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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108화 (108/608)

제108화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사방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 언젠가의 일처럼 눈앞에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의 시선을 따라가듯, 뚜렷한 장면들이 빠르게 길을 이동했다.

이윽고 시선은 저택의 문을 넘어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내부 쪽을 정신없이 훑었다. 그곳에서 나는 조금 전 저택으로 들어갔던 신관과 집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복도에 선 그들의 맞은편엔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조금 창백한 안색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마신관은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공 각하, 또 뵙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듣는 것은 아니라서인지 목소리의 울림이 조금 묘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마신관이 남자를 향해 부른 호칭이었다. 공 각하. 아마도 그가 우리가 만나려고 한 카웰 공작인 모양이었다.

신관의 인사에 남자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이라고 하더니 금발에 푸른색 눈까지, 전체적인 외형이 본래 이사나와 상당히 닮은 모습이었다. 그래선지 그가 이사나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쉽게 와 닿지가 않았다.

“저를 찾으셨다지요?”

마신관의 질문에 공작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친근한 표정을 짓는 마신관과는 다르게 그를 응시하는 공작의 표정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마신의 교단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오늘이 벌써 2년째요. 대체 언제쯤 봉문을 끝낼 수 있냐고 묻는 것이오.”

“이런, 또 그 말씀이셨습니까?”

마신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한 공국의 공작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지나치게 불손한 모습이었다. 그게 불쾌했는지 공작의 눈빛에 더 짙은 날이 섰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지 않소! 그대들이 일러준 대로 봉문을 하고 칩거를 시작했으나 제국의 불행을 막지 못했소! 선황 폐하의 죽음조차 막지 못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말이오! 심지어는 현 황제 폐하께서 이곳 클모어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데 그의 신하인 내가 맞이하러 달려나가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나는 이제 봉문을 끝내겠소!”

“안 되십니다! 왜 일을 그르치려 하시는 겁니까? 공 각하의 결단 덕분에 그마나 좋아진 것이 이 정도라는 겁니다. 각하께서 나서시면 얼마나 더 비참한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 사실을 왜 모르십니까?”

“허나!”

“아무것도 걱정하실 게 없으십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지하에 계시는 에이프릴 님의 영혼이 오늘도 구슬피 울며 제국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사옵니다.”

“큭……!”

지하에 있어? 영혼?

마신관의 말이 무슨 약점이라도 되는지 공작은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을 본 마신관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잊으신 건 아니시지요? 에이프릴 님이 왜 저주를 받아 돌아가셨는지 말입니다.”

“…….”

“이제 조금이면 됩니다. 이 시기만 견디시면 곧 제국은 안정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중하십시오. 공 각하의 결단에 폐하의 안위가 걸려 있습니다.”

속살거리는 음성이 마치 주문이라도 거는 것 같이 들렸다. 공작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마신관을 바라보더니 이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 다시 한 번 믿고 기다리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공 각하. 이것으로 황제 폐하는 무사하실 겁니다.”

“…….”

“잊지 마십시오. 저희 마신관들은 어디까지나 정통을 이으신 황제 폐하의 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나는 시선을 거둬들였다. 접촉을 떼어낸 충격으로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지만, 방금 전 들은 대화 내용을 정리하느라 그런 것은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상황이라 신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으음, 이거 뭔가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황망함에 중얼거리자 이사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내내 관심 없어 보이던 라피스도 이번만큼은 호기심이 생긴 얼굴이었다.

“저택 안을 봤어?”

“보기는 봤는데…….”

“봐, 봤다고? 형님은 어때, 엘? 무사하신 거야?”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사나가 다급히 내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절박한 얼굴을 보니 오히려 선뜻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러자 그것을 최악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이사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모습에 나는 얼른 그를 다독이며 말했다.

“네 형은 무사해, 이사나. 안색은 좀 나빴지만 대체로 건강해 보였어.”

“그, 그럼?”

“공작이 스스로 칩거를 시작한 건 사실인 것 같아. 다만, 뭔가 조금 이상해.”

“이상하다니?”

체념하듯 눈을 감던 이사나가 바로 이어진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떨떠름한 기분으로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공작은 봉문을 한 것이 널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날 위해서……?”

이사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위험으로 몰아넣었으면 몰아넣었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은 그 결정이 오히려 자신을 위한 것이라니. 직접 봤던 나도 황당한데 그의 입장에선 더더욱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조금 전 저택 안에서 보았던 광경을 차분히 설명했다. 마신관이 했던 말부터, 그로 인한 공작의 반응까지. 설명이 이어질수록 일행들은 모두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어갔다.

“그러니까…… 공작은 자신이 나서지 않아야 저 녀석이 무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응.”

“마신관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지?”

라피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마신교에서 황제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공작이 관여하게 되면 더 위험해진다고 말했겠지. 그렇기에 공작은 황제가 더 큰 화를 당할까 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화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라피스의 평은 가차 없었다.

“바보 아냐? 신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고작 신관 따위가 한 사람의 개입으로 인한 파국을 무슨 수로 점쳐?”

“어, 그럼 아니야?”

“당연하지! 애초에 대공이란 녀석이 대신관 출신인데 마신교가 황제의 편을 드는 게 말이 돼? 심지어 교황이 대놓고 수배를 내리고 있는 이 판국에? 공작씩이나 돼서 그런 말을 믿는다고?”

“하지만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어.”

“무슨 이유? 정말 신탁이라도 받았대?”

“으음, 그렇다기보다는 좀 다른 이유 같더라고. 마신관이 한 말에 의하면 에이프릴이란 사람의 영혼이 지하에서 울고 있다고…….”

“에이프릴?”

“응, 그 에이프릴이란 사람이 뭔가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고 했어. 그 때문에 공작이 자중해야 한다는 듯이 말하던데, 대체 그게 무슨 소린지…….”

