쟁을 준비하는 도시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직 공작과 접선하지 못한 건가, 그게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동한 건가.’

황제의 흔적은 두 달 전 수도 외곽에 있는 산에서 발견된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끊겼다. 단지 정황상의 추측으로 클모어로 향할 것이라 짐작했을 뿐, 실제로 황제가 이곳에 온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다. 이미 세간에 소문이 파다히 퍼져 있는 만큼 겁을 먹고 아예 숨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알고 있는 이사나 황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위인이었지만, 카리브디스는 왠지 그것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설령 오지에 숨었다 해도 사람인 이상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흔적은 반드시 남는다. 노련한 기사들로 무장된 황제의 친위대들조차 이미 몇 번이나 발각되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아무 힘없는 어린 소년이 이렇게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는 것이 가능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황제에겐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영지 안에 숨어들었다는 소년들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지?”

“아, 그게……송구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본 자들이 없어서 수사에 별다른 진척을 내지 못했습니다.”

“두 명이었다고 했었지. 그리고 다른 곳에서 누군가 습격을 했다고 했던가?”

“예, 워낙 귀신같은 솜씨라 기절하는 순간까지 공격당하는 걸 몰랐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최소 세 명이란 소리군.”

황제일까.

카리브디스는 이젠 거의 습관적으로 하게 된 생각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공작가의 근황을 알아보고 다니는 자들이 있다고도 한 것 같은데.”

“아, 네. 맞습니다. 신관을 포함하여 총 네 명으로 구성된 일행이었습니다. 신관은 카이테인이라는 이름으로, 형벌의 신 엘뤼엔의 사제입니다.”

“엘뤼엔의 사제라…….”

“수행 중이었다가 최근 정기 보고를 위해 클모어에 들른 것 같습니다. 검문 때부터 주시했는데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고, 교단으로 갈 때까지 혼자였습니다. 다른 세 명과는 교단에서 만난 사이로 보이며, 사절단으로서 함께 공작가를 방문했으나 거절당해 그냥 돌아섰다 합니다. 그 반발심으로 공작가의 근황을 묻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나머지 셋의 인상착의는 전부 파악했나?”

“예, 모두 귀족으로 보이는 화려한 외형이었다고 합니다. 신관과 합류하기 전에 그들끼리 여관에 묵은 적이 있는데 그때 시중을 든 종업원의 말에 의하면 젊은 부부와 남동생으로 구성된 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인상착의 중에 저희가 찾는 것과 일치하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렇군.”

남몰래 숨어든 일행도 셋, 그리고 신관과 합류한 일행도 셋. 심지어 신관은 황제를 돕는다고 알려진 형벌의 신의 사제다. 이모든 것들이 단순히 우연에 불과한 걸까?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때 그의 시야에 문득 한 광경이 들어왔다. 구석진 장소에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앞을 대공 쪽의 병사로 보이는 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저건 뭐지?”

카리브디스의 질문에 지금까지 술술 대답하던 기사가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그 눈빛에서 낭패감을 읽은 카리브디스의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말해라.”

“아, 저어, 그것이…… 대공 전하께 진상할 것들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진상품? 그것을 왜 저런 곳에 보관하지?”

“아, 저어, 그것이…….”

이번에도 기사는 대답을 망설였다. 카리브디스는 바로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당황한 기사들이 만류하듯이 뒤따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문 앞에 이르자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고, 공작 각하!”

“문을 열어라.”

“예? 아, 하, 하지만…….”

“난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열어라.”

서슬 퍼런 눈빛에 굳은 병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얼굴에도 대답을 망설이던 기사처럼 낭패감이 드러나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카리브디스는 그들의 곤혹을 무시했고, 병사들은 곧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물러서며 문을 열었다. 끼이익, 낡은 판자로 엮여진 이음새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쏟아지는 빛이 어두운 창고 안을 비추자 점차 내부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

창고 안에 있는 건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갇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모두 안색이 창백했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구석에 웅크려 있던 작은 머리통들이 겁먹은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것을 카리브디스는 잠시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그러자 안절부절못하던 병사들이 서둘러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고, 공작 각하,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풀어 줘라.”

“예, 예?”

“앞으로 한 번만 더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면 이 자리에서 널 베겠다.”

“…….”

