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왜 그래, 이사나?”
내 질문에 그는 데르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입술을 악물었다.
“들어본 적 있어. 마계 4대 공작의 이름 중 하나야.”
“4대 공작?”
“마왕 다음으로 높은 신분이야. 만약 내 짐작이 맞는다면 세르피아네스라고 했던 저 여성 마족은 4대 공작 세르피스가 분명해.”
과연, 그저 평범한 마족은 아니라는 소리인가? 데르오느빌, 아니, 데르온은 눈앞에서 대놓고 정체를 가늠하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단지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이쪽의 짐작을 긍정하는 듯 보였다. 반면 세르피스라는 여성 마족은 눈에 띌 정도로 불안한 얼굴이라 안쓰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좋아요, 데르온. 마왕이 왜 당신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거죠?”
“저희도 그 이유까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개인적인 용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 혹시 마신의 뜻인 건 아니구요?”
그 순간 스산할 정도로 냉정하던 마족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누가 보기에도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어진 말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송합니다만, 물의 왕이시여.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현 마왕 카류드리안 전하는 왕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신의 부름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마신의 부름을 받은 적이 없다고요?”
“예. 그뿐만 아니라 마신께서 마계를 직접적으로 관장하지 않으신 지 시일이 꽤 오래됐습니다.”
“얼마나 됐는데요?”
“대략 백 년이 넘은 것 같군요.”
어라라, 그럼 마신은 이번 일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소린가? 대답하는 데르온의 태도는 단호했다. 마왕이 개인적으로 대공을 돕고 있는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뒤죽박죽 엉키는 정보에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유력했던 용의자가 사라지고 갑자기 수사가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나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잠깐만요. 그럼 대공이 마신을 위해 번제를 드리는 건요? 그것도 마신의 뜻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가요?”
“그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이들을 죽여서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없습니다.”
담담한 대답에 나는 더 이상 질문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기색을 보니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긴 아무리 고위 마족이라고 해도 마계의 내부 사정을 다 알 수는 없겠지. 나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저희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고민이 깊어질 무렵 데르온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딱히 다음 일을 두려워하지도, 기대감이 담겨 있지도 않은,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얼굴이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오히려 흥미가 생겨서 물었다.
“이대로 보내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미 정체를 들킨 이상 임무를 계속 수행하긴 어려우니 아마 마계로 돌아가겠지요.”
“가자마자 마왕에게 이쪽의 일을 보고하겠네요?”
“네, 그게 저희가 받은 임무였으니까요.”
역시 지나치게 솔직하다.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발언조차 거침이 없었다. 마족들은 원래 다 이런 건가? 나는 묘한 심정으로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저런 대답까지 들었는데 뭘 망설여? 애초에 화근을 만들지 않으려면 지금 없애는 게 좋을걸?”
옆에 있던 라피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바로 그때, 내내 눈치를 살피고 있던 여마족 세르피스가 별안간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동시에 주위의 기류가 뒤틀리더니, 곧 눈앞에 새카만 안개가 터져 나왔다.
슈우욱! 촤아아악!
“윽!”
“……엘!”
무심코 팔을 들어 피한 뒤 나는 아차 싶은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르피스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동료인 데르온을 놔두고 홀로 달아난 것이다.
“역시 마족, 동료 의식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군. 아주 마음에 들어.”
싱글싱글 웃는 라피스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인지 딱히 놀란 기색도 없이 여전히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마왕의 계획이 마신의 뜻은 아닐 거라고 했었죠? 그럼 마왕이 대공을 돕고 있는 건 사실인가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둘이 어떤 관계인 거죠?”
“정확한 건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계약 관계일 거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계약? 대공이 마왕을 소환했다는 건가요?”
