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활짝 개방된 양 문 사이로 붉은 휘장이 둘러진 침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바로 그 아래 엎드리다시피 쿠션에 기대어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아랍풍의 의상과 눈이 아프도록 화려한 장식들이 지독하게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비칠 듯이 새하얀 피부, 훤히 드러난 등 위로 새빨간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화려하게 늘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이 상단의 총수인 이카나인 듯했다.
맙소사.
그녀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한마디였다. 굳어버린 내 모습을 본 여인이 입가에 짙은 웃음을 지었다.
“엘드란은 이만 나가 있어.”
“예? 하지만…….”
“괜찮아. 이분들에게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그래. 용무가 끝나면 내가 부를 테니까 그전까진 아무도 들이지 마.”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답한 엘드란은 이쪽에 불안한 시선을 보내곤(혹시나 우리가 그녀에게 위해가 되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돌려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겠네. 목소리가 들려서 설마 했더니 정말 너였구나? 오랜만이야, 엘. 그동안 잘 지냈어?”
“……!”
다짜고짜 이어진 하대에 카이테인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바로 나였다. 아무리 눈을 비벼보고 고개를 흔들어 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한눈에도 사람을 현혹시킬 것같이 매혹적인 여인. 그녀는 틀림없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였다.
“뭐야, 너!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경악해서 묻는 말에 이카나, 아니, 이프리트는 지루하다는 듯이 가늘게 하품했다. 유연하게 몸을 비트는 동작이 꼭 고양이 같았다.
“뭐긴, 보다시피 유희 중이지. 상황 판단이 느린 건 여전하구나?”
“누가 유희 중인 걸 몰라?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니까 그렇잖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나타난 게 아니라 네가 내 쪽을 찾아온 거거든?”
“그럼 네가 정말 이카나란 말이야?”
“그래. 여인의 몸에 어린 나이, 심지어 이방인, 수많은 악조건 속에서도 오로지 타고난 장사 수완만으로 순식간에 주요 도시의 상권을 거머쥔 불멸의 여인 이카나! 그 사람이 바로 이 몸이시란 말씀!”
자기 자랑을 저렇게 거창하게 늘어놓다니, 이 녀석도 라피스랑 동류인 게 분명하다. 이프리트는 과시하듯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무심코 확인하게 된 것에 나는 기겁했다.
“뭐, 뭐야. 설마 가슴도 만든 거야?”
“당연하지. 이 몸매에 가슴이 없으면 이상하잖아.”
“피부색은! 피부색은 어떻게 한 거야? 너 원래 하얀 피부 아니잖아?”
“빛 반사를 이용해서 하얗게 보이도록 해봤지. 어때? 꽤 잘 어울리지 않아?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뭘?”
“답답하긴. 이 정도면 엘뤼엔이 날 덮칠 것 같냐고.”
“푸학! 뭐?”
“쿨럭! 쿨럭!”
경악과 동시에 뒤쪽에서 기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얌전히 서 있던 카이테인이었다. 얼마나 놀란 건지 언제나 잔잔하던 그의 얼굴은 처음으로 평정이 흐트러져 있었다.
“너 미쳤어?”
“왜 경기를 일으키고 그래. 나도 좋아서 이런 궁리하고 있는 거 아니거든?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어? 그리고 아까부터 엄마한테 너가 뭐니? 듣는 엄마 서운하게.”
“컥, 어, 엄……?”
“크흠!”
이번에도 뒤편에서 충격을 이기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결백(?)하단 말이야! 나는 창백해진 카이테인을 돌아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 진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내 일행이 오해하잖아!”
“오해하면 어때서? 어차피 사실이 될 텐데.”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결혼 방해해버린다?”
“거봐, 일단은 너도 우리가 결혼할 사이라고는 생각하고 있는 거네.”
“큽!”
뻔뻔하게 대꾸하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그때 문득 이 녀석을 만나기 직전 엘뤼엔이 전했던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만난 상대가 생각지 못한 정체를 드러낸다고 했었지. 혹시 그게 이프리트를 말한 거였나? 멍청해 보인다는 표현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왠지 그라면 그렇게 말하고도 남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버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그런 지시를 들었을 때만 해도 정말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 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해, 해삼!”
“뭐?”
“멍게! 말미잘!”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
“에에잇! 바보!”
“죽을래?”
“……잘못했어요.”
그래, 나도 안다. 내가 비굴하다는 것을.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 결과적으로 나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 민망한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면서도 차분하게 서 있는 카이테인이 위대해 보일 지경이었다.
“저어, 엘 님? 대체 그분은…….”
“으음, 죄송해요. 소개를 드리는 것이 너무 늦었네요. 그러니까 이쪽은……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랄까요.”
