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근데 너 아까 그 이상한 말들은 뭐야?”
“응? 무슨 말?”
“해삼이니 말미잘이니, 뜬금없이 해산물들 이름을 읊었잖아. 왜 그런 거냐고.”
“아…….”
여기선 그런 식으로 놀리는 말이 없는 건가? 어쩐지 얌전히 듣고 있더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도 인식하지 못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지금까지 그런 식의 놀림을 받아볼 기회(?)도 없었겠지만.
내 표정이 너무 경직된 것에서 안 좋은 직감을 한 걸까? 이프리트가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혹시 내가 그렇게 생겼다고 말한 건 아니겠지?”
“아하하, 설마요. 그냥 엘뤼엔이…….”
“엘뤼엔이 뭐?”
“아, 아냐. 갑자기 그게 먹고 싶어졌거든. 그래서 그냥 생각난 김에 말해본 거야. 정말이야.”
“그런 게 먹고 싶다고? 너 취향 진짜 이상하다.”
다행히 이프리트는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가는 듯했다. 나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엘뤼엔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그가 말한 사람이 정말 이프리트인 건 맞을까?
이프리트와의 만남이 충격이었던 건 사실이나 굳이 경고까지 받을 일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 생각이 확고해졌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서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다음에 그가 또 말을 걸어오면 그땐 확실히 물어봐야지. 나는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 * *
“풍문으로만 듣던 엘뤼엔 님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엘뤼엔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무감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양 갈래로 땋아 발끝까지 늘어트린 흐린 회색의 머리칼. 갸름한 턱 위로 얼굴을 거의 다 가리다시피 한 두꺼운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이했지만 더 눈에 띄는 건 그의 옷차림이었다. 여밈을 목 끝까지 채운 긴 코트에 허벅지까지 오는 검은색의 부츠, 사이사이에 드러난 팔과 손가락엔 붕대를 감아 피부를 완전히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섣불리 범접할 수 없는 공기가 존재했다. 늪지대에서나 맡을 것 같은 침침한 안개와 습기의 냄새, 그 아래 짙게 깔린 서늘한 죽음의 기운. 틀림없는 명계의 것이었다.
아레히스 역시 같은 기운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엘뤼엔은 그가 궁처를 방문하면서 밝혔던 이름을 상기했다.
명계의 신 섀넌.
그 이름 앞에 붙은 명칭이 말해주는 의미 그대로, 그는 망자의 삶을 관장하는 명계의 최고신이었다.
마신 카노스, 운명의 신 라데카, 명계의 신 섀넌, 천신 이오웬. 상급신은 모두 그 자체로 대우를 받지만 각 계열의 최고신은 의미가 더 특별했다. 그들은 주신이 만든 최초의 정령왕이자 최초의 상급신으로, 이곳 신계의 시작을 연 존재들이었다.
대부분의 신들은 그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생각했지만 엘뤼엔은 그 반대였다. 그가 판단하기에 최고신들은 정상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섀넌의 방문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이렇게 멋진 분이신 줄 알았으면 진작 찾아뵐 걸 그랬습니다. 소문이 하도 흉흉하셔서 어떤 괴물을 만나게 될까 싶었는데, 완전한 기우였군요. 이런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셨으면서 왜 그동안 신들의 연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으신 겁니까? 오셔서 얼굴만 보여줘도 지금 뒤에서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모두 엘뤼엔 님의 추종자로 돌아설 텐데 말입니다.”
“……별로.”
“후후, 과묵하신 분이네요. 왠지 점점 더 마음에 드는데요?”
원치도 않은 칭찬에 엘뤼엔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노골적인 거부감을 읽은 섀넌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명계의 신이 내겐 무슨 볼일이지?”
“한 가지 의논을 드릴 게 있습니다.”
“의논?”
“마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담담히 돌아온 대답에 엘뤼엔의 눈빛이 더 가라앉았다. 여전히 목적을 짐작할 수도 없었거니와,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단어가 언급된 탓이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섀넌의 말에 그는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아크아돈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최근 10년간 아크아돈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유독 많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10년?”
