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상단으로 가는 길엔 나와 카이테인만이 동행하기로 했다. 에이프릴에겐 아직 안정이 필요했고,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사나가 옆에 있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만일을 위해 라피스에겐 두 사람의 보호를 부탁했다. 그는 처음엔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 말을 듣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강하잖아.”
“알았어, 할게.”
……어떤 의미에선 상당히 다루기 쉬운 녀석이었다.
그러나 막상 상단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처음부터 예상치 못한 고배를 마셨다. 문지기가 감정 물품이 뭔지 듣자마자 바로 퇴짜를 놓은 것이다.
“브리아의 보석? 우리 상단은 그거 구입 안 해.”
“엑? 왜요?”
“이미 넘칠 만큼 많거든. 우리 총수님이 다른 건 몰라도 브리아의 보석만큼은 확실한 공급처를 갖고 계셔서 말이야. 게다가 전부 상질의 것들이지. 그러니 브리아의 보석이라면 다른 데 가서 알아봐.”
“윽, 그냥 한번 봐주기라도 하시면 안 돼요? 제가 가진 것도 상당히 좋은 것들이거든요.”
“소용없어. 게다가 지금 우리 상단이 그런 걸 감정할 여유가 없거든. 그러고 보니 그쪽 일행분은 신관이신 것 같은데…….”
문지기의 시선이 내 옆에 있는 카이테인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훑었다. 어디를 보아도 신관의 복장이었기 때문에 알아보는 것은 당연했지만 왠지 눈길에 적의가 서린 느낌이었다.
“마신교단은 아니신 것 같고, 어느 신의 신관이신가?”
“형벌의 사제입니다.”
“형벌의 신? 아아, 요즘 소문이 자자한 그 신의 신관이시구만.”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문지기는 조금 전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우리 상단은 신관이랑은 거래하지 않아.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게.”
“그러지 마시고…….”
“글쎄, 안 된다면 안 된다니까.”
“거기, 무슨 소란이지?”
한창 실랑이를 하던 중 들려온 목소리에 문지기의 어깨에 힘이 실렸다.
“에, 엘드란 님! 나오셨습니까?”
그가 우렁차게 인사하며 허리를 굽힌 방향엔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긴 로브에 밧줄로 엮은 띠를 허리에 맨, 전형적인 상인의 복장을 한 사람이었다. 그의 등장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마도 이 상단에서 상당히 높은 사람인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주위가 어수선한데 너무 소리가 크군. 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그, 그게 실은 이자들이 브리아의 보석을 감정하고 싶다고 찾아와서요. 저희 상단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브리아의 보석?”
“예! 전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 바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문지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우리 등을 강제로 떠밀려고 했다. 그에 내가 얼굴을 찌푸리려던 찰나였다.
“아니, 잠시만.”
엘드란이라 불린 사람이 한 손을 들어 문지기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문지기를 물러나게 한 다음 내 앞으로 다가와 천천히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잠시간 살피던 그의 시선이 정확히 내 이마에 머무르는가 싶더니 돌연 선연한 빛을 품었다.
“실례했습니다. 보석을 감정하러 찾아오셨다고요?”
“네, 맞아요.”
“훌륭한 서클렛이군요. 그 가운데 박힌 보석은 혹시 라피스 라줄리 아닙니까?”
“네? 아, 네 그런데요.”
이제 보니 내 서클렛에 관심을 가진 모양이다. 뒤늦게야 나는 이것이 고대 유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것도 심지어 장물이었지, 아마?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상인은 대개 눈썰미가 매우 뛰어난 편이다. 그들 중에서라면 서클렛의 유래를 알아볼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바짝 긴장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그는 환영하듯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그 서클렛에 관해 자세한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 * *
상단 안은 수많은 나무 상자들과 두꺼운 장부들로 가득했다. 특이한 건 대부분 정돈되지 않은 채 바닥에 마구 널브러져 있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상자의 뚜껑이란 뚜껑은 전부 열려 있었고, 그 안의 짐들은 엉망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헤집어 놓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방 안이 조금 엉망이죠? 지금은 어디를 가도 이런 상태라서요.”
“뭔가 공사라도 하시나 봐요.”
내 말에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이 방이 제일 정돈이 된 편입니다. 일단 여기서 앉아 기다리시면 제가 곧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아, 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와 카이테인은 의자에 앉아 천천히 주위를 구경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하나 있었다. 새빨간 불씨를 품은 나비들이 춤을 추듯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내 눈에만 보이는 광경이다. 나비의 정체는 불의 하급 정령인 ‘카사’였으니까.
‘이 겨울에 웬 불의 정령들이 이렇게 많지?’
내가 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엘.』
“……어? 엘뤼엔?”
갑자기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카이테인이 덩달아 놀란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엘뤼엔 님의 계시입니까?”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엘뤼엔? 갑자기 무슨 일이야?”
『내가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야만 연락을 해야 하는 거냐?』
“아니, 그,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잘 지내고 있나 해서 연락한 것뿐이다. 얼굴을 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너무 오래되긴. 바로 얼마 전에 봤으면서.”
『그래서 내가 반갑지 않다는 거냐?』
“아냐, 아냐. 반가워. 당연히 반갑지.”
『엎드려 절 받기로군.』
“아냐, 정말이라니까. 근데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닌 거지?”
