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라피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신관들은 모두 안도했다. 의식이 없는 기간이 워낙 길었다 보니 혹시나 시체를 치우게 되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라피스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안부라도 물을라치면 살기를 흩뿌리기까지 했다. 그의 입장에선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흑역사라 그런지, 언급조차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이사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저어, 라피스 님. 몸은 좀 괜찮으신…….”
“죽을래?”
“아, 아뇨, 죄송합니다.”
그의 살벌한 시선에 이사나는 희게 질려 바로 사과를 건넸다. 나는 얼른 그를 감싸며 라피스를 노려보았다.
“왜 겁을 주고 그래? 동료로서 걱정이 돼서 물어본 말 가지고.”
“내가 세상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부류가 세 가지 있어. 첫째, 능력 없는 놈. 둘째, 나한테 도전하는 놈. 셋째, 눈치 없는 놈.”
“그게 죄는 아니잖아!”
“나한텐 죄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나름 동료에게조차 이러는 상황이다 보니 신관들은 모두 멀찍이에서 그를 흘끔흘끔 살피기만 할 뿐, 감히(?)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건네 오는 과감한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대신관 루얀과 카이테인이었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차분하게 건네 오는 말에 라피스의 표정이 바로 썩었다. 하지만 두 신관에게는 그의 전신에서 흩날리는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그들의 모습에 라피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저러다 사고 칠까 싶어 나는 얼른 그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어, 이제 이 녀석도 일어났으니 저희들은 이만 이곳을 떠날까 하는데요.”
“이런, 벌써 말입니까?”
“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우리가 신전에 머물게 된 지도 어느새 열흘째였다. 본래 넉넉히 잡아 이삼 일 정도로 예상했던 여정임을 감안하면 너무 오래 체류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당장 내려간다 해도 카웰 공작을 바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는 했다. 공식적으로 그는 칩거 중이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벌써 몇 년째 저택을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저택의 모든 출입문이란 출입문은 전부 봉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병사들이 주위를 지키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들 앞에서 이사나의 정체를 밝힐 수도 없으니 정당하게 들어갈 만한 다른 구실을 찾아야 했다.
“애초에 공작은 왜 칩거를 시작한 건데?”
떠나기 전날,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라피스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에 이사나의 얼굴에 잠시간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형님은 본래 국경을 지키는 경비대의 사령관이었습니다. 외숙부께서 갑자기 병환으로 돌아가시면서 낙향하시긴 했지만 이후로도 선황 폐하와 계속 친서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해왔었죠. 그런데 갑자기…….”
“소식이 끊겼다?”
“예.”
“그런 뒤에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단 말이지? 네 아버지가 처형을 당할 때도?”
“……예.”
약간의 숨소리와 함께 한 템포 느린 대답이 이어졌다. 아직 이사나에게는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무릎 위에 놓인 그의 두 손이 꽉 움켜 쥐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라피스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라피스, 단어 좀 골라서 얘기해.”
“없는 얘기를 한 건 아니잖아.”
“눈치 없는 사람은 싫다며? 너야말로 눈치 좀 챙기시지?”
“상관없어. 난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니까.”
그게 더 나쁜 거거든?!
이 녀석이랑 얘기하고 있으면 가끔씩 선과 악의 정의가 헷갈리는 것 같다. 황당해하고 있으려니 이사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소매 끝을 잡았다.
“난 괜찮아, 엘. 라피스 님이 하신 말이 틀린 건 아니니까.”
“어휴, 넌 정말 너무 착해서 문제야. 기분 나쁜 건 그렇다고 말해도 돼. 저렇게 막말하는 녀석 앞에선 예의 차릴 필요 없다고.”
“얼씨구?”
라피스가 두 눈을 부릅떴지만 나는 바로 무시했다. 그것을 본 이사나가 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정말이야. 사실 나도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일이었어. 내가 아는 카웰 형님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었거든. 황실, 특히 선황 폐하의 일이라면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고 내주시려고 하던 분이었어. 만약 형님이 나서줬다면 선황께서 그런 비극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
“흠, 병환 중이라고 했었던가?”
“몇 년째 칩거가 계속되니까 백성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고 들었어. 확인된 건 아니야.”
“그럼 아닐 수도 있다는 거네. 만약 아픈 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인 걸까?”
“모르겠어. 다만 뭔가 문제가 있는 것만은 확실해. 일부러 그러실 분은 아니야.”
“혹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이번에도 찬물을 들이부은 건 라피스였다. 그 순간 이사나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창백해졌다. 내가 노려보자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뻔뻔한 시선을 보냈다.
“뭐가. 몇 년째 소식도 없지, 모습을 본 사람도 없지, 그렇다면 결과는 뻔한 거 아니야? 배신을 했거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지.”
“매, 매해 황실로 보내야 하는 공문들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만.”
“바보냐. 그런 서류들이야 인장만 있으면 되는 건데 누군가 대신 처리했겠지.”
“아닙니다. 정식 외출이 없을 뿐, 필요 비품들을 보충하기 위해 저택을 방문하는 상인들 중에서 형님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었습니다.”
“뭐야, 그럼 배신 쪽이야?”
저러다 심장 마비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라피스의 대꾸가 이어질수록 이사나의 얼굴은 점점 더 파리하게 질려갔다. 말리려고 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말 때문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 그럴 리가…… 설마 형님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쯧, 뭘 모르는구만. 인간의 일에 설마가 어딨어? 얼마나 배신하기 쉬운 생물인데.”
“하지만 형님은 절대…….”
