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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120화 (120/608)

제120화

“그러고 보니 올 초에 마릴다가 씨앗을 잔뜩 맺었지 뭡니까? 그중 실한 것으로 골라 조금 심었더니 벌써 제법 자랐어요.”

“버, 번식을 했다는 겁니까?”

“맞아요. 모두 마릴다를 닮아 귀여운 아이들이죠. 후후, 제 정원이 천상목으로 가득 찰 날이 머지않았네요.”

그딴 거 가득 채우지 마!

이번에도 부족한 용기가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희게 질린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루카르엠은 마냥 천진한 표정이었다.

“아, 그렇지. 말이 나온 김에 데르온도 한 그루 키워 보겠습니까? 관심이 있다면 분재를 좀 나눠드릴 수 있는데요.”

“아뇨, 괜찮습니다!”

데르온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괴물을 집에 들였다간 그날로 데르온의 저택은 파국을 맞을 터였다.

“에이, 사양할 것 없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사실 저는 식물을 키우는 것엔 그다지 재주가 없어서요. 툭하면 말려 죽이기 일쑤입니다.”

“흐응, 그렇다면 안 되겠네요. 우리 귀여운 마릴다의 아이들을 시들게 할 순 없으니까요.”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루카르엠이 매우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그는 다시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장담하건대, 그가 마음을 먹으면 저 식물만으로 마계 정복을 이뤄내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그가 왕의 자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 마계의 불행인지 다행인지, 데르온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엔 무슨 일입니까?”

“예?”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거북해하는 데르온이 설마 지나는 길에 그냥 들렀을 리는 없고. 제게 용건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아…….”

역시 피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가. 마치 벌거벗겨지기라도 한 듯 치부를 들킨 기분에 데르온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루카르엠이 빙긋 웃었다.

“그렇게 어려워할 것 없다고 누누이 말했는데도. 데르온은 제가 여전히 편하지 않은가 보네요.”

“……죄송합니다.”

“후후, 사과할 것까진 없습니다. 데르온은 그런 점이 매력이니까요.”

웃고 있는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비치지 않는 것에 데르온은 내심 안도했다. 만약 누군가 이 광경을 본다면 같은 직위를 지닌 마족을 대하는 태도치고, 그가 지나치게 저자세라는 점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나이가 많건 감춰진 본 실력이 어쨌건 간에, 마계에서는 오로지 보이는 서열만이 중시된다. 직위가 같으면 동년배 취급을 해도 상관이 없으며 하대를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싫으면 그보다 더 높은 직위를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루카르엠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상당히 특이한 편에 속했다.

데르온 역시 자신이 그를 대하는 자세가 유난히 조심스럽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겉으로 보기에 루카르엠은 매우 다정한 인상이었다. 심지어 의도적으로(데르온은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 의도가 있다고 확신했다) 허술하게 굴며 친절하게 대해주기까지 했다. 그쯤이면 충분히 방심할 법한데도 데르온은 단 한 번도 그 앞에서 긴장을 늦춘 적이 없었다. 의식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이 알아서 경직되고 마는 것이다.

마왕에겐 어쩔 수 없이 굴복을 할 뿐, 두려운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선량하게 웃고 있는 루카르엠만큼은 매우 두려웠다.

마신이 그의 전부이자 삶 그 자체라면, 루카르엠의 존재는 거대한 산이었다. 너무 높은 탓에 감히 넘어설 의지조차 갖지 못하게 만드는 까마득한 산맥의 정상 같았다.

어쩌면 지금의 마왕에게 그다지 충성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그가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가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있는 단 한 마족, 루카르엠이 있기 때문에.

“실은…… 마왕 전하께서 루카를 찾으십니다.”

“호오, 마왕께서 저를요?”

생각지 못한 화제였는지 루카르엠은 노골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왕이 마지막으로 루카르엠을 찾았던 것이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었다.

왕보다 더 강한 마족. 아무리 옥좌에 뜻이 없고 스스로 자처해서 공작위에 머물고 있다고는 해도, 그는 언제든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마왕의 입장에선 매우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선지 역대의 마왕들은 모두 루카르엠을 본성으로 부르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뜻밖의 일이군요. 설마하니 마왕께서 제 정원의 꽃들에 관심을 가지실 리는 없고…… 무엇 때문에 찾으시던가요?”

“……제가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원인일 겁니다.”

