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16화 (116/608)

제116화

그것이 벌써 사흘 전의 일이다.

그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혹시나 싶어 부득이 엘에게까지 연락해서 조심하기를 당부했지만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엘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였고, 반대로 마신은 능구렁이를 몇백 마리는 집어삼킨 능수능란한 사기꾼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심장을 빼 가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찾아가 끌고 오고 싶었지만 살인적인 업무량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용의주도한 마신은 단순히 부탁만 해둔 것이 아니라 공개 인수자를 그로 지정해두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그 탓에 지금도 매일같이 마계의 관할 서류들이 그의 집무실로 차곡차곡 배달되고 있는 중이었다.

‘죽여 버릴 테다.’

엘뤼엔은 속으로 이를 갈며 그날의 일을 곱씹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섀넌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엘뤼엔 님께서는 카노스가 정말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아크아돈에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마계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카노스가 과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요?”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마계는 마신 카노스가 스스로 창조하다시피 만든 세계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가 모를 수가 없었다. 엘뤼엔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섀넌은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었다. 그는 쓰게 웃었다.

“그 수많은 세월을 겪고도 전 아직도 카노스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지금은 그렇지만, 정령왕일 때의 그는 지금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죠. 그래요. 마치 엘뤼엔 님, 지금의 당신 같았습니다.”

“……농담이라도 불쾌한 소리군.”

“하하,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입니다. 아마 그래서 그가 당신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솔직히 그가 자신의 업무를 당신에게 넘겼다는 말을 들었을 땐 놀랐습니다. 그래 봬도 그는 꽤 철두철미한 성격이라, 썩혀서 놀릴지언정 남에게 자신의 일을 맡기진 않거든요.”

“칭찬으로 듣지.”

“물론 칭찬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저는 더 당신이 걱정됩니다.”

엘뤼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섀넌을 응시했다. 그 모습조차 언젠가의 카노스와 똑같았다. 섀넌은 다시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카노스는, 마신은 아무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정령왕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것만은 쭉 변하지 않은 사실이죠. 사실 전 오히려 그가 부재중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언급했을 때 카노스가 보일 반응이 두려웠으니까요. 아마 찾아가서 물어볼 용기도 낼 수 없었을 겁니다.”

“…….”

“엘뤼엔 님께서도 아무쪼록 그를 조심하십시오.”

섀넌이 돌아간 뒤에도 엘뤼엔은 한동안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주위에 있는 수행천사들이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의자를 뒤로 젖힌 뒤, 섀넌을 상대하느라 피곤해진 미간을 한 손으로 꾹 문질렀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너.”

* * *

알폰프 제국은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토의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뤄져 있었다. 10년 재앙이 도래하기 전에도 모래밖에 없는 척박한 환경으로 유명해서, 원래부터 여행자가 기피하는 편이었다고 했다.

이곳에 존재하는 사막은 모두 다섯 개의 명칭으로 분류되는데, 바론 사막은 그중에서 가장 기후가 좋은 편이었다. 일교차가 심한 다른 지역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기온이 선선했고, 곳곳에 습지도 있었으며, 대륙에서 제일 큰 오아시스도 존재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론 사막은 제국에서 가장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땅속에 숨어 사람을 잡아먹는 몬스터―지옥땅거미의 서식지가 바로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피 현상이 커지자 제국에서는 몇 번이나 토벌군을 보냈지만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알폰프 제국에 도착하는 데까지 걸리는 기간? 글쎄, 경유 시간까지 합치면 최소한 9개월은 걸리지 않을라나?”

“윽, 그렇게나 오래 걸려요?”

“그것도 빠르게 잡은 거야. 출항은 날씨에 따라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넉넉히 잡으면 1년은 생각해야 할걸?”

배편을 알아보러 간 항구에서 표를 파는 선원이 무심하게 답했다.

