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뭐 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묻자, 그는 나보다 더 찌푸린 얼굴로 못마땅하게 물었다.
“이마에 이거 뭐냐?”
“뭐? 아…….”
이제 보니 신의 문장을 발견한 모양이다. 게다가 이 땅에서 오래 살아온 존재답게, 이것이 뜻하는 의미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신의 문장인데.”
“누가 그런 걸 물었어? 신의 문장인 건 나도 척 보면 알아. 대체 이걸 이마에 받으면 어쩌자는 거야? 눈에 띄려고 작정한 거야? 얼굴에 문장이 있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가 본데……!”
“나도 알아. 대신관이 전부 설명해줬거든.”
“그런데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그럼 이미 받아버린 걸 어떡해? 엘뤼엔 딴엔 신경 써준다고 그런 것 같은데 다시 물리자고 할 수는 없잖아.”
“참 대단한 효자 나셨군.”
효자라는 단어 때문일까?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는 말인데도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아들로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내심 뿌듯하기까지 했다. 라피스도 체념했는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설마 그 꼴로 그냥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겠지.”
“나도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지는 않거든? 걱정하지 않아도 가리고 다닐 거야.”
“뭘 어떻게 가릴 건데?”
“으음, 글쎄, 터번 같은 걸 쓰면 괜찮지 않을까? 정 안 되면 두건이라도 둘러매지 뭐.”
“……네 머리엔 심미안이라는 게 전혀 없는 거냐?”
“딱히 다른 방법이 없잖아. 물감으로 덧칠할 수도 없고.”
“쯧, 기다려 봐.”
가볍게 혀를 찬 뒤 라피스는 한 손을 들어 공중을 휘저었다. 뭐 하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하게 지켜보는 순간, 곧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가 그의 손에 툭 떨어져 내린 것이다.
“……헉? 뭐, 뭐야?”
당황한 내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얼결에 받고 나서 보니 그것은 황금으로 둘러진 둥그런 테에 색색이 화려한 보석들이 수처럼 놓인 장신구였다. 가운데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광채가 얼마나 화려한지 보석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단번에 가치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클렛이라고 하는 거다.”
“서클렛? 갑자기 이게 어디서 난거야? 설마 마법으로 만든 거야?”
“그럴 리가 있냐. 마법이란 게 대단하긴 해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능력은 아니거든? 그냥 아공간에서 꺼내온 것뿐이야.”
“아공간? 그게 뭔데?”
“공간을 강제로 비틀어서 그 틈 안에 다른 작은 공간을 만들어둔 거랄까. 이를테면 나만 알고 나만 열 수 있는 개인 창고인 셈이지. 뭐, 그것도 나 정도 되니까 만들 수 있는 거지만.”
어떤 상황이든 결론이 자기 자랑으로 이어지는 것도 어찌 보면 재주인 것 같다. 내가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튼 한번 써봐. 보아하니 대충 가려질 것 같네.”
“어? 이걸 써보라고?”
“그럼 그냥 구경하라고 줬겠냐? 두건 따위를 두르고 다니는 꼴을 보느니 아까워도 내 수집품을 희생하는 게 나은 것 같아서 주는 거야. 보면 알겠지만 그거 진짜 좋은 거다. 지금으로부터 한 천 년 전인가? 마황국 황실의 보물이었지. 인간들에게는 고대 황금시대의 유산이라고 알려진 모양이다만.”
화, 황금시대의 유산?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저기 라피스…….”
“뭐야, 얼른 써보라니까?”
“유산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거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
“설마 가는 길마다 도둑들 꼬이게 만들 생각은 아니겠지?”
“…….”
언제나 당당하게 대답하던 그도 이번만큼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역시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의도가 좋으면 뭐 하겠는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서클렛을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도로 집어넣어. 상점에라도 들러서 다른 걸 살 테니까.”
“소심하긴.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겨―우? 이 사방에 광채를 흩뿌리는 보석들을 봐! 이게 네 눈엔 그냥 ‘겨우’로 보여? 그렇게 아무렇지 않으면 네가 착용하고 나가보든가. 얼굴보다 보석이 눈에 먼저 들어올걸?”
“알았어, 알았어, 성질은. 그럼 조금 더 기다려 봐. 이것보다 수수한 것도 있던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한 뒤 라피스는 다시 아까처럼 공중으로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뒤적거리던 손은 내가 지칠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아래로 내려왔다.
“자, 이건 어때?”
