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아크아돈에 비해 정령계의 계절은 늘 한결같다. 정원에 깔린 드넓은 꽃밭은 매일같이 영롱한 꽃잎을 피워 냈고, 날씨는 언제나 맑았으며, 온종일 선선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일정한 주기를 타고 감돌았다. 때때로 정령왕들의 감정이 격양되면 폭설이 내리거나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했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화려한 것으로 따지자면 신계에 있는 수많은 궁처들을 빼놓을 수 없으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꼽으라고 말하면 신들은 단연 정령계를 꼽았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한자리에서 융화되지 않는 자연의 4대 속성, 그것이 모두 균등하게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들은 이곳을 살아 있는 지상낙원이라고 칭했다.
―미네르바 님! 미네르바 님!
종알종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미네르바는 감고 있던 눈을 나른히 떴다. 그의 흐릿한 시야에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앳된 청년의 모습이 맺혔다. 활기가 넘치는 사내다운 얼굴,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마구 흩날리고 있는 구불거리는 머리칼은 투명한 회색빛을 띠었다. 미네르바, 그의 머리칼과 꼭 같은 색이었다.
“진이구나.”
희미하게 웃어 보이자 진의 얼굴이 더욱 밝은 색으로 물들었다. 미네르바는 구름 속에 맡겼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탓인지 온몸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본래라면 이맘때쯤의 그는 전신에 힘이 넘치고 생기가 가득해야 했다. 바람의 정령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겨울의 시기가 아크아돈에 도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근래에 들어선 활기가 돌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나른해지기만 했다.
몸의 패턴이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미네르바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분부하셨던 일을 마치고 왔어요.
가볍게 몸단장을 하는 그의 옆에서 진이 발랄하게 고했다. 잠시간 멈칫한 미네르바는 그의 긴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히 빨리 찾았구나.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니?”
―한 인간 남자와 함께 있었어요. 아직 동행한 기간은 길지 않아 보였지만요.
“결국 다시 세상에 나오고 만 거구나. 인간 남자가 그의 봉인을 푼 거니?”
―아뇨, 동행인은 아직 그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어요.
“……그래, 그렇구나.”
담담히 중얼거리는 얼굴엔 아무런 감정의 표현도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침잠했다.
―아참! 그런데 그의 근처에서 물의 정령왕을 뵈었어요.
“……엘을?”
―네, 계약자와 함께 계시던데요? 그의 동행자와 잠시 스쳤는데 계속 쳐다보시더라고요. 아마 동행자에게서 그의 기운을 느끼신 것 같아요.
“느꼈는데 정체는 깨닫지 못했단 말이지? 후후, 그런 점은 확실히 엘답네.”
―제가 다시 가서 알려 드리고 올까요?
“아니, 그대로 두렴.”
미네르바는 곧바로 답했다. 마주친 정령왕이 엘이라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만약 다른 정령왕이었다면 한눈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의 증거를 눈앞에 두고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리라. 특히 트로웰이라면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가엾은 그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건 안 되지. 그건 모두에게 비극인 결말인걸.”
혼잣말로 중얼거린 미네르바는 옆쪽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진이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미네르바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진. 당분간은 그의 동향을 살펴봐 주겠니?”
―계속 주시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의 일상에 뭔가 변화가 일거든 내게 다시 와서 알려 주렴.”
―네,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활기찬 대답과 함께 진은 큰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미네르바는 빠르게 멀어져 가는 상급 정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와 똑같은, 하지만 지금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누군가를 알고 있었다. 진들을 볼 때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의 존재를 같이 상기하게 된다.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던 그의 작은 친우의 모습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왕이시여. 제가 왕을 위해 그를 돕겠습니다.
한때 고귀한 위치에 있던 친우는 어둡고 깊은 파국의 길로 떨어져 내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손에 의해서. 그래서일까. 완전히 잊은 듯싶어도 언제나 그의 존재는 불현듯이 머릿속을 다시 덮쳐 오고 만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의 기억과 함께.
“……사랑한다고 말했었지.”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의 품이 선명하다. 기분 좋게 울리던 낮은 웃음소리, 그에게서 느껴지던 성마른 바람의 체취도. 그때마다 망각의 힘이 강하게 스미지 않는 정령의 육체를 얼마나 원망해왔던가.
