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07화 (107/608)

제107화

“왜 그래?”

“이대로 내려가는 건 힘들겠는데? 앞이 하나도 안 보여.”

“뭐? 안 보인다니?”

“보면 몰라? 안개가 너무 심하잖아.”

라피스의 대꾸에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개는커녕 너무도 화창한 날씨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곳에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가득했던 얼음과 눈조차 완전히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나한테는 안개가 안 보이는데?”

“무슨 소리야. 이렇게 안개가 심한데 그게 안 보인다고?”

“정말이야. 애초에 안개가 끼는 것도 내 관할의 일인데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이사나, 너도 앞이 안 보여?”

“으응.”

“카이테인 씨는요?”

“저는 괜찮습니다.”

의아해하는 내 옆에서 카이테인 역시 어리둥절해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나와 그만이 이 산에 깔려 있다는 안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신관들에게만 길이 열린다고 했던가. 불현듯 며칠 전 그가 알려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엘뤼엔의 강림 이후 일어나고 있다는 산 밑의 기적에 관한 일 말이다. 입산을 하는 자들에게만 해당하는 현상인 줄 알았더니, 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 적용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쳇, 어쩐지 고작 안개 따위가 내 시야를 가로막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사실을 알게 된 라피스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다분히 사심이 섞인 게 분명한 것이, 이제 엘뤼엔이 하는 일이라면 전부 색안경을 끼고 볼 태세였다.

“그럼 어떡하지? 내 손을 잡고 갈래?”

“그럴 게 뭐 있어? 그냥 간단한 방법을 쓰면 되지.”

“간단한 방법?”

“뭐,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된 것 같네. 산을 또 타는 것도 귀찮았는데.”

“뭘 어쩌려고?”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길한 기분에 나는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다. 라피스는 그런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가볍게 대꾸했다.

“텔레포트.”

“텔레포……? 으앗! 잠깐만, 라피스!”

파앗!

뒤늦게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을 땐 늦었다. 말리려는 시도도 보람 없이 순식간에 마나의 파동이 우리를 덮친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펼쳐진 평지 아래 바위가 듬성듬성 늘어진 곳이었다.

나는 단번에 이곳이 어딘지를 알아보았다. 산의 제일 밑자락, 숲으로 들어서는 첫 입구 부분이었다. 무려 하루치 거리를 단번에 이동한 것이다.

“어떻게…….”

황망해하며 중얼거리는 내게 라피스가 으스대며 말했다.

“한 번 지나온 거리의 좌표를 계산하는 것쯤이야 나한테는 숨 쉬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지.”

그렇게 설명하면 아마 내가 대단하게 여겨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

“미쳤어? 여기에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어쩌려고!”

“뭐야, 그게 문제인 거냐?”

“당연하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는 걸 누가 봤으면 어떡해?”

“아무도 없으니 됐잖아. 그리고 그러면 좀 어때서? 텔레포트 마법 정도는 인간들도 할 줄 안다고.”

그래도 너무 눈에 띄거든?

나는 그렇게 소리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사나와 카이테인이 바닥에 주저앉는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정신없이 헛구역질을 했다. 아마도 갑자기 이동을 한 후유증인 것 같았다.

“괜찮아요?”

서둘러 다가가 살피자 카이테인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사이 창백해진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크게 굳어져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진을 그리지도 않고 마법을 사용하시다니…… 게다가 공간 이동 마법은 고위 마법사조차 힘겨워하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도대체 저분은…….”

“놀랄 필요 없어요. 실은 저 녀석, 드래곤이거든요.”

“예에? 드, 드래곤?”

충격 어린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간, 나를 바라본 그는 빠르게 차분해졌다. 지금 그 앞에 있는 내 정체에 생각이 미친 것 같았다.

“하기야 정령왕의 일행이신데 평범한 분일 리가 없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미안해요. 많이 놀라셨죠? 저 녀석이 좀 제멋대로라서…….”

“아닙니다. 덕분에 이제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될 것 같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전 굉장한 행운아인가 봅니다. 황제 폐하와 정령왕을 뵌 것으로 모자라 드래곤까지 만나게 되다니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모두 절 부러워할 겁니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오히려 민망해졌다. 사실 겉만 번지르르했지 우리 일행 중에서 정상이라고 할 만한 존재는 없었으니까.

이름뿐인 황제, 능력을 각성하지 못한 정령왕, 심지어 변태적 취향이 다분한 괴짜 드래곤이라니. 생각해보면 억지로라도 이렇게 모이기 참 힘들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굉장한 걸지도.

‘……하나도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이 길의 앞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순간 새삼 앞날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탓이 아닐 것이다. 제발 모든 여정을 무탈하게 마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카이테인의 협력으로 모든 일이 순조로워졌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정작 카웰 공작이 사절의 알현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현재 공 각하께서는 몸이 편찮으시어 운신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따라서 알현 또한 받으실 수 없습니다.”

공작을 대신해서 나왔다는 집사가 문 앞에서 딱딱한 어조로 통보(말 그대로 통보 형식이었다)했다. 당황한 우리를 대신해서 카이테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몸이 많이 불편하신 겁니까? 미력하지만 저희가 치유술을 써드릴 수 있습니다만.”

“신관의 치유술은 소용이 없습니다. 육체로 인한 병이 아니니까요.”