또 얼마나 엄청난 걸 꺼낼까 싶어 나는 잔뜩 긴장해서 바라봤다. 그러나 그가 이번에 내민 것은 예상외로 상당히 단순한 형태의 서클렛이었다. 은빛으로 둘러진 테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가운데에 푸른색의 보석이 하나 달려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형태는 단순해도 가치가 떨어져 보이진 않았다. 특히 가운데에 박힌 보석이 매우 예뻤다.
보석은 작은 동전 크기만 한 원형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푸른 계열과는 전혀 다른 색을 갖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매우 불투명했고, 새파랗다 못해 짙은 군청색에 더 가까웠다. 언뜻 보기엔 그저 단색인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일부러 박아 넣은 것 같은 황금색의 무늬가 춤을 추듯 섞여 있어 굉장히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게 했다.
별다른 세공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원석을 그대로 사용한 듯싶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돋보이는 것 같았다. 깊이감이 있는 새파란 색깔이 마치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했다. 신기해서 구경하는 내게 라피스가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라피스 라줄리 원석이야.”
“응?”
“이 서클렛에 달린 보석 말이다. ‘라피스 라줄리’라는 보석의 원석이라고. 성공과 번영, 행운을 뜻하고 있지. 지금은 사파이어 때문에 가치가 많이 떨어졌지만 2천 년 전만 해도 꽤 귀한 보석이었어.”
“아, 이게 라피스 라줄리?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심하게 화려하지도 않고 딱 괜찮은데?”
이 정도면 길거리에서 착용하고 다녀도 크게 문제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기꺼이 서클렛을 받으려다 말고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새삼 느끼는 건데 말이지. 레드 드래곤한테 파란색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여주다니, 너희 부모님 엄청 특이한 거 같아.”
“내가 지은 거야.”
“에?”
“내 이름은 내가 지은 거라고. 드래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지어주는 아명 외에 일정 시기가 되면 따로 정식 이름을 받거든. 그때 ‘라피스라즐리’로 해달라고 요청했어.”
“헤에, 그럴 수도 있구나. 원래는 무슨 이름이었는데?”
“사도닉스.”
라피스는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개명 요청을 했단 말을 너무 깊이 생각한 탓일까? 뭔가 엄청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멀쩡한 이름이었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다시 그를 바라봤다.
“잠깐! 사도닉스면 붉은 보석 아니야?”
“맞아.”
“근데 굳이 라피스로 해달라고 했다고? 넌 레드 드래곤인데?”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내 이름인데 어떻게 짓든 내 마음이지.”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굳이 대비되는 색상의 보석을 이름으로 붙일 필요까진 없잖아. 나는 목까지 튀어나오려는 말을 꿀꺽 눌러 삼켰다. 진즉부터 알아봤지만, 라피스 녀석의 변태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게 분명했다.
“그래서 어쩔 거야.”
“응? 뭐가?”
“서클렛 말이야. 받을 거야, 말 거야? 설마 이것도 화려해? 다른 거 찾아봐?”
“아, 아냐. 이건 괜찮은 것 같아. 받을게.”
나는 급히 고개를 흔들며 서클렛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 삼아 조심스럽게 착용해보았다.
“어때? 문장 다 가려져?”
“응, 전혀 안 보이네. 잘 어울려.”
“그래?”
물의 정령왕이 좋은 건 이럴 때 굳이 거울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허공에 물의 장막을 얇게 펼친 다음 그 위에 비치는 모습을 확인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라피스가 말했던 것처럼 서클렛은 신의 문장을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색깔 자체도 머리색과 어울려서 크게 튀는 느낌은 없는 것 같았다.
“고마워, 라피스. 잘 쓸게.”
“마음에 들면 됐어. 근데 그거 알아? 그거 모양은 단순해 보여도 아까 보여줬던 것보다 더 비싼 거다.”
“헉! 정말?”
뜻밖의 사실에 나는 물의 장막을 거두려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고급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이 단순한 형태의 서클렛이 조금 전의 그 화려한 보석덩어리(그렇게밖에 표현이 되지 않았다)보다 더 비싸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거 혹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사기 치는 거 아니야? 불신의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로 진지했다.
“말했잖아. 라피스 라줄리는 상당히 귀한 보석이었다고. 워낙 희귀해서 인간들 사이에선 축복을 내려주는 성스러운 돌로 알려져 있었어. 내가 이걸 구하던 시절은 그런 사상이 극에 달하고 있던 때였지. 다이아몬드보다 더 구하기 어려웠어.”
