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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117화 (117/608)

제117화

“허나 알폰프 제국은 그저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에요. 게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실지도 모른다고요.”

“이 길을 나서기로 결심했을 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각오했습니다.”

“하지만!”

“이봐, 누님. 그렇게 계속 만류할 입장만은 아니지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쪽의 오라비를 구하려고 하는 거잖아.”

이번에도 끼어든 사람은 라피스였다. 에이프릴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응시하자 그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게 어디 그쪽 형님만을 위한 길인 줄 알아? 세력을 모을 수 있는 귀족들 중에선 이 녀석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그쪽 형님밖에 없다며. 그럼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다 같이 죽자는 소리밖에 더 돼?”

“그, 그건…….”

“그리고 누님이 잘 모르는 모양인데, 마신관의 저주는 걸린 자의 정신을 갉아먹어. 지금은 잘 버티고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붕괴될걸. 최악의 경우,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백치가 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다. 그녀에게 공작은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었다. 지금 이사나를 걱정하는 만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오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마음이 클 터였다. 움켜쥔 그녀의 주먹에서 뼈마디가 새하얗게 일었다. 말없이 굳어 있는 에이프릴을 안타깝게 바라본 이사나가 그녀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전 괜찮을 겁니다, 누님.”

“폐하…….”

“절 믿어주세요. 반드시 마검을 가져와 형님을 낫게 할 겁니다.”

그 말에 에이프릴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나는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이대로 계속 공방이 멈추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잘 정리가 된 것 같았다.

가장 큰 공헌자인 라피스가 어떠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향해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의기양양해할 거란 예상과 다르게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또 불만이야.”

“응?”

“넌 나한테 불만 있을 때만 꼭 이상한 행동을 하잖아. 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좋은 말로 했구만. 근데 전에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이번엔 대체 무슨 뜻이냐?”

“…….”

나는 언젠가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너무 화가 나서 그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던 그때의 일을 말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가 욕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거지?

“푸훕!”

당장이라도 폭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아 나는 얼른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고, 배야! 누가 나 좀 살려줘!

“뭐야? 왜 웃어?”

“큽, 크크큭! 아, 아무것도 아니야. 푸흐흐흡!”

자꾸만 웃는 내가 이상했는지 라피스는 뭘 잘못 먹었냐는 듯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또 웃겨서 나는 다시 한바탕 웃을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웃어본 날인 것 같았다.

* * *

일정이 정해졌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남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에이프릴의 거취 문제였다. 그녀는 쫓기는 처지였고, 모습을 감추는 마법만으로는 숨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프리트에게 부탁을 해봤지만 그는 듣자마자 난색을 표했다.

“너 미쳤니? 지금 우리 상단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해? 내 손길이 닿는 부분은 거래처까지 뒤지고 있는 판국인데 들키지 않을 것 같아?”

“으음, 그치만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는걸.”

“그냥 같이 가면 되잖아.”

“어떻게 그래? 지금 우리 일행들은 전부 남자란 말이야. 서로 엄청 불편할걸?”

“바보 같긴. 여자 쪽에선 그게 더 좋은 거야. 그 여자만 모르고 있을 뿐이지 지금 일행들이 어디 보통 사람들이야? 그중 한 사람만 물어도 앞으로 인생이 확 펼 텐데.”

“그게 뭐야.”

“얘가 뭘 모르네. 이 제국에서 여인의 능력을 증명하는 방법은 잘난 남편을 얻는 것뿐이야. 남자를 잘 만나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나만 해도 이 상단을 처음 일으켰을 때 작정하고 유혹한 남자가 몇 명인데.”

“……너 그거 엘뤼엔한테 다 이른다.”

“그러기만 해봐.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너랑 나랑 사이좋게 다 같이 죽는 거야.”

“…….”

한순간에 살벌해진 눈빛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엘뤼엔이 간간이 내 일정을 살핀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겠다. 어쩌면 지금 이 대화 내용을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걸 알면 당장 이 자리에서 날 죽이겠다고 난리를 칠 것만 같았다.