기계식 배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선 직항으로 갈 수 있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제국과 제국, 대륙과 대륙처럼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선 여러 번 경유지를 거쳐야 했다. 그때마다 배편을 따로 알아봐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노를 젓는 방식이라 느린 건 기본이고, 운이 나쁘면 한 장소에서 며칠씩 발이 묶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알폰프 제국까지는 최소 여섯 개의 중간 항구를 경유해야 하는데 그래도 그나마 이편이 육로보다는 빠른 것이었다. 육로로 이동을 하면 말을 타고 가도 족히 2~3년은 더 걸린다는 것이다. 일행들은 당연하게 여겼지만, 비행기만 타면 반나절 만에 세계의 반대편에 갈 수 있는 세상에서 살다 온 내게는 그저 별세계의 이야기로만 들렸다.

“……아날로그 세상은 불편한 게 많구나. 산업 혁명은 신의 한 수였어.”

“응? 그건 무슨 암호야, 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이사나에게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에겐 굳이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문명이 발전하는 게 당연한 이치겠지만 왠지 이 세상만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만한 개혁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변하지 않는 게 더 좋기도 했다. 편리함만으로 잃어버리기에는 이곳이기에 얻을 수 있는 가치들이 너무 아까웠으니까.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거리가 너무 먼데. 정말 이렇게 가도 괜찮겠어?”

“할 수 없지. 그 검은 인간만 가져올 수 있다며.”

“그렇긴 한데…….”

“응, 그럼 갈래. 난 형님만 구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단호하게 답한 이사나의 두 눈이 결연히 빛났다.

뱃삯을 치르자 선원은 묵묵히 나무패를 건네주었다. 나와 이사나, 그리고 카이테인. 세 사람의 승선이 허가된 표였다.

“다 된 거야?”

큰 그림자가 불쑥 다가오며 물었다. 뒤편에서 뚱하게 서 있던 라피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라피스, 뒷일을 부탁할게.”

“알았으니까 출발하기나 해.”

“정말 고마워.”

그는 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부두 너머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한동안 지겹게 보게 될 풍경이었다.

처음 지도를 받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상황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굴이 다른 제국에 있다는 것도, 바다를 건너서 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건 그다지 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영체의 정령은 아무리 먼 거리라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으니까(물론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시간은 다소 소요된다). 굳이 모두가 고생할 필요 없이 나 혼자 금방 다녀오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프리트가 알려준 뜻밖의 사실이 나를 좌절에 빠트렸다.

“그 검, 인간밖에 못 들어.”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인간만 들 수 있다니?”

“장소의 봉인이 걸려 있거든. 봉인을 풀려면 검을 깨워야 하는데, 그건 인간만 깨울 수 있어.”

“윽…….”

아무리 마검이라지만 설마 그런 게 걸려 있을 줄이야. 나는 낭패감을 감추지 못하며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왜 하필 인간이야? 강제로 봉인을 풀 수는 없어?”

“힘들걸. 그 검이 스스로 선택한 방식이니까.”

“검이 스스로 선택을 해?”

“한마디로 자아를 갖고 있다는 거지. 그 검이 가진 소명은 약한 인간을 자신의 힘으로 강하게 만들어 세상을 호령하는 거야. 그런데 초월자가 소유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 그래서 인간에게만 자신을 허락하기로 한 것 같아.”

“뭐 그딴 검이…….”

“아무튼 참고하도록 해. 괜히 혼자 가서 헛걸음하지 말라고 특별히 알려준 거니까. 이동의 언령은 본인 외에 다른 사람은 옮기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안이하게 상황을 판단했던 나를 타박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결국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일행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을 이사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줄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저절로 일었다.

“전 반대예요!”

아니나 다를까. 알폰프 제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에이프릴이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렇게 먼 곳까지 가야 한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바론 사막이라니! 안 돼요, 폐하! 그곳은 정말 위험해요! 군대가 가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라고요! 절대로 가시면 안 돼요!”

“하지만 형님을 구할 마검이…….”

“굳이 마검이 아니라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게 무슨 방법인데?”

질문을 한 사람은 라피스였다. 당연히 마땅히 대답할 말이 있을 리가 없는 그녀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본 라피스의 얼굴에 비소가 짙어졌다.

“반대를 하려면 다른 대안을 들고 와야 하는 거 아냐?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면 상황이 알아서 풀려?”

“하, 하지만…… 위험한 건 위험한 거예요. 애초에 왜 이런 사실을 알려주시는 거죠? 이런 건 오히려 알리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고 생각해요. 폐하께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드시다니, 너무 잔인해요.”