“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크게 놀랐다. 그쪽으로는 단 한 번도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불의 정령왕과 상단의 총수라는 게 정말 어울리진 않는 조합이긴 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나와 유치한 설전을 벌인 참이었으니까. 굳어진 그를 향해 나는 짧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이런 게 정령왕이라서.”
“뭐야? 이런 거라니?”
“시끄러워. 넌 방금 순수한 동심에 스크래치를 입혔어.”
이프리트는 뭘 잘못 먹었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카이테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정령왕 이프리트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엘 님과 동행하고 있는 카이테인이라고 합니다.”
“뭐? 아아, 그런 인사는 됐어. 여기선 이카나니까 그냥 이카나라고만 불러줘.”
“예, 알겠습니다, 이카나 님.”
아랫사람을 대하듯 무례한 말투에도 그는 아무런 불쾌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카이테인이라고? 그러고 보니 신관이네. 게다가 손목의 문양을 보니 엘뤼엔의 문장인 것 같은데…….”
“맞아, 엘뤼엔의 신관이야.”
괜히 자랑스러운 기분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던 걸까. 별안간 이프리트가 샐쭉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흐응, 역시 그 소문의 주인공은 너였구나.”
“으응? 무슨 소문?”
“형벌의 교단에 나타났다는 교황의 문장 말이야. 그거 너 맞지?”
“…….”
내리꽂듯 쏟아지는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인간의 모습인데도 그녀의 등 너머에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
“너어 치사하게! 날 내버려두고 혼자만 엘뤼엔을 만났다 이거지!”
“엘뤼엔이 부른 거야! 그리고 난 네가 여기 있는지도 몰랐거든?”
“아, 몰라! 아무튼 너 진짜 짜증 나!”
아니,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나는 기가 막혀서 이프리트를 바라봤지만 이미 질투에 눈이 먼 여자는 내 억울한 입장 같은 건 전혀 고려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씩씩거리며 노골적으로 두 눈을 흘기는 것을 나는 반쯤은 체념하는 기분으로 지켜봤다.
“아무튼 정말 능력도 좋아. 유희 못 할 것 같다고 징징거릴 땐 언제고 그사이에 버젓이 인간과 계약까지 하질 않나. 심지어 무려 황제씩이나 된다며?”
“어? 알고 있었어?”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나이아스들이 얼마나 수다스러운데. 이미 정령계에 소문이 쫙 퍼져 있다고. 왕이 유희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하루 종일 우리 왕이 어쨌느니 재잘재잘. 아무튼 왕이나 수하들이나 하나같이 칠푼이에 팔푼이라니까.”
“그래, 그래. 실컷 욕해라. 내가 다 나쁜 놈이다.”
그제야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이프리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더 이상 퍼부을 기미가 없어 보이기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거친 폭풍우 속에 휘말렸다 나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아까 엘드란에게 듣기로는 보석을 거래하러 왔다고 하던데.”
“아, 그거…….”
“밑천을 만들 생각이라면 다른 데를 알아보는 게 좋을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상단은 브리아의 보석은 취급 안 해. 그 이유는 너도 알겠지?”
물론 당연히 알고 있다. 정령계에 가면 넘치도록 가져올 수 있는 것이 그건데 따로 구입할 필요가 있을 리가. 새삼 문지기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상질의 보석을 제공받는 공급처가 따로 있다고 했던가? 그때는 그저 수완이 좋은 총수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정령계였던 모양이다. 문지기가 이 사실을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보석을 거래하러 온 건 사실 핑계야. 원래는 이카나를 만나러 왔어.”
“날?”
“응, 부탁할 게 있었거든.”
“흐응, 그래? 무슨 일인데?”
“마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마검?”
어리둥절해하는 이프리트에게 나는 간략히 지난 일들을 설명했다. 이곳에서 우연히 에이프릴을 만난 것, 그 과정에서 그녀가 처한 입장을 알게 된 것까지. 대부분 이프리트도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상황을 이해시키는 건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그래선지 처음엔 건성으로 듣던 그 역시 제법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흐응, 그 귀족 여자를 네가 보호하고 있었구나? 잘됐네. 안 그래도 잡힐까 봐 노심초사하던 중이었거든. 이제 한시름 덜어도 되겠어.”
“헤에, 많이 걱정했나 봐?”
“당연하지. 그 여자한테 물어다 준 정보값이 얼만 줄이나 알아? 기껏 상단의 사활을 걸고 투자했는데 그게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니?”
그러면 그렇지. 저 마녀에게 일말의 온정이 있다고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물론 이런 생각을 드러내면 파국에 이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령왕이라도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말이다. 젠장, 대체 내 주위에는 왜 다들 이런 녀석들뿐이지? 나도 만만한 사람 좀 만나고 싶어!