“그럼 마음의 병이란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건 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관련 문서는 제가 대신 공 각하께 전해드릴 터이니 신관들께서는 이만 돌아가시지요.”

정중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명백한 축객이었다. 그대로 더 버티고 있다간 병사라도 부를 기세라, 결국 우리는 아무런 소득 없이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몇 분 전의 일이었다.

“정말 난처하네. 이걸 어떡하지?”

우리는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식당에 죽치고 앉아 저택의 주위를 살폈다. 실제로 본 공작의 저택은 소문만큼이나 견고한 철옹성이었다. 얼추 지키고 있는 병사의 숫자만 수백 명은 되는 것이, 경계가 허술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라피스를 바라봤지만 그 역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무리야.”

“왜?”

“저택의 주위에 마나 감지 마법이 펼쳐져 있어. 무시하고 파괴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랬다간 마법을 펼친 녀석이 바로 알아차릴 거야.”

“……정말 철저한 성격이네.”

설마 그렇게까지 조치를 해놓을 줄이야. 아직 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굉장히 완고한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좀처럼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내 옆에서 이사나는 연신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공작이 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길 들은 후부터 온통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다.

“마음의 병이라니, 대체 형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알고 있는 형님은 그렇게 심약하신 분이 아닌데.”

“으음, 혹시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이 아닐까? 멀리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걸지도 몰라.”

“형님…….”

이사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라피스가 그 모습을 보고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너무 기대하진 말지? 충격을 받은 인간이 그냥 저러고 자리보전하고 있겠어? 그것도 사령관까지 했던 인간인데? 당장 군대를 이끌고 황성으로 쳐들어가야 정상이지.”

“그래도 운신을 하지 못하실 정도라니, 여력이 안 되신 걸 수도…….”

“흥, 그게 핑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라피스라즐리.”

아무튼 좋은 분위기를 초치는 것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내가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 스스로 찔끔했는지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래 봤자 이미 분위기는 가라앉을 만큼 가라앉은 상태였다.

한숨을 내쉬다 말고 나는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이거야?’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최근 들어 가는 곳마다 낯선 시선이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라피스가 합류한 시점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대부분이 라피스의 미모에 넋을 잃은 여인들이었다.

‘저런 녀석이 대체 뭐가 멋지다고.’

겉가죽이 아무리 잘생겨 봤자 결국은 전부 만들어진 환상일 뿐이다. 나는 그의 실체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듯, 카이테인의 표정이 굳었다.

“저건…….”

“응? 왜 그래요, 카이 씨?”

그의 시선을 따라 돌아본 나는 곧 저택 근처로 다가오고 있는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새카만 지붕에 붉은색의 무늬가 화려하게 아로새겨진 이륜 마차였다. 마차는 잠시 후 카웰 공작의 저택 앞에서 우뚝 멈췄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신관의 복장을 한 남자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새하얀 법의 위로 피처럼 검붉은 휘장 같은 것을 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신의 사제입니다.”

주시하고 있는 내게 카이테인이 바로 정체를 알려주었다. 예로부터 마신관들은 외출 시 법의 위에 검붉은 휘장을 걸치는 것을 관례로 여겨왔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건 바로 그다음 일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저택의 문이 열리더니 집사가 그를 반갑게 맞아들인 것이다. 조금 전 우리를 매몰차게 내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해 중얼거렸다.

“뭐야, 우리는 거절하더니 왜 마신관은 순순히 들여보내는 거지?”

“공작이 독실한 마신교의 신도라면 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를 배척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미심쩍기는 하군요. 정말 병환 중이라면 마신관을 가까이 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마신의 힘은 파멸과 정복을 위한 것. 강한 자에게는 더 강력한 힘이 되지만 반대로 약한 자에게는 다루기 힘든 칼날과도 같았다. 그래서 아무리 독실한 신도라도 아플 때는 교단을 찾아가는 일을 중단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공작의 행동은 확실히 수상쩍었다. 게다가 마신교가 이사나를 대놓고 배척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마신의 사제와 공공연한 교류라니.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고 해도 해석이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이사나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있었다. 그때 시큰둥하게 앉아 있던 라피스가 대뜸 말했다.

“여기서 고민만 한다고 뭐가 달라져. 궁금하면 직접 가서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든가.”

“들어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내부 사정을 봐? 마법도 못 쓴다면서.”

“육체가 통과를 못 할 뿐이지 영체는 상관없거든?”

“뭐? 그게 무슨…… 아차, 그러고 보니 나 정령이었지.”

중간계 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러자 일행들의 황당한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하긴 나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만큼 창피했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아니지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자연체로 돌아가 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까마득한데 그걸 일일이 자각하고 사는 게 더 어려운 거다. 암, 그렇고말고.

‘어라? 가만, 그럼 물의 기억을 읽는 것도 가능한 거잖아?’

그제야 떠오른 생각에 나는 바로 저택을 주시했다.

영체의 정령들은 이 세상 어디에든 퍼져 있고, 정령왕은 언제든 그들의 신체를 빌릴 수 있다. 그 말인즉, 단순히 흔적을 따라가는 것만이 아닌 즉석에서 그들의 시야를 투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굳이 내가 직접 갈 필요가 없이 그들의 눈과 귀를 빌리기만 하면 이 자리에서 저택의 안을 살펴보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내가 가만히 저택을 노려보고 있자 이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 왜 그래?”

“음, 잠깐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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