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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112화 (112/608)

제112화

에이프릴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진정했다. 정신이 들자마자 그녀는 젖은 천으로 얼굴을 닦은 뒤 어색하게 우리를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흉한 모습을 보였네요.”

“아니에요. 이제 좀 괜찮으신 건가요?”

“네, 덕분에 나아졌어요.”

그녀는 말갛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컷 울고 난 덕에 두 눈이 퉁퉁 부은 상태였지만 그녀의 미색엔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안쓰러울 정도로 드러난 뼈대가 눈에 밟혔다.

두터운 망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나치게 마른 상태였다. 손은 한눈에도 버석해 보였고, 손톱 끝도 갈라져 있었다. 몇 달간 산을 헤매며 영양 보충조차 못 했던 시절의 이사나도 이 정도로 상태가 나쁘진 않았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고생했던 것이 분명했다.

나도 눈치챈 사실을 바로 곁에 있었던 이사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에이프릴을 채근했다.

“말씀해주십시오, 누님. 형님과 누님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에이프릴은 망설이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이사나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용기를 가졌는지 에이프릴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실은…….”

가볍게 운을 뗀 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우리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내뱉어진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쉽게 믿기 힘든 사실들뿐이었다.

“형님이…… 세뇌를 당하셨다고요?”

경악에 찬 이사나의 반응에 에이프릴은 다시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설명은 이랬다. 카웰 공작은 제국의 충신이자 독실한 마신교의 신도로서 매해 연례행사처럼 마신교의 신관을 저택에 초대하여 황실을 위한 기도를 드리곤 했었다. 그런데 약 3년 전, 의례히 저택을 방문한 마신관이 갑자기 공작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전했다. 꿈에 마신으로부터 계시받기를, 오래지 않아 황가에 큰 파국이 내려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해진 파국이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막으려고 했다간 오히려 더 큰 해를 불러오게 되니 저택을 봉문하고 얌전히 재앙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공작은 긴가민가한 반응을 보였지만 신뢰하는 마신관의 말이었기 때문에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신교에서 예기치 못한 신탁이 내려졌다. 10년 가뭄의 원인을 현 제국의 황제에게 돌리는 내용이었다.

공작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마신관이 예지했던 파국의 과정임을 깨달았다. 그는 당장 황성으로 가려 했으나 나서면 안 된다고 했던 마신관의 말이 생각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그는 계시를 주었던 마신관을 찾아가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그에 대한 마신관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의 여동생인 에이프릴을 마신교로 보내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진 그녀 역시 공작과 한마음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마신관의 뜻을 받들어 기꺼이 마신교로 향했다.

그곳에서 신관들은 그녀를 거의 하녀처럼 대했다. 마신교의 허드렛일이란 허드렛일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마신관들은 그녀가 고통을 감내할수록 황가에 미친 재앙이 덜어질 거라고 했다. 에이프릴은 스스로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자청해서 궂은일을 했다. 끼니를 굶는 일도 허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생을 하고 기도를 해도 황가의 사정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백성들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흉흉한 방향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마신관은 다 잘되고 있으니 괜찮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얼마 후 공작이 오랜만에 그녀를 보기 위해 마신교를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격노했다. 에이프릴은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마신관이 내뱉은 변명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공작께서 저의 경고를 어기고 이곳을 떠나 수도로 가실 마음을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동생분이 대신 저주를 받아 앓기 시작하신 겁니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마신교로 보냈지만 공작은 황가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좌불안석이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더는 상황을 좌시할 수가 없다 판단하고 당장 황성으로 떠날 짐을 꾸리려 했다. 마신교에 들른 것도 마음을 정한 김에 에이프릴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결심을 했기 때문에 여동생이 저주를 받았다고 하니 공작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에이프릴로선 더 황당한 심정이었다. 그녀의 몸이 허름하고 마른 것은 저주를 받은 것도 아파서도 아닌, 그저 마신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굶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에이프릴은 그날 처음으로 마신관을 의심했다. 그러는 중에 그녀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지켜보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기도를 드리러 온 여인에게 감시자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슬슬 마신관에게 다른 저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하는 모든 말들이 위선처럼 느껴지고 꾸며진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는 결국 신전에서 도망쳤다. 감시자들의 눈길이 잠시 소홀해진 틈을 이용한 필사적인 탈출이었다.

다행히 그녀에겐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능력이 하나 있었다. 기초 수준에 불과하긴 했지만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환상 마법을 걸어 자신의 모습을 남자인 것처럼 꾸미고 마신교의 추격을 피했다. 그렇게 나간 대로에서 그녀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황제가 스스로 처형대에 오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해!’

그녀는 사명감을 지니고 공작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워낙 사방에 지키고 있는 자들이 많아 가까이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공작 역시 황제가 내린 결정을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쯤이면 여동생이 무단으로 신전을 나갔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텐데도 여전히 저택이 잠잠한 것이 이상했다.

갑갑했지만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에이프릴은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을 찾았다.

고심 끝에 그녀가 찾아간 것은 클리프라는 이름의 상단이었다. 그곳의 총수는 이카나라는 여인으로, 박식할 뿐만 아니라 제국 정보에 빨랐다. 그리고 유일하게 마신교와 거래가 없는 곳이었다.

