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18화 (118/608)

제118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출항을 앞둔 배를 기다리는 동안 전후 사정을 전부 알게 된 이사나와 카이테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라피스가 모두의 앞에서 남겠다고 선언했을 때, 두 사람은 굉장히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다 보니 이제 곧 세상이 멸망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쩐지 이상했어. 라피스 님이 스스로 남겠다고 하실 분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말도 마. 그거 설득하느라 정말 얼마나 진땀 뺐는데.”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라피스 님께는 죄송스럽지만, 누님을 생각하면 너무 안심이 되거든.”

“응, 아마 대부분은 이프리트가 운영하는 상단에서 지내겠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라피스가 지켜준다고 약속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물론 이후에도 상황이 아주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라피스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에이프릴이 그를 마냥 못미더워한 탓이었다.

그러나 라피스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의 모습을 변화시켜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뚱뚱한 중년 여자의 모습으로. 그녀에게는 불쾌한 경험이겠지만 적어도 마신관들이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몸으로 직접 라피스의 마법을 체험한 이후 에이프릴은 온순한 양처럼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함께할 1년 동안 그를 스승 삼아 마법을 배울 작정인 듯했다. 라피스가 순순히 가르쳐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마워, 엘. 여러 가지로 신경 써줘서.”

내가 에이프릴의 거취 문제를 고민했다는 사실에 이사나는 큰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은 인사에 나는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그때 어딘가를 바라본 이사나의 표정이 새파랗게 굳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누군가 막 항구에 이른 듯 사람들 사이를 뚫고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망토를 걸친 자들이었다. 그들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언젠가도 저들과 비슷한 차림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추격대.’

이미 각지에서 병사들이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들이 본업에 겸해 수색을 하는 것뿐이라면, 지금 저들은 전문적으로 이사나의 뒤를 쫓고 있는―오로지 추격을 위해 편성된 기사들이었다. 이사나와 계약한 이후 산 아래에서 만났던 것 이래로 두 번째 마주침이다. 바로 그들이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카리브디스 공작님.”

마중을 나온 병사들이 가장 선두에 선 남자를 향해 크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가 추격대의 대장인 모양이었다.

“흔적은 찾았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알겠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있는 이사나의 손을 말없이 잡아주었다. 그제야 떨림이 진정되었는지 한층 긴장을 푸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들이 탄 말이 바로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갔다.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앞을 응시하며 말을 모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무료한 듯 지루한 표정을 한 그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짙은 바람의 냄새였다.

‘바람의 정령사인가? 아니, 그건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정령의 기운이 이렇게나 강한데 그의 이마엔 바람의 인장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정령사라면 으레 근처에 자연체의 정령들이 따라다니기 마련인데, 그런 기미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멀찍이 떨어져 군중 속에 파묻혔다. 그때까지 이사나는 집요하게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괜찮다는 표시를 하자 그는 겨우 고개를 들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저자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결국 카리브디스 공작까지 동원됐구나.”

“그게 누군데?”

“숙부의 오른팔이야. 최연소 소드 마스터로 숙부가 가장 총애하는 기사라고 들었어.”

“흐음, 그렇구나. 혹시 저 공작이 정령사라는 말은 없어?”

“정령사? 아니,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역시 그렇지?”

“왜?”

“으음, 아냐, 아무것도.”

나는 이제 거의 희미해진 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어진 탓인지 더 이상 어디에서도 정령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에 오히려 안심이 됐다. 정말 정령사였다면 아무리 먼 거리라도 정령의 흔적이 흐트러질 리가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잠깐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의 모습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됐다. 교류가 활발했던 트로웰이나 간간이 얼굴을 비추곤 하던 이프리트에 비해 그는 좀처럼 바람의 영역을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

내가 심심함에 몸부림 치고 있을 무렵에도 미네르바는 정령계 안, 그의 영역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이후에도 딱히 유희를 나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에 관해 이프리트에게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미네르바는 원래 그래.”

“원래?”

“예전부터 그랬어. 유희에는 별로 관심 없고, 타인과 교류하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냥 자기 영역에서만 지내는 걸 제일 편하게 여겨.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게 뭐가 그리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타고난 성격이 그런가 보더라구.”

그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워낙 익숙한 탓에 딱히 의문을 품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혹시 정령도 은둔형 외톨이가 있나?’