데르온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그 둘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그 이유 말고 달리 마땅한 것이 없었다. 마신을 배제했을 경우, 상식적인 선에서 마왕이 평범한 인간을 도울 일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인간은 마족을 소환할 수 있다. 소환된 마족은 정령과 마찬가지로 계약을 맺어 그들의 힘이 되거나 소원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다만 정령과의 계약 조건이 단순히 마나를 빌려주는 것뿐이라면, 마족은 무슨 대가를 요구할지 모른다는 차이가 있었다. 때문에 위험부담이 매우 큰 편인데도 이곳의 사람들은 마족과의 계약을 꿈꾸곤 했다. 특히 마신을 섬기는 스왈트 제국에서는 마족을 딱히 사악한 종족으로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소환 의식을 제지하지도 않는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족과의 계약이 평범한 일은 아니다. 마족의 소환 방법은 정령의 소환 의식만큼이나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공이라면 수많은 정보를 얻기 쉬운 위치일 테니 구하기로 마음먹으면 아주 불가능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필 소환된 마족이 마왕이라는 건 개탄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이사나도 정령왕을 소환해냈는데 그라고 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그럼 혹시 이사나의 사촌 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죽었다는 누이의 행방에 대한 것이라든가.”
“그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대공이 관여한 게 아니라는 건가요?”
“글쎄요. 저도 왕의 모든 계획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저희가 개입하지 않았다 해서 반드시 대공과 상관이 없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당신도 이만 돌아가도 좋아요.”
그러자 데르온은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처음으로 보인 반응다운 반응이었다. 라피스 역시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뭐야, 그냥 보내주려고?”
“이미 한 명이 달아났는데 할 수 없잖아. 어차피 보고는 들어갈 거고, 입막음하기엔 늦었는걸. 그냥 지켜만 본 것뿐인데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아.”
“지금까지야 그냥 지켜만 봤겠지. 다음엔 공격하려고 할 텐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사실 별로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설령 그가 정말 공격을 해온다 해도 왠지 내가 질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라피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끝까지 반대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어하는 것 같긴 했다.
“자, 이만 가 봐요.”
“……물의 왕의 관대한 처사에 감사드립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데르온은 묘하게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싸움과 분란을 즐기는 종족이라더니, 왠지 간단히 풀려난 상황에 매우 큰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그러고 보니 이 얘기를 드리는 것을 잊었군요.”
“……?”
돌아서기 전 데르온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의아해져서 바라보자 그는 차분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대공이 어린 인간을 산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렸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저도 마신께서 하시는 일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신께선 매우 냉혹한 분이시지만, 그 어떤 피조물이든 아이들에겐 관대하시다는 겁니다.”
“마신이 아이에게 관대하다고요?”
“의외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은 외면을 받고 있는 카류드리안 전하 역시 어린아이였던 시절에는 마신의 사랑을 받았죠. 대공이란 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마신을 위한 번제를 드리는 거라면 실수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분이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달갑게 여길 리 없으니까요.”
결국 그가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는 하나였다. 대공의 번제가 마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 아마도 그는 마신과 마왕의 관계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마왕의 명을 따르면서도 그를 달갑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닌 것처럼도 보였다. 그렇다고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참고하도록 할게요.”
“이왕이면 이것도 참고해두시길. 아마 저희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것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마왕이 대공을 돕고 있다면 정령왕의 개입을 결코 좌시하진 않을 것이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나를 방해하거나, 지금보다 더 이사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선봉에 데르온이 설 가능성은 달아난 여마족이 마왕에게 고자질을 할 가능성만큼이나 매우 높았다.
다음에 만날 땐 지금처럼 평온한 분위기는 아니겠지. 데르온에게 생각보다 호감이 간 탓일까? 그와 적이라는 사실이 매우 아쉬웠다.
* * *
날이 저물자 나와 일행들은 마을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사나와 카이테인의 식사도 챙길 겸, 적당한 숙소를 잡기 위해서였다. 본래는 공작의 저택으로 직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따로 숙소를 생각해두지 않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으므로 한동안 묵을 곳을 다시 알아봐야 했다.
마침 식사 때였기 때문에 상가는 어디를 가도 사람이 붐볐다.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큰 식당에 들어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그리고 라피스는 늘 그랬듯이 마법을 걸어 소리를 차단했다).