“으음, 차라리 신전에 맡길까.”

“그게 무슨 소리야?”

“엘뤼엔의 신전 말이야. 지금 산 주위에 안개가 껴 있어서 외부인은 들어가지 못하거든. 내가 부탁하면 지내게 해줄 것 같은데.”

그래, 그러고 보니 왜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마신관이라도 설마 그곳을 뒤져볼 생각까진 하지 않을 것이다. 엘뤼엔의 신관들도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을 테니 현재로선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도 했다. 제법 좋은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 찰나 이프리트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돼!”

“엥? 왜 안 돼?”

“여자잖아! 너 지금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곳에 여자를 밀어 넣겠다는 거니?”

“언제는 남자들이 있는 곳에 같이 있어야 한다며.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신관들이야. 여인에게 무슨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래도 안 돼! 신전에서 지내다 보면 심심해질 거고, 심심해지다 보면 참배실에서 기도도 할 거 아냐!”

“그게 뭐 어때서?”

“그러니까 안 되지! 그 기도를 엘뤼엔이 듣고 그녀에게 관심이라도 보이면 어떡해!”

“…….”

그런 이유였냐.

황당해져서 바라보자 이프리트는 눈을 부릅떴다.

“뭐야. 이미 한 번 강림한 곳에 엘뤼엔이 두 번 강림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너 참 대단하다.”

“다, 당연하지.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이프리트의 얼굴은 사과처럼 붉어져 있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창피하긴 했나 보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미안,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 역시 신전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

“너어!”

“그럼 어떡해. 달리 안전한 장소가 없는데.”

“……칫, 할 수 없지. 알았어. 내가 맡아서 돌봐줄게. 그럼 되는 거지?”

“어, 정말?”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의아해져서 바라보자 이프리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런 일에 엮여서 안 해도 될 고민을 해야 하나, 짜증이 가득 드러난 얼굴이었다.

“알다시피 난 매우 바빠. 상단 일을 하다 보면 외지에 나가야 하는 일도 수두룩한데 그녀에게 일이 벌어질 때마다 즉각 대응을 할 순 없어. 그러니까 만일을 위해서 보호자를 하나 남겨두고 가.”

“보호자?”

“그래, 마침 적당한 녀석도 있잖아? 드래곤처럼 쓸 만한 걸 썩혀서 뭐 할래?”

“윽, 라피스 말이야?”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이프리트는 담뱃대를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에이프릴을 남겨둘 거라면 좀 더 쓸모 있게 활용하는 게 낫지 않아? 차후의 일도 생각해야지.”

“차후의 일?”

“기껏 마검을 가지고 와봤자 그사이에 공작이 죽어 버리면 무슨 소용이겠어? 그녀는 네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패야. 지금 클모어 공작에겐 후계자가 없어. 직계 혈족은 오직 에이프릴 하나뿐이지. 한마디로 그가 죽으면 에이프릴이 차기 공작이 된단 말이야. 그녀가 움직이면 가신들의 힘을 모으는 것도 가능할 거야.”

“헤에, 그렇구나.”

“그래. 하지만 내가 알기로 에이프릴은 딱히 후계자 수업을 받진 않았어. 아무것도 모른 채 곱게 자란 처녀가 그런 일을 단번에 해낼 순 없을 거야. 그러니까 미래에 투자하는 셈치고 그 드래곤에게 그녀를 도와달라고 해. 그럼 난 그녀에게 할애하는 시간을 줄여도 되니 좋고, 너흰 보루를 만들어두게 되니 좋고. 얼마나 좋은 결말이야?”

“……으음, 라피스가 과연 도와줄까.”

“그건 네가 어떻게든 설득해야지. 협박을 하든, 애원을 하든.”

……그렇게 해봤자 라피스가 응해줄 것 같진 않은데.

