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그동안 신전에서는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우선 체류하고 있던 일반객들이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구경꾼을 막으려는 취지도 있었지만, 대체로 교황이 탄생한 교단은 신성국가로서 기반이 다져질 때까지 한동안 봉문을 하는 것이 관례라는 것이다. 더불어 혹시 모를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차원이기도 했다.
“전쟁이라니요?”
“아무래도 국가로 인정을 받으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그, 그치만 제국에선 관여하지 않는다면서요.”
“황실의 입장은 그렇습니다. 문제는 마신의 교단이죠.”
“마신의 교단?”
“현 스왈트 제국의 최고신이 바로 마신이니까요. 그들 쪽에선 토벌군을 보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토, 토벌?”
“교단 간 공존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미 이 제국은 마신을 토대로 신성제국이라 칭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영역 안에 또 다른 신성왕국이 들어선 상황이니 조금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요. 기존에 이 땅을 장악하고 있던 신이 새로운 신의 영향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빼앗아 쟁취하거나, 역사에서 사라지는 수밖에 없죠.”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카이테인을 보며 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누가 엘뤼엔의 신관 아니랄까 봐 성격이 지나치게 관조적인 게 상당히 비슷한 것 같았다. 내 표정이 너무 굳어져 있는 탓일까?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왕국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때에도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누군가의 교단이 세워져도 다른 교단의 신전에서 공격하여 무너트리곤 하지요. 반대로 새 교단이 기존 교단을 무너트려서 장악을 하는 경우도 있고요. 때문에 일각에선 이런 식의 분쟁을 신들의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신들의 전쟁이라…… 결국 더 약한 신 쪽이 진다는 거네요.”
“네, 맞습니다.”
“으음, 다른 신이면 몰라도 마신도 상급신이라 분명 만만치 않을 텐데.”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마신의 교단에서 공격을 해오면 방비할 방법은 있나요?”
“현재로선 마땅한 대책은 없습니다.”
“없다니…….”
“엘뤼엔 님의 가호가 임하실 테니 괜찮습니다. 설령 이대로 사라진다고 해도 그 역시 신의 뜻이겠지요.”
“…….”
침착하자, 엘. 설마 엘뤼엔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일을 벌였겠어? 분명 마신을 잠잠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거나.
그러나 엘뤼엔의 성격상 아군보단 적군을 더 많이 만들 것이 뻔해서 그다지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특히 마지막에 했던 경고를 떠올리면 딱히 마신과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아서 더 불안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무리 마신교라고 해도 신이 강림한 교단은 함부로 치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거 아십니까? 지금 산 밑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특이한 일요?”
이어진 카이테인의 설명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엘뤼엔이 강림한 이후 산 전체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들어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만, 엘뤼엔의 사제들에겐 선명하게 신전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고 했다. 즉,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천연의 요새가 된 것이다.
“대천사 나드엘의 강림 이후 두 번째로 일어난 기적이라 클모어 공국 전체가 관련 화제로 크게 들썩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마신의 교단이 강력하다 해도 그 안개를 뚫고 들어올 순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네요.”
“물론이지요. 그러니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예전의 마신교라면 몰라도 근래의 마신교는 이전만큼 강하진 않으니까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신의 교단이 약해졌단 말인가요?”
마신은 무려 4대 차원 중 하나인 마계를 담당하고 있는 상급신이다. 그런 그의 신전이 세가 약해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심지어 몇 년 전엔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신탁까지 내려진 일이 있지 않았던가! 영향력이 커진 만큼 오히려 권세가 더 강해졌어야 정상이었다. 그래선지 카이테인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저도 자세한 일은 알지 못합니다만. 마신의 교단에 내부적인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차기 신관들이 거의 없는 상태거든요.”
“신관이 없다고요?”
“특히 대신관의 자격을 지닌 이가 전무합니다. 몇 년 전부터 마신의 문장이 내려지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눈에 띄지 않는 위치라 하위 신관밖에 되지 못했죠. 그나마도 최근에는 받은 이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하게는 현 대공이 대신관의 자격을 받은 이후부터인 것 같군요.”
그러고 보니 대공이 원래는 마신교의 대신관이라고 했던가? 나는 새삼 기억을 되짚으며 카이테인을 응시했다. 대공을 향해 쓴 표현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황족은 문장이 없어도 그 핏줄 때문에 대신관이 된다고 했는데 굳이 ‘자격을 받았다’라고 지칭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교단으로 보내진 이후라고 말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자 카이테인이 뜻밖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아, 모르셨군요. 대공은 본래 황실에서 자랐다가 뒤늦게 문장을 받아 정식 대신관으로 입적하게 된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신관으로 큰 사례는 아니죠.”
“헉, 그래요?”
“예. 심지어 그는 늦은 나이에 문장을 받았습니다. 유년기를 지나 신관의 문장을 받은 것만 해도 흔치 않은 일인데, 새겨진 위치마저 상당히 높았던지라 상당히 큰 화제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하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군요.”
“흠, 그렇군요.”
“돌아가신 선황께서 태자로 즉위하기 직전의 일이었죠. 그래서 그 시기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자들도 많습니다. 당시 선황과 더불어 가장 유력한 태자 후보였기 때문에 반대파들로부터 숙청을 당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교단으로 가게 된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죠.”
헤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처음 들어보는 제국의 역사에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형제간에 숙청이라니.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골육상잔을 이렇게 직접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미 이사나의 일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는 실감했지만 확실히 왕족들의 세상은 굉장히 냉혹한 세계인 것 같았다.