* * *

쏴아아―

살을 에도록 차가운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휘몰아쳤다. 하늘에서 활개치는 수많은 정령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바람의 상급 정령 ‘진’이었다. 그가 경쾌한 발걸음을 내디딜수록 사나운 바람이 더욱 기세를 타고 시린 공기를 품었다. 그때마다 태양을 품은 불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멀찍이 물러선다. 바야흐로 완연한 겨울이 도래한 것이다.

검은 머리의 소년은 한동안 깔깔거리는 바람의 춤사위를 무심히 구경했다. 쏟아지는 바람도, 얼어붙을 것 같은 공기도, 소년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거센 바람에 모래가 이지러져도 사막은 그 자리에 존재하듯이. 곁을 스치는 바람조차 소년에겐 그의 일부인 것처럼만 보였다.

“바람이 부네.”

소년이 어깨를 덮고 있던 모포를 걷어내고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음률을 타듯 소년의 말에 화답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아, 그러네. 바람이 불지.”

“그것도 더럽게 차가운 바람이 말이지.”

“이 바람이 백 번 정도 불고 나면 우린 다 동사한 시체로 발견되지 않을까?”

“그거 제법 실현 가능성이 높은 생각인걸?”

“그렇지?”

“이익!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헤롤!”

무료하게 이어지던 대화는 한 사람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종결을 맞이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거구의 청년, 샴페인 용병단의 헤롤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항변을 시도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어쨌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네가 여행 경비가 담긴 주머니를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우리가 이런 추위에 노숙을 해야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진 않았을 거 아니야!”

“와 나, 진짜 너무하네. 내가 잃어버리고 싶어서 잃어버렸냐? 말안장에 달린 주머니가 낡아서 떨어진 거잖아! 내가 설마 그게 떨어질 줄 알았겠냐고!”

“어쭈! 지금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코끝까지 후드를 눌러쓴 마이티가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헤롤을 노려보았다. 수도까지 가는 모든 경비가 담긴 주머니였다. 클모어까지 호위하고 받은 의뢰비는 물론, 착수금까지 전부 다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처음에 마이티는 돈을 배분해서 각자 맡을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도 나만 믿으라며 억지로 전부 가져간 사람이 헤롤이었다. 불안했지만 하도 자신만만하기에 맡겼더니 끝내 이런 사달을 만든 것이다.

피 같은 내 돈. 허무하게 사라진 착수금만 생각하면 가만히 있어도 속에서 불덩이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그만둬. 이제 와서 누구 한 사람을 탓해 봤자지.”

“하지만 휴센!”

“혈기가 왕성한 걸 보니 아직 살 만한 모양이지? 버틸 수 있을 때 체력을 아껴두는 게 좋을걸? 다툴 힘 있으면 땔감이라도 하나 더 모아오든가.”

“쳇!”

야속했지만 휴센의 말은 옳았다. 지금은 싸우면서 기를 소비하기보단 체력을 아끼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마이티와 헤롤은 서로에게 눈을 부라리며 장작불을 지필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준비를 마치려면 서둘러야 했다.

클모어를 등지고 떠난 지 일주일. 호화롭게 여관에서 숙박하며 느긋하게 수도로 향하려던 계획은 첫날부터 무참히 틀어졌다. 지금 그들은 여관은커녕, 매 끼니조차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러 있었다.

일행 중 건장한 사내들만 넷, 게다가 트로웰을 제외하면 모두 식욕까지 왕성한 사람들이었다. 한동안은 마른 빵과 수프로만 연명하며 견뎠지만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제기랄! 오늘도 빵조각이 전부야?”

“고기! 고기를 먹고 싶어!”

“더 이상은 못 참아! 이러다 굶어 죽겠다고!”

갈수록 고기를 부르짖는 기세가 어찌나 심상치 않은지, 내버려두었다간 인육이라도 먹겠다고 서로 달려들 기세였다. 보다 못한 트로웰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다들 시끄러워요.”

화가 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온기 없이 서늘한 말투였다. 하지만 일행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그와 함께해왔던 샴페인 용병단원들에겐 오히려 트로웰의 이런 모습이 더 익숙했다.