그렇지 않아도 지금의 여행조차 그가 이쪽에 일방적으로 맞춰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부탁까지 하면 펄펄 날뛸 게 틀림없었다.

무거운 기분을 안고 돌아온 나는 라피스를 따로 불러 조심스레 운을 뗐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그대로 그는 얼굴 가득 불쾌감을 드러냈다.

“싫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나더러 인간 여자의 보모 노릇을 하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강하잖아.”

“내가 너만큼 단순한 줄 아냐? 그런 말에 두 번 넘어가 주진 않거든?”

“치이, 치사하게.”

“치사한 건 너지. 날 싫어하는 주제에 필요할 때만 이용하시겠다? 내가 너에게 관대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심보까지 받아줄 정도로 너그럽진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싫어하다니?”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툭하면 욕하는 거 아냐.”

“내가 언제 욕을 했다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반문하자 라피스는 코웃음을 쳤다.

“모른 척해봤자 안 통하거든?”

“아니, 난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래. 내가 언제 너한테 욕을 했어?”

“와, 진짜 뻔뻔하네. 그럼 내가 여기서 너한테 받은 그대로 돌려줘 볼까?”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대체 내가 뭘 어쨌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라피스는 이죽거리며 양팔을 천천히 꺾었다. 나는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긴장하며 지켜보았다. 그 순간 라피스가 내 앞으로 불쑥 주먹을 뻗었다. 설마 때리는 건가 싶어 움찔하던 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의아하며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했다. 눈앞에서 척! 하고 들려 올라가는 장렬한 엄지손가락을 말이다.

“…….”

나는 잠깐의 침묵 후에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피스는 복수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이게 내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겠지. 나는 최후의 최후까지 판단을 보류하려고 노력하며 그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이게 나한테 되받아친다는 그거야?”

“보면 몰라?”

“그러니까…… 이게 내가 너한테 한 욕이라는 거지?”

“그렇다니까.”

더 이상은 한계였다.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억지로 참느라 악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풉! 뭐야, 라피스, 너 지금……푸흡!”

“뭐야, 왜 웃어?”

라피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 딴에는 반성하라고 한 행동에 내가 웃기나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너 지금 내가 좋게좋게 대하니까 만만한가 본데……!”

“아하하, 아냐! 그런 게 아니라…… 그거 욕 아니거든?”

“뭐?”

그는 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무리 명석한 두뇌를 지닌 드래곤이라도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 앞에선 어수룩해지는 모양이다. 놀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이쯤에서 제대로 설명을 해주기로 마음먹고 차분히 설명했다.

“여기선 이런 표현이 없구나. 엄지손가락을 드는 건 보통은 좋은 의미로 쓰는 거야. 상대한테 최고라고 말하거나, 매우 좋다는 의사를 표시할 때.”

“……최고?”

“그렇다니까. 아무렴 내가 왜 그 상황에서 너한테 욕을 하겠어?”

“…….”

이제 보니 이제껏 날 오해하고 속으로 꽁해 있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라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부리나케 이 자리를 뜨거나 화를 내더라도 이해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창피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전혀 민망한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흠, 그러니까 그때 날 칭찬했던 거란 말이지? 내가 최고라고?”

“뭐? 아아, 그렇지.”

“흐음, 그랬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후 그는 다시 나를 묘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그 시선의 의미를 분석하려고 애쓸 때였다.

“좋아, 할게.”

“응?”

“네가 바라는 대로 여기에 남아주겠다고.”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어?”

“그래서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주면 정말 고맙지.”

진심을 담은 인사에 그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것뿐?”

“응?”

“아니, 뭐. 칭찬하는 데엔 뭔가 다른 표현도 있다며.”

“……?”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바라보길 잠시간, 나는 라피스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혹시나 싶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일 때도 설마 이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 라피스의 실체를 잘 몰랐기에 할 수 있던 생각이었다. 내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얼굴에 만개한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네가 생각해도 내가 최고지?”

“…….”

이 순간 나는 확신했다.

라피스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드래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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