“정확히는 그 전부터였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이 요 근래 10년 사이의 일입니다. 상당히 많은 어린아이가 죽었죠.”
“가뭄 때문이겠지.”
엘뤼엔은 대수롭지 않게 정의를 내렸다.
주신이 만든 첫 번째 중간계 차원 아크아돈. 4대 정령왕들이 관장하는 탄생과 풍요의 세계. 그곳에 오랜 가뭄이 있었다는 건 새삼 화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명한 일이었다.
물의 부재로 인한 지독한 재앙은 비단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그 땅의 수많은 생명들을 앗아갔다. 엘뤼엔은 섀넌이 왜 그런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거론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의 반을 가린 안경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 더욱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는 말인가?”
“관련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분명 많은 아이들이 가뭄 때문에 죽은 건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그럼 그 아이들의 피가 상당수 제사에 쓰인 건 알고 계십니까? 그것도 단 한 사람의 소관이었다면요?”
“……!”
엘뤼엔은 얼굴을 굳히고 노려보다시피 섀넌을 응시했다. 제사 자체는 특별할 게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 한 사람의 소관이라면 문제가 커진다.
섀넌은 수많은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영혼을 관리하는 그는 어지간한 정도로는 ‘많이 죽었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적어도 수천의 목숨은 걸려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수의 생명이 단 한 사람의 주관으로 죽었다는 소리였다.
“사인은 하나같이 심장에 난 깊은 자상, 그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습니다. 회수된 영혼은 모두 기력이 소진된 상태로, 한동안 다음 생을 부여받기 힘듭니다.”
“그 말은…….”
“누군가 그 생명의 무게만큼 힘을 키우고 있다는 뜻이죠.”
비로소 엘뤼엔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피를 통해 타인의 생기를 빼앗아 자신을 강건하게 하는 것은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된 암흑 주술 중의 하나다. 한때는 흔하게 쓰인 방식이었지만 그것을 심하게 악용한 누군가가 주신의 권능에 도전하려고 하면서부터 금기로 정해졌다.
이후 관련 내용들은 전부 신계에 회수되어 봉인되었고, 현재로선 주술의 방법조차 아는 자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방금 전 섀년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영혼의 생기를 빼앗았다는 것은 주술을 정확히 사용했다는 의미가 된다. 즉, 누군가 금기를 어겼다는 소리였다. 물론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닌 만큼 섣불리 판단할 단계는 아니었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태는 충분히 심각했다. 알려지기만 하면 신계 전체가 크게 뒤집어질 일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있는 자의 종족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마왕과 계약한 관계임을 확인했습니다.”
“마왕이라…….”
“은밀히 알아본바, 그가 거두어들인 피가 모두 마계로 유통되었더군요.”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주시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이 일이 마왕 한 사람의 소관인지, 혹은 마족들 전부가 연루되어 있는 일인지 판단해야 했다. 차라리 후자라면 많은 이들이 서로 나눠 마셨다는 이야기가 되니 조금 꺼림칙해도 신경 쓸 것은 없다. 마족이 본래 피에 취하길 즐기는 종족이라는 건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전자다. 한 사람이 피를 독식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금기를 어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모두가 우려하는, 주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행위인 것이다.
잠시간 이마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엘뤼엔은 이내 얼굴을 찌푸리고 섀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이걸 내게 말하는 거지? 마계의 문제라면 마신과 의논하면 되잖아.”
“그렇습니까? 전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요.”
“내가 형벌의 신인 건 알고 하는 말이겠지?”
“물론 당연히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계도 관할하고 계시잖습니까.”
“…….”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듣기로는 마신 카노스가 당신에게 마계의 관리를 위임했다고 하던데요. 지옥의 신 크라제 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아닌가요? 아니라면 당장 가서 따져야겠는데요. 절 헛걸음하게 한 것도 모자라 엘뤼엔 님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게 했으니 말입니다.”
“……아니, 됐어. 맞아.”
“아, 역시 그런가요? 잘못 찾은 게 아니군요. 다행입니다.”
“…….”