“그 입으로, 그 눈으로, 그 품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했었지. 그렇게 야속한 인간이었지…….”
이미 퇴색한 지 오래된 감정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미네르바는 그를 사랑했다. 아끼고 아끼는 마음이 넘쳐서 그를 비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좋았을 만큼.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을 만큼.
블레스터?
고작 인간 따위에게 네 능력을 나눠 주겠다고? 너 미쳤어, 미네르바?
당시 그가 내린 결정에 가장 격정적으로 반응을 했던 건 지금은 소멸하고 없는 전대의 이프리트였다. 엘이 태어나기 전까지,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라는 평을 듣던 그는 워낙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평소에도 다양한 방면에서 자주 충돌을 빚곤 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화를 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무덤덤하던 트로웰의 눈물을 보게 된 것도.
그는 널 사랑하지 않아.
떨림을 억누른 음성이 나직하게 경고를 전해 온다. 동요를 감춘 그의 얼굴은 일그러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무심을 가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가여운 미네르바. 지금의 너를 내가 무슨 말로 설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둬. 너는, 분명히 다치게 될 거야.
물기에 젖은 황금색 눈동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자신은 어떤 반응을 했던가. 아마도 듣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주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주위를 제대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잔인한 짓을 했다. 그들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경고를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멈췄다면, 그럼 지금의 나는 조금은 덜 후회하고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미네르바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의 아픔은 흔적이었다. 자신이 한때 한 인간을 너무도 사랑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흔적.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희석된 과거에 불과했지만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한순간의 어리석음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내몰게 될 줄 알았다면 미네르바는 결코 사랑이란 감정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이제 와서는 전부 부질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뭐, 이런 걸로 심란해하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회상을 걷어 내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점점 나른해지는 몸과 희미해지는 바람의 기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모를 미네르바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부터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으니까.
“괜찮아. 아주 잠시일 뿐이야.”
미네르바는 타이르듯이 자신을 향해 말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기다려왔던 때가 다가오자 마음이 더 조급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눈을 감았다. 휘이이― 바람을 담은 몸에서 메마른 소리가 일었다.
“이제 곧 전부 끝낼 수 있어.”
텅 빈 목소리가 허공 속에 천천히 흩어졌다.
* * *
첫눈이 내린 이후로 클모어엔 흔치 않은 기상 이변이 일어났다. 아직 본격적으로 추위가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주마다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매섭게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면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건물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것은 병사들도 마찬가지라 초소를 제외한 곳의 모든 업무가 수시로 멈추는 일이 속출했다. 성문 밖에서 입성만을 기다리고 있는 행렬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눈 때문에 정작 곤란한 쪽은 따로 있었다. 황제를 뒤쫓고 있는 추격대들이었다. 날씨가 궂으면 흔적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그렇지 않아도 난항을 겪고 있는 수사가 더더욱 진통을 앓는 이유였다.
복도에 난 창문을 통해 굵어지는 눈발을 본 추격대 소속의 기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섭게 쌓이는 속도를 보니 이번에도 황제의 꼬리를 잡기는 틀린 것 같았다.
어리고 나약하다는 황제는 정말이지 운만큼은 지독하게 좋은 자였다. 겨울이 되기 전에는 비가 계속 오는 탓에 번번이 흔적을 놓치게 하더니 이번엔 눈이다. 대체 이 제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비와 눈이 자주 내리는 땅이 되었단 말인가? 마치 날씨가 황제의 도주를 돕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투덜거리던 기사는 이윽고 어느 문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일순 느긋하던 그의 표정이 변하고 눈빛이 또렷해졌다. 기사는 자신의 상태를 꼼꼼히 점검한 뒤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한적한 응접실 안, 불씨가 빨갛게 타들어 가는 벽난로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사자의 갈기처럼 풍성한 금색의 머리칼, 햇볕에 그을린 적동색 피부, 짙은 눈썹 사이로 서늘하게 드리운 보라색 눈동자가 남자의 인상을 한층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파이런 드 카리브디스. 대륙에 다섯 명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의 일원이자 대공의 친위군단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었다.