“아무튼 더 자세히 말해봐. 그래서 공작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마검이 있는 동굴을 찾아가겠다고?”
“아, 으응, 에이프릴 양의 말로는 네가 그곳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야?”
“뭐, 그 동굴이 내가 알고 있는 그거라면 아마 그렇겠지.”
그녀의 대답에 나는 안도했다. 여기까지 와서 헛걸음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왠지 이프리트의 표정이 묘해 보였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해 신경 쓰진 않았다.
“근데 그 동굴에 있는 거라면…… 아니, 아무것도 아냐.”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아무튼 그 동굴의 위치를 알고 싶다 이거지?”
“응! 알려줄 수 있어?”
“글쎄, 어쩔까나―.”
그럼 그렇지. 웬일로 순순히 대꾸해주나 했다. 대놓고 약 올리는 눈빛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너 정말 이렇게 나오기야?”
“알고 싶어? 그럼 엄마라고 불러보든가.”
“……안녕히 계세요.”
“알았어, 알았어. 알려줄게. 나 참, 고작 그 한마디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나를 이프리트가 혀를 차며 붙잡았다. 그녀의 뒤쪽으로 자리한 침실 벽면은 수많은 서랍장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이프리트는 그중 하나를 열어 가죽 뭉치를 꺼내 내 앞으로 던졌다.
“자, 받아.”
“……이게 뭐야?”
“뭐긴, 동굴로 가는 지도지.”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얼른 가죽을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 얇은 가죽 위로 어지러이 그려진 곡선들이 복잡한 지형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부분에 붉은 잉크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아마도 동굴이 있는 위치를 표시해둔 것 같았다.
“바론 사막? 이곳에 동굴이 있는 거야?”
“그래, 맞아.”
“그런데 이 지도…… 스왈트 제국 전도가 아닌 것 같은데?”
“알폰프 제국이야. 여기서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할 거야.”
“헤에, 그렇구나. 생각보다 먼 곳에 있었네. 근데 이거 정말 내가 가져도 돼?”
“의심도 많긴.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 어디다 쓰려고 그러니?”
그게 다 너 때문이잖아!
기가 막혀서 바라보는 내게 이프리트는 도리어 눈을 부라렸다. 어차피 항의해 봤자 통할 리도 없었기에 나는 얌전히 지도를 챙기는 쪽을 택했다.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그가 선심 쓰듯이 말했다.
“뭐, 사실 공작이 정신을 차린다면 내게도 나쁜 일은 아니야. 안 그래도 요즘 마신관들 때문에 너무 골치가 아픈 참이었거든.”
“응? 왜? 아! 혹시 에이프릴 양을 도와준 것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는 나 역시 신경 쓰고 있던 일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에이프릴이 가장 근심하고 걱정하던 부분이었으니까.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이프리트가 골치 아프다고 말할 정도면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가 더 큰 것이 분명했다. 이프리트는 얼굴 가득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정말 지긋지긋한 녀석들이야. 들어오면서 상단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어?”
“으음, 조금. 짐들이 너무 어수선하게 널려 있던데.”
“그거 다 마신관들 짓이야.”
“엑? 마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 뒤, 이프리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눈앞에 마신관이 있다면 그대로 불태워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짐들 속에 사람을 숨겨둔 게 아닌지 알아보겠다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헤집어놓고 가고 있어. 덕분에 오늘 자로 맞춰야 할 물량까지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지. 솔직히 말하면 완전 민폐야. 영업 방해 수준을 넘어섰다고.”
“윽, 그거 안됐네.”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든 해결해. 공작을 정신 차리게 하든, 마신관들을 다 없애버리든.”
“엥? 내가?”
“뭘 그렇게 놀라? 어차피 하려던 일 아니었어?”
“그거야 그렇지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도 의무가 되면 엄연히 얘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망설이는 속내를 눈치챘는지 이프리트가 눈을 번뜩였다.
“내가 지도를 그냥 준 줄 알아?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트레저 헌터들 사이에선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귀한 물건이라고! 그래도 같은 정령왕이랍시고 의리를 생각해서 큰 맘 먹고 줬더니!”
“아,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할게. 하면 되잖아.”
“정말이지? 약속한 거다?”
“알았다니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프리트는 생긋 웃었다.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서 가장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뭘까, 저 의미심장한 미소는.
대개 누군가의 기쁨에 찬 얼굴을 보면 같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프리트의 미소에는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분명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상황인데도 매우 찝찝한 것이, 마치 사냥꾼이 펼쳐둔 덫에 걸려든 심정이랄까?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당하고 산 탓에 조건 반사적인 반응이 나타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내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