“무슨 헛소리야? 이건 너희들의 일이잖아. 자신의 일을 자기가 정하지 않으면 누가 결정을 하는데?”

“왜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죠? 당신들은 폐하를 보필하는 입장이 아닌가요?”

“하? 보필하는 입장이면?”

“수하는 주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래서 스스로 판단할 필요도 없게 만든다? 차라리 그냥 인형놀이를 하지그래? 이 녀석이 무능력하게 자란 게 다 이유가 있었군.”

“마, 말투가 너무 불손하세요.”

“남이사.”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닐까. 사람의 안색이 한자리에서 시시각각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에이프릴의 모습을 안쓰럽게 응시했다. 이사나 역시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표정이었다.

“누님, 그만 하세요. 이분들은 절 도와주시는 것뿐, 제 수하가 아닙니다. 그 이상 무례한 말씀을 삼가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제국의 백성들은 모두 폐하의 수하가 아닌가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여기까지 살아서 오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에이프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그의 단호한 표정 때문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사이 나와 라피스는 지도를 펼쳐 들고 의논을 나눴다.

“검에 봉인이 걸려 있다고?”

“응, 인간만 깨울 수 있대.”

“쯧, 귀찮게 됐군. 그런 건 보통 자아를 가진 검인데.”

“응, 그렇다더라고. 아, 맞다. 혹시 네 마법으로 여기까지 텔레포트는 못 해?”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 모든 상황이 간단히 해결된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라피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특히 에이프릴은 마법이란 단어에 관심을 보인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라피스는 눈으로만 지도를 훑은 뒤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무리.”

“으음, 역시 너무 먼가?”

“아니, 거리 자체는 딱히 큰 문제가 아니야. 다만 내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장소야. 이런 경우엔 지도에만 의지해서 좌표를 계산해야 하는데, 이런 지도는 대개 장소가 정확하게 표시된 게 아니거든. 전혀 엉뚱한 곳에 떨어질 수도 있어.”

“그래도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게 좀 더 빠르지 않을까?”

“오차 범위가 얼마나 생기느냐에 따라 다르지. 거리가 멀수록 오차 범위는 더 커져. 감안해서 계산을 해도 애초에 지도 자체가 허술한 거라 그게 잘 안 되더라고. 운이 나쁘면 바다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어. 오히려 시간을 더 잡아먹게 될 가능성이 크지.”

“음, 결국 거의 도박이라는 소리네. 그럼 여기서 최대한 가까운 장소까지 정확하게 아는 곳은?”

“없어. 난 그쪽은 한 번도 안 가봤거든.”

“……대체 그동안 뭐 하고 산 거야?”

몇천 살이나 먹었으면 보통 세계 이곳저곳을 다 돌아봤어야 정상 아닌가? 황당해져서 바라보자 그는 도도하게 대꾸했다.

“난 원래 돌아다니는 걸 싫어해.”

“……그래, 그러고 보니 넌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지.”

“당연한 거 아냐? 난 특별하니까.”

이제는 이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한 귀로 듣고 흘릴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정작 다른 곳에서 헛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이프릴이었다.

“이제 보니 상당히 허풍이 심하신 분이로군요. 그냥 처음부터 솔직하게 못 한다고 하시면 될 것을.”

“허풍?”

“텔레포트 마법은 대륙의 현자들 중에서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예요. 그런데 당신처럼 젊은 분이 그런 게 가능할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라고요? 심지어 좌표만 보고 거리를 계산해서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 본인이 드래곤이라도 된다고 착각하시는 것 같네요.”

착각이 아니라 그게 사실인데.

아마 그녀는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는 걸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라피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너야말로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네?”

“그런 건 드래곤 중에서도 할 수 있는 녀석이 별로 없거든. 나 정도 되니까 가능한 일이지.”

조금이라도 주춤할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에이프릴 역시 기막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피스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웃고 있던(이 상황이 웃겼던 모양이다) 이사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넌 어쩔 거야? 갈 거야, 말 거야?”

“가겠습니다.”

“폐하!”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이어진 대답에 에이프릴이 다시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사나는 그런 그녀를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검은 소재가 알려진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이제 와서 다른 것을 찾는 건 무리예요. 게다가 지금 저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하잖습니까.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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