겁을 먹은 병사들은 서둘러 안에 있던 아이들을 끌어냈다. 대다수 연고지가 있는 아이들이라 돌려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풀려난 아이들은 연거푸 카리브디스에게 고마움을 표한 다음 멀찍이 달려 나갔다.

그 이후로 임시 관저에 돌아오기까지 카리브디스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뒤를 따르던 기사들은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으로 눈치를 보았다.

“저어, 공작 각하…….”

“이만 나가 봐라.”

드디어 떨어진 명령에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이 침울한 모습으로 몸을 돌리던 때였다.

콰앙!

그 순간 거칠게 울리는 문소리에 카리브디스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감각을 지닌 그는 청각 역시 몹시 예민했다. 그는 힐끗 시선을 돌려 무례하게 방문한 손님을 응시했다.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사람은 세트니오 백작이었다.

“공작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일전의 임무 실패에 관한 조사 차원으로 한동안 이곳을 떠나 있던 상태였다. 오랜만의 대면인데도 형식적인 안부 인사조차 없이 다짜고짜 고함을 지르는 태도에 카리브디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질문을 할 땐 주어를 분명히 밝히는 게 순서 아닌가, 백작?”

“모른 척하지 마십시오!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제 기사들에게서 무기를 수거하셨다 들었습니다! 아무리 지휘관이라 해도 이건 명백한 월권이지 않습니까!”

“수거한 이유에 대해선 듣지 못한 건가?”

“들었습니다! 기사들이 살해당한 이유가 그 무기 때문인 것 같다는 의심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것들을 전부 거두어 바다에 던져 버리셨다고요!”

“정확히 들었군. 그런 사정이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그런 짓을! 제정신이십니까, 공작님? 그것들은 전부 마법 무구였습니다! 고대 유물 중에서도 가장 상등품으로 치는 고위 마법이 걸린 무구였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기사들이 죽는 걸 그냥 지켜보라는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잘 찾아보면 무기도 보존하고 살해자를 검거할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하다못해 무기에 걸린 추적 마법의 흔적을 찾아보기라도 해야 했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역추적을 해서 살해자를 찾아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역추적은 상급 마법사가 시도해도 성공 가능성이 낮을뿐더러,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들었다. 그사이에 또 다른 기사가 희생될 수도 있었지. 그깟 무기가 수하의 목숨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그깟 무기가 아니니 이러는 거 아닙니까!”

발작하는 것처럼 되받아치는 외침에 카리브디스는 잠시간 말없이 세트니오 백작을 응시했다. 그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로군.”

“……예?”

“난 백작이 수하들을 잃은 걸 안타깝게 여기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 당연히 안타깝습니다! 제 재산과도 같은 자들을 잃었는데 슬프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군. 백작은 수하들을 재산의 일부로 생각하는군. 그래서 마법 무구와 비교하여 값을 계산해 보니, 그쪽의 손실이 더 아까웠던 건가?”

“무, 무례하십니다!”

“무례한 건 그대다.”

단호한 음성에 백작은 벙긋하던 입을 다물었다. 카리브디스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싸늘해져 있었다.

“난 백작이 억지 트집을 잡으러 온 거라 여겼다. 하지만 차라리 그게 더 나았을 뻔했군. 그래, 예를 들면 피해자의 숫자가 스무 명이 넘은 시점에서야 일을 수습한 게 수상하다고 말이야. 내가 직속 지휘관이었다면 그 점이 더 분했을 것 같았거든.”

“무, 무슨! 설마 일부러 연쇄 살인을 방치하고 있었단 겁니까!”

“……백작은 일의 경중을 가릴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머리도 나쁘군.”

한심한 시선을 보내는 건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표정에서 불리한 분위기를 감지한 백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모욕감에 몸을 떨면서도 카리브디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공작님이야말로 자신의 처지를 너무 낙관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비관할 이유라도 있나?”

“딱히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대공께서 요즘 공작님을 대하는 태도가 소원해지셨다는 인상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이 이곳에 오신 지 벌써 두 달이 넘으셨지요. 예전 같았으면 진작 수도로 다시 불러들이시고도 남았을 텐데, 여전히 그대로 두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공께선 백작처럼 일의 경중을 가릴 줄 모르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어진 대답에 백작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이쪽의 의도를 읽었으면서도 끝까지 여유만만하게 구는 상대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