크게 안도했다는 듯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는 섀넌을 보며 엘뤼엔은 이를 갈았다. 덕분에 잊고 싶었던 며칠 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신들의 하루는 대개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른 오전 집무실에 가면 수행천사들이 그날 검토해야 할 서류와 보고서들을 가져다둔다. 신이 하는 건 진득하게 자리에 앉아 그것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할당량을 일찍 마치면 나머지 시간은 뜻대로 보내도 무관했지만 대개는 서류가 너무 많은 탓에 밤늦게까지 업무가 이어지는 편이었다. 그렇게 모든 작업을 마치면 침소로 가서 짧은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튿날 또 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것이다. 놀라울 만큼 단조롭긴 해도 단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엘뤼엔은 매우 유능한 데다 성실한 신이었다. 그의 궁처는 다른 곳보다 업무가 많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속도에 차질을 빚거나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다. 제아무리 분량이 많아도 그는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처리했다.
그날도 엘뤼엔의 일상은 평소와 같이 시작되었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느낀 즉시 눈을 떴고, 가볍게 세안을 마친 후 늘 그랬듯이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나 집무실로 들어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뭐지?”
그의 집무실에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는 건 이제 와서는 새삼스럽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여느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서류의 양이 너무 많았다. 채 들어가지 못한 더미들이 집무실 밖까지 빠져나와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것들 대부분이 그가 담당하는 관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의 눈이 서류 더미를 한 번, 그 앞에서 밀랍처럼 굳어 있는 천사들을 한 번 훑었다. 여섯 장의 검은 날개, 이마에 찍힌 선명한 날개의 문양은 어디를 보아도 엘뤼엔의 궁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왜 마신의 천사들이 이곳에 있는 거냐.”
엘뤼엔의 물음에 검은 날개의 천사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과 함께 시립해 있던 엘뤼엔의 수행천사들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긴 마찬가지였다.
“대답해라. 왜 너희들이 이곳에 있지?”
재차 이어진 질문에 마신의 천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윽고 그들 중 한 명이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무언가를 엘뤼엔 앞에 내밀었다. 곱게 접힌 하얀색 편지였다.
의아해하면서 편지를 건네받은 엘뤼엔은 대수롭지 않게 종이를 펼쳤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안녕, 자기?
자기에게 한 가지 불행한 소식을 전할게.
당분간은 내가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을 거야.
내가 휴가를 가게 됐거든.
그러니까 그동안 내 업무 좀 같이 부탁해☆
―너의 그이로부터.
와그작!
처참하게 구겨지는 종이의 소리에 천사들의 어깨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이 미친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주, 중간계로 내려가셨습니다.”
“중간계?”
그는 얼마 전 카노스가 자랑삼아 늘어놓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주신으로부터 열심히 일한 공적을 인정받아 몇 년간 중간계에서 머무를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단 내용이었다.
물론 엘뤼엔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여기고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가 아는 한 카노스는 한 번도 열심히 일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뒤통수를 칠 줄이야.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느 중간계로 갔지?”
“저어, 그것이…….”
“대답해라.”
“아크아돈……으로…….”
더듬거리는 대답은 매우 작았지만 엘뤼엔은 바로 알아들었다. 갑자기 특권을 쓴 것도 수상한데 그것도 하필이면 아크아돈이라니.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찰나, 편지를 건넸던 마신의 천사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마, 마신께서 얼마 전부터 신계에 떠도는 소문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소문?”
“그게 실은…… 엘뤼엔 님께서 양자를 들이셨는데, 그 아들이 아크아돈에 있다는…….”
“그래서, 내 아들을 만나러 갔다?”
그의 눈빛이 살벌해지는 것을 본 마신의 천사들은 그 자리에 차례로 엎드렸다.
“만류해보았지만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제발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좌중이 공포에 질려 떠는 가운데 엘뤼엔은 한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한숨을 내쉬기를 잠시간 그는 자신이 구긴 편지를 무심코 바라보았다. 편지의 마지막 귀퉁이에 적힌, 미처 보지 못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추신. 자기가 몹시 그리울 거야♡
차라리 보지 않느니만 못한 글귀였다. 곧 그의 노성이 궁처 가득 울려 퍼졌다.
“당장 이 미친 자식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