『그래.』
담담한 말투인데도 나는 왠지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엘뤼엔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못 말리겠군. 별일은 아니다. 그냥, 조금 신경이 쓰이는 녀석이 있는데, 아무래도 네가 그와 만나게 될지도 몰라서 말이야.』
그럼 그렇지. 역시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구만.
엘뤼엔처럼 바쁜 신이 그저 안부만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딘지 초조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랑 만나다니. 그게 누군데? 나도 아는 사람이야?”
『지금은 설명해줘도 잘 이해하지 못할 거다. 다만 한눈에 보기에도 멍청해 보이는 녀석이 다가오면 무조건 경계해라. 그래 봤자 딱히 도움은 안 되겠지만. 아예 방심하고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너무 추상적인 설명 아니야?”
『아마 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 거다. 갑자기 만난 상대가 생각지 못한 정체를 드러내면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버려. 이 아버지가 허락한다.』
“엥? 왜 그래야 하는데?”
『아무튼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내 말 이해했겠지?』
“으응, 아, 알았어.”
사실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정체도 알 수 없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해봤자 날더러 뭘 어쩌란 말인가. 그때 마침 엘드란이 돌아오고 있었기에 나는 양해를 구하곤 얼른 통신을 끊었다. 허둥거리고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엘드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혹시 이 상단에 불의 정령사가 있나요?”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단순히 화제를 바꾸기 위해 건넨 질문에 엘드란이 조금 경계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어라?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나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네? 아, 그냥 주위에 카사들이 많이 있어서…….”
“카사?”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난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건물 안의 온도가 높은 것 같아서요.”
자연체의 정령이라곤 해도 이렇게 숫자가 많으면 반드시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이 정도의 온도라면 인간의 입장에선 얇은 옷을 입어도 될 만큼 훈훈하게 느껴질 것이 틀림없었다.
카이테인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는지 엘드란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고작 그런 걸로 정령사의 존재를 알 수가 있습니까?”
“아, 그, 그게 기운을 느꼈달까요?”
“기운?”
“실은 저도 정령사거든요.”
그 말에 엘드란의 눈매가 조금 크게 벌어졌다.
“정령사……라고요? 당신이?”
“네, 물의 정령사예요. 자아, 보세요, 여기.”
나는 서둘러 근처를 배회하던 나이아스를 한 마리 잡아 강제로 형상화시켰다. 물론 라피스의 마나를 빌린 것이다. 그제야 엘드란의 눈에 서린 경계의 기색이 풀리며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이럴 수가. 정말 정령사셨군요. 정령사는 정말 귀한데……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하하…….”
‘망했다.’
안도하기보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거였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들어오게 된 건 서클렛 때문이었다. 즉, 그가 벗어서 보여 달라고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였다. 딱히 건네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내 이마에 새겨진 신의 문장이다.
물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남 앞에 당당히 드러내지 못할 것은 아니다. 교황이라고 해봤자 이름뿐인 데다 그다지 대단한 권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 부분에 대해선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정령사라고 밝혀버린 이상 이제 저 사람 앞에선 우연이라도 문장을 보일 수 없게 됐다. 신관의 성력은 그 어떤 능력과도 섞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 앞에서 정령을 소환해보임으로써 나는 내가 가진 신의 문장이 가짜라고 광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소한 신성 모독이고, 운이 나쁘면 교황 사칭 죄까지 뒤집어쓰고 이 자리에서 종교 재판에 넘겨질지도 몰랐다.
‘내가 미쳐. 이걸 어떻게 하지?’
낭패한 내 심정을 카이테인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측은한 시선이 느껴지는 가운데, 엘드란만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실은 저희 상단의 총수이신 이카나 님이 불의 정령을 조금 다룰 줄 아십니다.”
“엑, 그래요?”
“고대로부터 불의 정령은 강한 힘과 부귀를 상징하죠. 그래서 상인들 중에는 불의 정령을 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총수께서도 그런 의미에서 정령술을 배우셨다고 하시더군요. 아직 소환할 수 있는 건 하급 정령뿐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저희 상단 사람들은 그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겨울에도 이렇게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지요.”
단지 하급밖에 되지 않는 정령사에게 이렇게 많은 자연체의 카사들이 모인다고? 의아했지만 나는 자세히 캐묻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실례지만 그 서클렛을 제가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
마침내 가장 두려워하던 순간이 닥쳤다. 내가 주춤거리자 엘드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죠? 보여주기 싫으신 겁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심히 살펴보겠습니다.”
“…….”
나는 어떻게 이 고비를 넘길지 맹렬히 속으로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엘드란, 거기 있어?”
멀찍이서 들려오는 고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한순간에 낯빛이 바뀐 엘드란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여기 있습니다!”
“잠시 이리로 와줄래?”
“네! 알겠습니다! 손님들, 죄송하지만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황급히 양해를 구한 뒤, 그는 허둥지둥 어디론가 사라졌다. 미처 반응을 보일 틈도 없이 벌어진 순식간의 일이었다.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상황에 나와 카이테인은 멀뚱히 서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잠시 후, 사라졌던 엘드란이 금방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으음, 뭐라고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저와 함께 자리를 옮겨주시겠습니까?”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나는 다시 그를 바라봤다. 엘드란은 그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카나 님께서 여러분을 뵙자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