“그럼 이것도 황실의 보물?”
“아니, 신전의 보물이었지. 아마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마신교 신관들이 제단 위에 장식해둔 것을 몰래 빼돌린 거거든. 그래서 한동안 꽤 시끄러웠어.”
“…….”
네가 진정 미쳤구나. 신의 보물을 훔쳤단 말이냐?
경악한 나는 서클렛을 냉큼 빼서 던지다시피 라피스에게 도로 안겼다. 얼결에 받아 든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왜?”
“왜? 지금 왜라는 말이 나와?! 훔친 보석이면 장물이라는 거잖아! 지금 그걸 나한테 쓰라고 준 거야?”
“어차피 2천 년도 더 된 일이야. 나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데 누가 이걸 알아보겠어?”
“다른 신전도 아니고 마신교라며! 거긴 아직도 건재하잖아! 자료로 남겨뒀으면 누구든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이걸 내가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어떡해? 엘뤼엔의 신관들에게도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고!”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지금의 마신교는 그때의 마신교가 몰락하고 다시 부흥한 거거든. 과거의 자료 따윈 거의 소멸되었을 거다. 또 알아보면 뭐 어때?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이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왜 말이 안 돼?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은 라피스 라줄리가 그리 희귀한 보석이 아니야. 이런 형태의 서클렛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게다가 이게 몇천 년이나 묵은 걸로 보여?”
“그, 그건 아니지만…….”
듣고 보니 전부 맞는 말이라 나는 자신 없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대로 서클렛은 방금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만큼 깨끗했고, 전체적으로 광택까지 흘렀다. 누가 봐도 몇천 년 전의 보물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것 같았다.
가져오자마자 보존 마법을 걸었거든, 의아해하는 내게 라피스가 간단히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어차피 마신교는 한 번 몰락했을 때 대다수의 보물들을 약탈당했어. 이런 서클렛 하나 정도는 티도 안 날 거다. 굳이 찾을 생각도 없을 거고.”
“뭐? 그런 거야?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네가 너무 소심한 거야. 전생에 남자였던 것으로도 모자라서 어지간히도 가난뱅이였던 모양인데, 정령왕 주제에 그런 것 갖고 일일이 벌벌거리지 말라고.”
남의 물건을 훔쳐놓고 당당한 게 더 웃긴 일 아닌가? 아무리 몇천 년 전의 일이라도 훔친 건 훔친 거다. 한국에서도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데! 세월이 깡패라고, 눈앞에 놔두고서도 되찾지 못해 피눈물을 흘리는 일이 더 많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 정말 옳지 않은 일이라고!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묵묵히 서클렛을 받아 들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몰랐다고 잡아떼고 순순히 돌려주면 되겠지, 라는 어느 정도는 태평한 계산도 있었다.
“자, 그럼 다 된 거지?”
“아, 잠깐 기다려.”
다시 서클렛을 끼자 라피스가 불쑥 손으로 그 위를 덮었다. 어리둥절해져서 있으려니 갑자기 주위에서 진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가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았다.
“지금 뭐 한 거야? 마법 쓴 거 맞지?”
“아아, 서클렛을 고정시켰어.”
“고정?”
“덜렁거리다 실수로 흘러내리기라도 하면 곤란할 것 아냐. 그래서 마법으로 떨어지지 않게 해둔 거다. 앞으로 너 외엔 누구도 강제로 서클렛을 벗겨낼 수 없을 거야. 아무렇게나 편하게 행동해도 돼.”
그런 편리한 마법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나는 감탄하기에 앞서 빤히 라피스를 쳐다보았다. 마법 자체의 기능보다는 그가 알아서 선심을 써줬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라피스의 얼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그 시선의 의미는 뭐야?”
“음, 그냥…… 왠지 되게 친절한 것 같아서.”
“뭔 소리야. 난 원래 친절하거든?”
“언제는 부탁받지 않은 일은 안 한다더니.”
“그래서 불만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헤헤 웃으며 이마 부분을 매만졌다. 항상 매끈하던 자리에 딱딱한 금속의 느낌이 닿으니 어색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서클렛도 알아서 먼저 건네준 거였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것저것 챙겨주는 걸 보면 확실히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보기보다 세심한 면도 있는 것 같고 말이다. 단순히 내가 제 물건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한 걸지도 모르지만, 매번 도움을 주니 그가 다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걸 보면 왠지 내가 동료복은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