“마왕이 내리신 임무에 실패를 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런, 천하의 마도 공작 데르온이 실패를 할 때가 다 있다니, 이거 정말 놀라운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군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데르온은 무심코 주먹을 움켜쥐었다. 루카르엠은 다른 부분에선 한없이 느긋했지만 본성의 일만큼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처리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마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굴다가 일이 틀어진 것이 밝혀지면, 그의 성격상 결코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천상목의 먹이로 던져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긴장으로 굳어진 혀가 아렸다. 목울대를 움직였지만 이미 바짝 마른 입안은 버석하기만 했다.

“얼마 전에 마왕께서 한 인간 소년을 주시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방을 쫓고 있던 중 뜻밖의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뜻밖의 존재?”

“물의 정령왕이었습니다.”

반짝!

그 순간 무료하게 듣고 있던 루카의 눈동자에 새파란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건에 흥미가 돋은 것이다. 데르온은 절로 긴장되는 어깨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 소년이 그의 계약자더군요. 정령왕이 인간인 것처럼 꾸며 그와 함께 다니고 있었습니다.”

“재밌네요. 물의 정령왕이 인간에게 소환된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닌가요?”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만이 아닙니다. 비슷한 시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존재가 합류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다?”

“얼핏 느껴지는 기운은 드래곤에 가까운데 그런 것치곤 너무 강했습니다. 오래전 드래곤 로드를 본 적이 있는데 그의 힘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그의 정체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드래곤 로드보다 강한 존재라…… 그런데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 임무 실패와 무슨 상관이죠? 마왕께서 소년의 목숨을 거두어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지켜만 보라 하셨다지 않았습니까?”

루카르엠의 질문에 데르온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소년을 찾는 즉시 은밀히 보고하라는 것이 본래 왕께서 내린 명이셨습니다. 그런데 만일을 위해 동태를 더 지켜보기로 했다가…….”

“장렬하게 정체를 들켰다는 말이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루카르엠은 결코 화내지 않는다. 다만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고문을 가하고 숨통을 끊을 뿐이다. 어떤 참혹한 대가가 이어질까 싶어 데르온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나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루카르엠은 오히려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 가지고 상심할 필요는 없어요. 데르온은 충분히 최선을 다했을 테니까. 단지 이번엔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것뿐이잖습니까?”

“예? 그럼 처벌하시지 않는 겁니까?”

“이런, 이런. 아랫것들 사이에서 제 소문이 상당히 나쁘게 돌고 있나 보군요. 같은 공작끼리 처벌을 하다니요. 그런 권한은 제게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마왕께서 묵인하고 넘어가신 일을 제가 무엇하러요?”

“루, 루카.”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데르온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빙긋 웃은 루카르엠이 그의 어깨를 다정히 다독였다.

“고된 임무로 피곤했을 텐데 데르온은 이만 저택에 돌아가 쉬도록 하세요. 전 마왕 전하께 가봐야겠군요. 그분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요.”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루카? 다른 것도 아니고 정령왕이 관계된 일입니다. 마왕께서 이런 일에 루카를 찾으시는 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무슨 억지를 부리실지…….”

“그렇다 해도 그건 그분을 섬기는 이들의 숙명이겠지요. 데르온이 염려할 일은 아닙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데르온은 걸어가는 루카르엠의 뒷모습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왕이 그를 불쾌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전 마계에 퍼져 있을 만큼 유명했다. 애초에 4대 공작이면서도 하릴없이 정원에서 식물을 돌보게 된 것도, 눈에 띄는 곳에서 조용히 지내라는 근신에 가까운 마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켜보는 심정마저 이렇게 조마조마하건만, 정작 당사자인 루카르엠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이 흥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자였다.

* * *

“공작 루카르엠 다크빌, 왕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마왕 카류드리안은 자신의 눈앞에 부복한 사내를 서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제대로 정돈하지 않은 듯 엉성하게 묶은 부스스한 머리칼, 성글성글 웃음 짓는 나른한 눈동자. 보이는 부분마다 허술한 것투성인데도 좀처럼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 늘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 중 하나였다.

“오랜만이로군, 암흑기사 루카르엠. 내가 그대를 마지막으로 찾은 것이 10년 전이었던가?”

“정확히 36년 만입니다, 전하.”

빙긋 웃으며 답한 말에 카류드리안의 얼굴이 잠시 찌푸려졌다.