“기분은 좀 괜찮아, 이사나?”
마족들과 대면한 이후로 이사나는 내내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웃어 보이는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얘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네. 결국 에이프릴 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잖아. 마신의 개입 여부도 지금으로선 확신할 수 없고.”
“흐응, 마족이 하는 말을 전부 믿는 거냐?”
“역시 거짓말일까?”
불안해져서 바라보자 라피스는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글쎄,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해졌으니 된 거 아냐? 마왕이 대공과 한편이라는 거. 마신이 개입했건 어쨌건, 앞으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존재가 마족들이라는 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지.”
“으음, 그것도 그러네.”
사실 마왕만 두고 보아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긴 했다. 그의 힘은 잘 모르지만 오늘 찾아온 공작보다는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일 게 분명했으니까.
결국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머리를 싸매고 있어봤자 당장 해결이 될 리도 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눈앞의 일들부터 하나씩 처리를 해보자. 그러다 보면 다른 일들도 실마리가 보이겠지.”
“눈앞의 무슨 일?”
“에이프릴 양의 행방을 찾는 것 말이야. 산 제물 얘기 때문에 잠시 길이 딴 데로 새긴 했지만, 원래 우리가 하던 일은 그거였잖아.”
“켁, 오늘 하루 종일 수소문하고 다닌 것으로도 모자라 그 짓을 또 하자고?”
벌써부터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 라피스를 보며 나는 볼을 부풀렸다.
“성과가 하나도 없는 걸 어떡해. 그래도 계속 알아보면 누군가 한 명쯤은 진상을 아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어?”
“그럴 바엔 차라리 공작을 직접 찾아가든가.”
“어? 공작에게?”
“어차피 전부 공작과 관련된 일이잖아. 당사자만큼 진상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어딨어? 떠도는 얘기들을 접하는 것보다야 오히려 그게 제일 확실하지. 너한테는 저택에 들어가는 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로선 왜 쉬운 길을 빙빙 돌아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나와 이사나는 서로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왜 그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헤에, 라피스, 너 되게 똑똑하다.”
“그걸 이제 알았냐? 아무튼 정령왕이나 그 계약자나 둔해 터져가지고선.”
“뭔가 잊은 모양인데, 너도 그 계약자 중 한 명이거든요?”
“하, 누굴 똑같은 취급이야?”
“같은 취급이 싫어? 그럼 계약을 파기하시든가요.”
“……제길.”
그래도 차마 파기하자는 말은 할 수 없었는지 라피스는 얼굴을 왕창 찌푸렸다. 보란 듯이 혀를 내밀자 쿡쿡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린 듯이 조용히 앉아 있던 카이테인이었다. 유치한 모습을 보였단 생각에 민망한 표정을 짓자 그가 얼른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보기 좋은 광경이란 생각에 그만……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아, 아니에요. 불쾌하긴요. 그러고 보니 카이 씨는 이곳에서의 용건은 전부 끝나신 거죠?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희를 생각해서 머무시는 거라면 먼저 떠나셔도 되는데…….”
“괜찮으시다면 이 일이 해결이 될 때까지 엘 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어, 정말요?”
“어차피 지금 당장은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다른 곳도 아니고 저희 신성왕국과 밀접한 클모어의 일인 만큼 사정을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신전을 왕국이라 표현했다. 설령 세상에서 가장 작고 볼품없는 왕국일지라도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이 보기 좋은 건 사실이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겠네요. 저야 카이 씨가 함께해주시면 좋죠. 오히려 이대로 헤어지면 서운했을 거예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이에요.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기로 할까요? 본격적인 일은 내일부터 다시 의논을…….”
나는 잇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가까운 곳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발끝까지 늘어진 긴 망토 차림에 후드를 거멓게 뒤집어쓴, 한눈에 봐도 수상해 보이는 옷차림을 한 사람이었다.
워낙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걸 수도 있었지만 나는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는 분명 우리에게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