“당시, 이미 교단에는 태어나자마자 보내진 황족이 있긴 했습니다. 선선대 황제의 막내아들로, 대공과는 이복형제 사이였죠. 그런 와중에 새 황족 출신의 대신관이 들어오게 된 것이라 그들 사이에 상당히 기묘한 구도가 형성되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한쪽은 정식 대신관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황족은 얼마 되지 않아 모종의 사건으로 죽었다고 하더군요.”
“모종의 사건?”
“말을 타고 가다 갑자기 낙마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일 때문에도 대공의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건 그 이후로 차기 신관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죠. 행간에선 대공의 문장이 위조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위조? 그게 가능해요?”
“기본적으론 불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신이 분노하셔서 새 문장을 내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으음, 그게 사실이면 심각한 일 아닌가요?”
“그저 심각한 정도가 아닙니다. 교단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신권을 뿌리째 뒤흔드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현 마신교의 교황이 대공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진 모두 추론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모든 것들 또한 전부 마신이 의도한 일일 수도 있구요.”
결국 직접 물어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한 느낌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감춰진 진실을 읽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가급적 마신과는 상종하지 마라.”
떠나기 전 엘뤼엔이 했던 말이 다시금 귓가에 울렸다. 라피스와도 어울리지 말라고 했으니 그 말 역시 그저 조언 차원에서 건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 다른 원인이 있는 거라면?
“내 말, 반드시 명심해라.”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 * *
라피스가 정신을 차린 건 의식을 잃은 뒤 꼬박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마침 그의 상태를 보려고 다가갔던 나는 아무런 미동 없이 눈만 시뻘겋게 뜨고 있는 그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삼켰다.
“뭐, 뭐야. 언제 깼어?”
당황해서 묻는 말에 그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말 깨어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니지, 어쩌면 잘못 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닐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치유술을 써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던 걸 생각하니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봤다. 그러자 그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곤 내 팔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아하하, 다행히 멀쩡한 것 같네.”
내가 어색하게 웃자 그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일주일이나 의식불명이었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뿐한 모습이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곧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자식은?”
“응? 누구?”
“누구긴. 그 엘뤼엔인지 뭔지 하는 신 말이야.”
드래곤이라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기억을 잃지 않은 듯했다. 단지 의식을 잃은 동안의 시간은 통째로 날아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쓰게 웃으며 그가 알면 기함을 토할 현실을 알려주었다.
“엘뤼엔은 이미 한참 전에 신계로 돌아갔어.”
“뭐? 한참 전이라니?”
“그게 말이지. 너 지금 일주일 만에 깨어나는 거거든.”
“뭐야?”
예상대로 그는 크게 경악했다.
“이 내가 일주일이나 누워 있었다고? 그 망할 신한테 맞은 것 때문에?”
“그 정도로 끝난 걸 감사해. 죽이려는 걸 간신히 말렸다고.”
“젠장, 치사하게 기습을 했기 때문이야! 말해두는데 방심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쉽게 당하진 않거든?”
“그래도 결과가 그리 달라졌을 것 같진 않은데.”
“뭐야,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기분이 상한 듯 두 눈을 부라리는 라피스를 보며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상대가 상대잖아. 상급신을 무슨 수로 이겨? 애초에 그를 화나게 만든 게 문제지. 말해두지만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너의 자업자득이야.”
“내가 뭘?”
“엘뤼엔을 만난 순간부터 계속 시비를 걸었잖아. 오랜만에 만난 건데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하겠어? 그러니 예전에도 계약을 안 해줬지.”
“그것과 이건 전혀 다른 문제야! 게다가 그런 헛소리를 그냥 듣고만 있으란 말이야? 피도 안 섞였으면서 아들은 무슨 아들! 그게 말이 돼?”
“미안한데…… 양자라도 아들은 아들이거든?”
“뭐야, 너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 거야?”
“글쎄.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적어도 너보단 그가 더 나를 생각해준다는 거. 나도 자존심이 있어서 ‘물건’보단 ‘아들’ 취급이 더 좋거든.”
“……물건이라고 하진 않았어.”
그래도 찔리긴 했는지 그는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힐끔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넌 아니라고 해도 네가 날 대하는 태도를 보면 딱 그런 식이야. 완전 소유물 취급이잖아.”
“그럼 내 정령을 내 정령이라고 말도 못 해?”
“나 참,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 봐. 내가 널 내 거라고 하면 넌 기분이 좋겠어?”
“난 상관없는데?”
“헐?”
설마 이런 반응이 돌아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탓에 나는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라피스는 오히려 좋은 생각이라는 듯 신이 난 표정이었다.
“아, 그래. 내 호칭이 마음에 안 들면 너도 날 그렇게 부르면 되겠네. 내 드래곤, 내 것, 원하는 쪽으로 마음대로 써도 돼. 그럼 동등하지?”
“미쳤어? 사람들한테 무슨 오해를 받으라고?”
“뭐 어때서. 오해해 봤자 연인 관계 정도로나 보지 않겠어?”
바로 그게 문제인 거거든?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에 나는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망할 도마뱀은 상황을 전혀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도리어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뻔뻔한 시선에 나는 이를 갈았다.
“내가 전에 했던 얘긴 다 뭐로 들었어?”
“뭐가? 네가 남성체라는 거? 알았다고 했잖아. 누가 뭐래?”
“알긴 뭘 알아! 진짜 이해한 녀석이 사람들의 시선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냐?”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찌 됐건 내가 널 여자로 대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냐?”
“……됐다, 말을 말자.”
변태에겐 약도 소용없다더니, 애초에 이 녀석에게 정상적인 논리를 펼치려고 했던 것 자체가 어리석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여기서 더 머리가 아파지기 전에 이 녀석의 꼴을 내 시야에서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별안간 라피스가 어깨를 붙잡더니 내 몸을 다시 돌려 세웠다. 그러곤 한 손으로 내 턱을 고정한 채 강제로 고개를 들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