“벌써 그렇게 됐나? 내가 그동안 그대에게 너무 무심했군.”

“황공하신 말씀이옵니다.”

“뭐, 그런 건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내가 왜 그대를 찾았는지는 알고 있나?”

“데르온 공작이 간단히 알려 주었습니다. 전하의 계획을 방해하는 정령왕이 있다 들었습니다만.”

“그런데도 용케 내빼지 않았군.”

“말씀하시는 뜻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 한낱 공작 신분으로 제가 왕의 부르심을 감히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트집을 잡을 수 없이 유창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듣는 카류드리안의 입가엔 비소가 서렸다.

“번지르르하게 혀를 놀리는 건 여전하군, 루카르엠. 누가 보면 그대가 나를 상당히 위하는 줄 알겠어.”

“마계의 일원인 제가 마왕 전하를 위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날 무시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존재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마신의 대리인?”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루카르엠은 침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류드리안의 시선에 잠시간 경멸의 빛이 스쳤다.

마신의 대리인. 마신을 대신하여 마왕에게 그의 뜻을 전달하는 자.

전 마계의 마족들, 심지어 다른 공작들에게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루카르엠의 또 다른 직분이었다. 그의 힘이 마왕보다 강하며, 수명이 끝없이 긴 이유이기도 했다.

역대의 마왕들은 모두 그의 조언에 따라 마계를 꾸려나갔다. 카류드리안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루카르엠과 온종일 시간을 보낸 때도 있었다. 이제는 까마득할 정도로 먼, 옛 시절의 일이긴 했지만.

마왕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꽁무니를 빼지 않고 얌전히 찾아온 것은 칭찬해 주지. 사실 오지 않았으면 곤란했을 뻔했어. 마음 놓고 일을 맡길 만한 마족이 그대밖에 없거든. 데르온과 세르피스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그렇다고 자크를 보내자니 그는 매우 바빠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번식기가 있었죠. 자크 공작은 알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으니 지금이 한창 바쁠 시기로군요.”

“역시 그대는 이해가 빠르군.”

마음이 담기지 않은 칭찬에 루카르엠 역시 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형식적인 문답은 끝났으니 이제 본론에 들어갈 차례였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질문을 마친 순간 그의 무릎 앞에 툭하고 무언가가 내던져졌다. 말갛게 웃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이건…….”

“이사나 란느 스왈트. 정령왕의 비호를 받는 소년의 이름이다.”

“아아, 이 소년이 바로 물의 정령왕과 계약했다는 인간이군요.”

“그를 죽여라.”

틈도 없이 이어진 명에 루카르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짐작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상황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령왕은 한낱 마족의 힘으로 겨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마왕 그 자신이 직접 나선다 해도 마찬가지다. 한 세계를 관장한다는 점에서는 같을지 모르나 마왕의 힘이 마신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면, 그들은 독자적인 힘을 지닌 신에 준(準)하는 존재였다.

만약 일개 평범한 마족이 이런 명령을 받았다면 가서 죽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신의 대리인’인 루카르엠은 다르다. 적어도 그라면 정령왕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고 소년만 죽이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루카르엠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가 신경 쓰는 건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마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루카르엠을 마계 밖으로 내보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신경 썼기 때문이다. 그의 저택이 마계 번화가의 한복판에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평소의 마왕이라면 차라리 일을 실패할지언정 루카르엠을 패로 쓸 리가 없었다. 만약 그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마왕이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본인이 직접 나서거나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 처리할 터였다. 숨통이 끊어지는 걸 제 눈으로 보아야 안심할 테니까.

그런데 그저 마계를 나가라?

루카르엠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왜 그러지? 자신이 없나?”

“아닙니다. 전하께서 믿고 맡겨주시는 일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열심히 해야 할 거다. 그대가 나를 돕는 것이 결국은 마신의 뜻을 이루는 길일 테니 말이야.”

“그 말씀은…….”

“왜, 내 말에 문제라도 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부하실 것은 그것뿐입니까?”

“그래.”

오만하게 답하며 카류드리안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마신의 뜻.

마왕을 세운 것이 마신이니 일반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다만 마왕 카류드리안이 그런 상투적인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마신의 뜻이 있던가.

광기에 젖은 붉은 눈동자는 진실을 노련하게 감추게 된 지 오래였다. 곧은 눈으로 카류드리안을 응시하길 잠시간, 루카르엠은 부복한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마왕의 명을 받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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