언제 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모습에 기사는 잘게 몸을 떨었다. 검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카리브디스 공작은 살아 있는 전설이자 영웅이었다. 대공의 기사들 중에선 그를 따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지원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지금 공작 앞에 서 있는 기사 역시 그러한 존재 중 하나였다.
“공 각하, 보고 드립니다.”
기사의 말에 카리브디스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까닥거렸다. 기사는 굳은 얼굴로 그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보고서를 내밀었다. 매일 하는 일과지만 그는 늘 이 순간이 긴장됐다. 하급 기사의 신분으론 총사령관과 조우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아마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더불어 그가 부관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평생 말을 섞어 볼 날도 없었을 것이다.
대공 유카르테의 오른팔. 그 칭호가 말해 주는 그대로, 카리브디스 공작은 대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수하였다. 황제에 대한 수사가 너무 지지부진하다는 이유로, 대공이 그에게 추격대의 지휘를 맡긴 지도 어느새 두 달여가 흘렀다. 이번 처사에 대해 일각에선 너무 과한 결정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고작 다 잡은 물고기(예상외로 고전하고 있긴 하지만)를 잡는 데 쓰이기엔 공작의 지위와 능력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추격대에 파견이 되는 첫날엔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뒷말이 나돌기도 했다. 대공이 그를 버리기로 작심한 것이라는 둥, 역시 평민 출신이라 무시당하고 있다는 둥, 대부분 공작 본인에게 전해지면 어쩌나 노심초사한 이야기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문이야 어쨌건 보고하러 온 기사의 입장에선 멀리서만 동경했던 존재를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어 그저 감격스럽기만 했다.
카리브디스는 그런 기사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묵묵히 보고서를 읽었다. 빼곡히 적힌 글씨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잠시 찌푸려졌다가 이내 차게 가라앉았다.
“……그래, 결국 또 죽었단 말이군.”
와작, 그의 손 안에서 구겨진 종이가 불에 닿은 것처럼 스러졌다. 순수한 육체의 기운만으로 태운 것이다. 언제 봐도 경이로운 광경에 기사의 눈동자가 감동으로 일렁거렸지만, 분위기를 생각해 내색하진 않았다.
“그리고 누구의 소행인지는 여전히 밝혀내지 못했다는 말이지?”
“면목 없습니다.”
카리브디스는 미간을 가만히 찌푸렸다. 최근 한 달간 그들은 기묘한 사건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기사들이 차례로 변사체가 된 채 발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스무 번째 이어진 연쇄 살인이었다. 범행이 일어난 장소와 수단은 각기 달랐으나 살해당한 자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대공파에 소속된 기사들이라는 것, 그리고 얼마 전 오크 무리에게서 습득한 마법 무구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사건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 그는 대공에게 원한이 있거나 겁을 상실한 도적들의 소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희생자의 숫자가 점차 늘어가기 시작하자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기사들 중에서 마법 무구를 지닌 자만 죽었다. 처음부터 누군가 무기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살해당한 자들이 소지하고 있던 금품들 중에서 오직 무기만이 사라져 있었다.
‘세트니오 백작의 속이 많이 쓰리겠군.’
그때의 무기들을 나눠가진 건 모두 세트니오 백작 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그는 최근에 수행했던 임무의 실패와 더불어 이번 연쇄 살인 사건으로 대부분의 수하들을 잃었다. 개인적으로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지휘관의 입장에선 동정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일의 실패도 좀 석연치 않았지.’
사단 하나가 완전히 전멸했다고 했던가. 카리브디스는 얼마 전에 읽었던 관련 보고서를 떠올렸다. 그가 황제의 흔적을 찾는 동안 세트니오 백작은 황실 친위대 쪽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작은 여유로웠고, 당당하게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얼마 후 당도한 건 승전보가 아닌 그의 사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결과에 백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수적으로나 병력으로나 누가 보기에도 그들 쪽이 압도적인 상황이었으니까.
심지어 죽은 자들은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접전을 벌였을 것이라 예상된 장소엔 시커멓게 타다 남은 흔적만 남아 있었을 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고서 말미엔 그곳에서 강한 마법의 발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조사단의 소견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