“어떤 일이건 절대란 기준치는 없어. 그게 인간의 일이라면 더더욱. 하긴, 생각해보면 그러네. 살아 있다면 이 녀석이 지금 황성에서 도망쳤다는 것이나, 절 찾고 있다는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을 텐데 칩거를 풀지도 않고 조용하잖아. 대공의 병사들이 영지를 쑤시고 다니고 있는데 그것도 모른 척하고 있는 것 같고.”
“…….”
“뭐야, 이쯤 되면 못 알아차리는 게 오히려 바보 같은데? 어떡하냐, 너? 지금까지 헛걸음한 것 같은데.”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저 녀석의 입을 틀어막자.
나는 한숨을 내쉰 다음 허공 위로 거대한 물 풍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라피스의 머리에 뒤집어씌웠다.
“으읍? 으으으읍!”
갑작스러운 공격(?)에 그는 미처 대항하지도 못하고 버둥거렸다. 바로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정령왕이 만든 것이 완력으로 간단히 풀어질 리가 없었다.
어차피 드래곤이니 그렇게 쉽게 질식하진 않겠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사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는 여전히 굳어진 얼굴로(이번엔 다른 의미로 굳어진 것 같았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도마뱀의 말은 신경 쓰지 마, 이사나. 우선은 공작을 만날 방법을 생각해보자. 모든 건 확인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까.”
“아, 으응. 저기, 근데 엘…… 라피스 님 저렇게 그냥 놔둬도 돼?”
“괜찮아. 물을 좋아한다잖아. 그렇게 좋아하는 물이랑 함께 있는 건데 뭐 어때? 숨이 막혀 죽기밖에 더하겠어?”
“엘…… 왠지 조금 성격이 변한 것 같아.”
후후후, 그야 당연하지. 난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정령이니까. 원래 애들은 주변 환경에 따라 인격이 형성되는 거잖아? 그런 의미에서 내 성격이 더러워지는 건 다 주위 사람들 때문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누가 화기를 지닌 레드 드래곤 아니랄까 봐, 그 많은 양의 물을 단번에 증발시킨 것이다.
“제기랄! 야, 엘! 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자유를 되찾자마자 그는 내게 고성을 질렀다. 실로 유감스러운 기분에 나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쳇, 5분 정도는 버텨줄 줄 알았더니.”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다행히 소란은 금세 수그러졌다.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조심스럽게 이쪽을 살피는 그는 바로 카이테인이었다.
“저, 엘 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아, 네. 들어오세요.”
카이테인이 갑자기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직후 우리는 그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칙사요?”
카이테인의 말에 의하면 한 교단이 국가로 승격을 하게 되면 그 지역의 영주에게 관련 문서를 전해야 하는 규율이 있었다. 그래서 칙사, 즉, 사신의 자격으로 클모어의 영주에게 정식 방문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저도 다음 순례 일정 때문에 곧 떠나야 하는지라 내려가는 김에 그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엘 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사절 일행인 것처럼 위장해서 저택에 들어갈 수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만.”
“헉, 그럼 저야 너무 고맙죠! 정말 그렇게 해도 돼요?”
“물론입니다. 사실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엘 님도 어엿한 엘뤼엔 님의 정식 신관이시니 말입니다.”
빙긋 웃는 그의 뒤로 찬란한 후광이 비쳤다. 혹시 그는 천사로 태어나야 할 걸 인간으로 잘못 태어난 게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정령왕도 잘못 태어나는데 신족이라고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나는 맹렬한 감동에 젖어 그를 바라봤다.
“가 봤자 소용없다니까? 어차피 배신일 게 뻔한데.”
이럴 때 뒤에서 초를 치는 음성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주기로 했다. 카이테인이 천사였다면 저 녀석은 전생에 분명히 마족이었을 거다. 아니, 어쩌면 마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역대 급의 엄청나게 사악한 마왕이었겠지. 저 시커먼 성격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게 틀림없었다.
마신은 뭐 하고 있는 거람? 제 핏줄 좀 얼른 찾아가지 않고.
나는 괜히 속으로 애꿎은 마신을 원망했다. 그동안 너무 선입견이 쌓였나? 아직 만나본 적도 없는 그를 엉뚱한 분풀이 대상으로 삼는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해졌다.
* * *
떠나는 날이 되자 우리는 모든 채비를 마치고 신전을 나섰다. 소식을 접한 신관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이렇게 가시는군요.”
함께 배웅을 나온 대신관이 매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이제 예하의 집입니다. 언제든 마음이 이끄실 때 돌아오십시오. 저희는 항시 예하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처럼 내가 이곳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신관 역시 은연중에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루얀 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돌아가면서 건넨 인사에 이어 카이테인이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했다. 대신관은 섭섭해하면서도 근심이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가면 1년 후에나 다시 보겠군. 이번에 갈 곳은 정해두었는가?”
“아직 확실히 생각해둔 곳은 없습니다. 다니면서 천천히 정할 예정입니다.”
“그렇군. 하긴 그것은 자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허나 어디를 가든 마신의 교단을 주의하게. 지금까진 그들의 태도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으나 이제부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네.”
“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디 몸조심하시게.”
이후에도 대신관은 몇 번이나 그에게 당부를 건넸다. 겉보기에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두 사람은 실제로도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신전에 들어와 함께 유년기를 보낸 사이이기도 했다. 그래선지 대신관이나 카이테인이나 서로 특별히 더 애틋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부디 여러분께 엘뤼엔 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대신관의 축언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몸을 돌렸다. 우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신관들은 그 자리에서 서서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막상 산으로 내려서자마자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사나와 라피스가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