매사에 무심하고 표정이 없는 얼굴, 차갑고 냉정한 어조의 목소리. 그게 그들이 알고 있는 본래 ‘매튜’의 모습이었다. 동료라고는 해도 늘 거리를 두고 있었고, 대화는 ‘용건만 간단히’가 신조인지라 사적인 농담은 엄두도 낸 적이 없었다. 용병 생활을 하며 어울린 지난 몇 년보다 이번 3개월 동안 나눈 대화가 더 많을 정도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엘을 만나지 않았다면 웃는 방식조차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들은 매튜의 그런 말투나 행동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란 사실도 잘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엘과 있는 동안 어울리지 않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적응하기 힘든 면도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온 본모습이 차라리 반가울 정도였다.

“그치만 매튜, 너무 배고프단 말이야.”

“맞아. 넌 애초에 소식을 하니까 대식가들의 굶주림에 대한 공포를 잘 이해 못 하나 본데. 이거 진짜 엄청 괴롭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위가 조이다 못해 타들어가는 것 같다고. 이러다 몬스터가 나타나도 맞서 싸우기는커녕 검을 들 힘조차 없을 것 같아.”

“……알겠어요. 내일 아침엔 제가 고기를 구해볼게요. 그럼 되겠죠.”

“뭐? 정말이야? 근처에 먹을 만한 게 있어?”

“이 부근은 배틀 피그의 군락에 가까워요. 몬스터로 분류된 거긴 하지만 일단은 돼지의 일종이니까 독소만 제거하면 먹을 수는 있을 거예요.”

“크흡! 역시 너밖에 없다!”

그들이 매튜를 무조건적으로 추앙하는 데는 그가 강해서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도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박식했다. 대륙의 어느 곳이든 훤히 꿰뚫고 있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몬스터의 서식지나 군락에 관한 정보도 많이 알았다. 용병에게는 대부분 목숨줄과 같은 정보들이었다. 그 이유를 트로웰은 아이일 때부터 방랑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나도 같이 갈까?”

“배틀 피그는 기척에 예민해요. 차라리 저 혼자 가는 게 나아요.”

그 말에 마이티는 깔끔히 포기했다. 매튜가 혼자 가는 게 낫다고 할 때는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틀린 판단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을 아는 일행들은 무조건적으로 그의 말을 신뢰했다.

“정말 고맙다, 매튜. 넌 우리의 희망이야.”

“뭘요.”

“아무튼 헤롤 녀석만 아니었어도 어린 너를 고생시키지 않는 건데…….”

“아, 진짜! 이제 그만 좀 하면 안 되겠냐? 내가 잘못했다니까?”

“그게 반성하는 놈의 태도냐?”

“야! 마이티! 그만해! 헤롤이 반성하고 있다잖아!”

그때 이릴이 냉큼 연인인 헤롤을 감싸고돌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헤롤이 거구의 덩치로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릴, 자기! 흐흑!”

“어휴, 우리 자기 이리 와. 누가 우리 자기를 괴롭혔어? 말만 해. 내가 다 혼내줄게.”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두 사람의 애정은 옅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견고해져 있었다. 야단스럽게 달라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일행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감싸줄 게 따로 있지, 이릴 언니. 지금 헤롤 편 들어줄 때야?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휴센 얼굴이 반쪽이 된 거 안 보여?”

“어머, 얘 좀 봐.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런 걸로 계속 무안을 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니니? 그리고 반쪽이 된 게 어디 휴센 얼굴뿐이야? 우리 헤롤도 안됐기는 마찬가지라고.”

“헤롤은 자업자득이지만 휴센은 피해를 입은 입장이잖아. 그게 어디가 똑같아? 게다가 휴센은 헤롤이랑 달리 몸이 말라서 잘 챙겨먹어야 한단 말이야.”

“헤롤도 충분히 반성했거든? 그리고 헤롤이야말로 덩치가 크기 때문에 유지하기 위해서 많이 먹어야 한다고. 온갖 구박에 눈칫밥 먹는 게 불쌍하지도 않니?”

“크아악! 이것들이 지금 애인 없는 사람 놀리나! 당장 그만두지 못해?”

마지막을 장식한 건 처절한 마이티의 절규였다. 그렇지 않아도 춥고 배고픈데 옆구리가 시리다는 비극적인 사실까지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의 불행한 발악이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매정했다.

“넌 저리 빠져, 마이티. 난 우리 헤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힘써야겠거든. 그리고 툭하면 소리치는 버릇 좀 고치지그래? 우리 헤롤을 봐.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얼마나 의젓하니? 넌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그래, 그건 이릴 언니의 말이 맞아. 네가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안 생기는 거야. 휴센을 좀 본받아. 어른스럽잖아.”

“이것들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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