총수와 만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이카나가 그녀를 알아봤다. 몇 해 전 상단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인사차 영주관을 방문했을 때 아주 잠시 보았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카나는 그녀의 상황에 흥미를 보였고, 흔쾌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좋아요, 제가 공작가의 상황을 알아봐 드리죠. 클모어 영애에게 빚을 만들어두는 것도 저희 상단의 미래를 위해 나쁜 거래는 아닌 것 같으니까요.”

며칠 후 이카나가 내민 서류 하나에 그녀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황제의 처형이 집행됐다. 그리고 공작이 그것을 막으려 한 죄로, 공작의 여동생이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에이프릴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뒤로…… 저택의 봉문은 더 심해졌어요.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마신관 외에, 오라버니는 누구의 접근도 일절 허락하지 않았죠. 그래도 전 포기하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오라버니를 뵈어서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모든 게 소용없는 일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번은 이카나 총수가 오라버니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 적이 있었어요. 상단의 총수는 어떤 경우에서든 단 한 번 영주와 독대할 수 있는 권한이 있거든요. 그녀가 그것을 저를 위해 써준 거죠.”

“그럼 형님과 만나셨단 말입니까?”

“네, 폐하. 그런데 오라버니가……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더군요.”

“그게 무슨…….”

그것만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이사나가 당황해서 말을 삼키자 에이프릴은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라고 불렀더니, 격노하셨어요. 여동생의 죽음을 천한 장사 밑천으로 이용하려 하는 파렴치한 상인이라면서. 무슨 방법을 썼는지 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도 하지 않으셨어요. 심지어 제가 여동생과 닮았다는 식으로조차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 길로 바로 쫓겨났고, 이후로 오라버니는 클리프 상단과 일절 상종도 하지 않고 계세요. 그 일로 제 행적을 눈치챈 마신교가 클리프 상단을 감시하고 있는 상태고요. 저는 이번에도 몰래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었어요.”

“…….”

“…….”

그녀가 모든 설명을 마쳤을 때, 우리들은 아무런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악문 그녀를 중심으로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마신관이 거짓말을 한 것이나, 공작이 그에 속았다는 것을 들었을 때만 해도 상황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진 않았다. 진실만 밝히면 금방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동생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라면 상당히 문제가 심각했다.

“정말 세뇌를 당한 건가? 염탐을 했을 땐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세뇌라기보다는 각인일걸.”

“각인?”

대꾸한 사람은 라피스였다. 내가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공작은 소드 마스터라며. 그 정도면 일반인들보다 훨씬 정신력이 강해. 광범위한 세뇌는 먹히지도 않을 거고, 시도하면 역으로 바로 눈치챌 위험이 커. 그래서 이용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무난한 종류의 암시를 걸었겠지. 즉, 여동생이 죽었다는 사실만 머릿속에 인지시킨 거야. 보편적인 최면 요법인데, 간단히 풀리지 않는 걸 보면 그중에서도 저주의 일종인 것 같네.”

“저주는 엘뤼엔의 관할 아닌가?”

“마신도 관할해. 오히려 그 부분에서는 마신이 더 강력할걸? 마속성에 관한 건 마신이 최고신이니까. 참고로 마신관이 건 저주는 마신관밖에 못 풀어.”

“윽, 정말?”

“그게 아니면 마신의 권능이 깃든 물건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 아무튼 무조건 마신의 힘이 미쳐야 돼. 그것도 상당히 엄청난 힘이 필요할걸? 아무리 간단한 암시라도 소드 마스터에게 저주를 걸려면 꽤나 고위 신관이 움직였을 테니까. 적어도 마검은 있어야 할 거다.”

그 말에 동의하듯 카이테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가 동조할 정도라면 정말이라는 소리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감하네. 갑자기 마검 같은 걸 어디서 찾아?”

“글쎄, 마계에 가면 널린 게 마검이라고 하던데. 거기서 하나 주워 오면 되겠네.”

“마계를 어떻게 가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

무책임한 대답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황망해져서 바라보자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저어…….”

만약 그때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녀석의 배에 주먹을 날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때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돌리자 에이프릴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어느 지하 동굴인가에 마검이 봉인되어 있다고요.”

“엇, 그래요? 그곳이 어딘데요?”

“거,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몰라요. 클리프 상단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거든요. 아마 이카나라면 그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을 거예요.”

“이카나라면, 당신을 도왔다는 그 총수 말이죠?”

“네, 맞아요. 하지만 지금 그곳은 마신교의 감시가…….”

자신 없게 말끝을 흐린 그녀는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으로 인해 상단에 피해가 갔단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라피스는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만나는 수단이야 적당히 만들어내면 그만이지. 클리프 상단은 대개 뭘 취급하는데?”

“보, 보석이나 고대 유물 같은 것을…….”

“그래? 그럼 보석을 감정하러 왔다고 하면 되겠네. 엘, 네가 가지고 있는 꽃 몇 개만 보여주면 금방 통과할걸?”

“꽃? 아, 혹시 브리아의 보석 말이야?”

“그래, 그거. 그것도 일단은 보석이긴 하니까.”

듣고 보니 꽤 그럴듯한 방법이었다. 한 가닥 희망의 줄기가 내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모두를 돌아보았다. 다른 의논은 필요 없었다. 이제 결심을 행동으로 옮길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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