쨍그랑!

그 순간 바로 옆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이사나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린 것이다.

“이사나, 괜찮아?”

황급히 돌아본 나는 곧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찻잔을 들려고 했던 상태 그대로 파리하게 굳어 있었다.

“이사나?”

“……무슨, 에이프릴…… 누님이…… 돌아가셨다고?”

“누님?”

당황해서 묻자 이사나가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혀, 형님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야. 형님이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데 누님이 저주를 받아 죽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후두둑

그의 황금색 눈동자 위로 순식간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사나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친인의 죽음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급히 한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싼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수군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라피스가 마법을 펼쳐뒀기 때문에 대화의 내용이 새어 나갈 염려는 없었다. 워낙 눈에 띄는 일행이라 처음부터 주목을 받아서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가 운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시선을 끈 이상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벌써 이곳의 일에 참견하고 싶어 어깨를 들썩거리는 여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단 장소를 옮기자.”

다른 일행들 역시 사태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흐느끼는 이사나를 조심스레 부축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기 전 슬쩍 돌아본 저택의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외관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에서 방치된 듯 바래 있었다. 그래선지 제아무리 태양 빛 속에 웅장히 서 있어도 버려진 건물처럼 쓸쓸해 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 전 마신관 앞에 서 있던 공작의 모습과 겹쳐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 * *

탈진할 듯이 울던 이사나는 한참만에야 간신히 진정했다. 이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가 한 일은 사촌 누나인 에이프릴의 죽음을 수소문하는 것이었다.

공국을 다스리는 영주의 하나뿐인 여동생, 심지어 아직 미혼이라 저택에서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면 공국 내에서도 크게 소문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짐작과는 다르게 영지의 사람들은 에이프릴에 관한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장례를 치렀다는 말도, 심지어 죽었다는 소문도 없었다. 다만 그들이 아는 것은 2년 전부터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2년 전…….”

“공 각하께서 저택을 봉문하실 무렵 말이우. 에이프릴 아씨는 그때부터 저택 밖으로 한 번도 나오신 적이 없다우.”

설명해준 상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 말에 나와 일행들은 서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봉문이 급했다 해도 공작이 하나뿐인 여동생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소규모라도 준비하는 하인과 하녀들이 한두 사람쯤은 있었을 터. 그 과정에서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이후 몇 번이나 영지를 오가며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더구나 그들 모두 에이프릴의 죽음에 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특히 저택의 식솔들과 직접적으로 교류가 있는 상가들 쪽에선 더 강경한 입장이었다. 저택 안으로는 관은커녕 장례 물품조차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으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마신관은 분명 여동생이 죽은 것처럼 말을 했는데, 정작 마을 사람들 중에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수도 있지. 혹은 마신교 쪽에 시신을 맡겼거나.”

“아뇨, 카웰 형님이 에이프릴 누님의 시신을 타인에게 맡겼을 리가 없습니다. 정말 아끼고 사랑하던 동생인걸요.”

라피스의 추론을 이사나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그 부분은 나 역시 이사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아주 잠시 오가는 시선을 본 것뿐이었지만 공작은 마신관을 매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뿐인 여동생의 장례를 대신 맡겼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들이 강제로 빼앗아 갔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때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라피스가 지나가는 듯이 물었다.

“여동생의 나이가 몇이랬지? 너보다 연상이라면 성인일 것 같은데.”

“아, 네 맞습니다. 살아 있다면 올해 스물한 살입니다.”

“그래? 흠, 그럼 제물이 되었을 것 같진 않고…….”

“제물이라니?”

섬뜩한 단어에 나는 기겁해서 그를 바라봤다. 라피스는 오히려 그런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대공이 마신에게 드리는 번제물 말이야. 보통 유아부터 십 대 중반까지의 연령만 해당하는 것 같으니 그 여인은 상관없겠다는 뜻인데.”

“자,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대공이 마신에게 번제를 드려? 그럼 아이들을 모으는 이유가 설마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란 말이야? 사람을 제물로 쓴다고?”

“뭐야, 그걸 몰랐어?”

당연히 몰랐다. 그냥 다분히 변태적인 취미라고만 생각했지, 설마 제물로 바치려고 아이들을 모은다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이사나를 바라보니 그 역시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내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던 카이테인 또한 얼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교단이든 번제는 사라진 옛 고대의 풍습이다. 근래의 제사는 형식만 남은 공식 행사에 더 가까웠고, 신전에 기부금을 내거나 기도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추세였다. 그 외에 개인이 제(祭)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런 건 대부분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예를 들면 흉악한 범죄를 면죄받기 위해서라든가, 타인에게 강한 저주를 거는 것 등)뿐이라 의도 자체를 좋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 카이테인의 설명이었다. 특히 피를 사용하는 제사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생명과 운명을 주관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물의 가치가 클수록 영향력 또한 더욱 커지는 것은 당연. 하물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는 그 의도 자체를 매우 사악하게 여겨 공통적으로 금기로 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그 자체로 엄청나게 끔찍한 짓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대공이란 자가 버젓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충격적인 건 제단이 있는 장소가 바로 황성의 가장 밑바닥, 즉, 황실 본궁의 지하라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벌써 몇 년째 아이들이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에 가장 경악한 사람은 바로 이사나였다.

“황궁의 지하라니…… 그런 곳에 제단이 있다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흠, 반응을 보니 너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지?”

“몰랐습니다. 황궁 지하엔 비상 탈출을 위한 수로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외의 다른 것이 있어서도 안 되고요.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야. 아마 대신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일일걸? 그중 몇몇은 제사를 참관하기도 한다고 들었거든.”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지. 내가 왜 없는 소리를 지어 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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