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03화 (103/608)

제103화

한 차례 파란 이후 대신관은 곧장 상황을 정리하고 모든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개인 집무실로 장소를 옮겼다. 혹시 말이 새어나갈 것을 대비해 동석인은 이사나와 카이테인, 단 두 사람으로만 한정한 상태였다.

“이분이 라이 님이셨군요. 전혀 몰라 뵈었습니다.”

뒤늦게야 이사나의 정체를 깨달은 카이테인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 모습만 기억하다가 처음으로 실물을 보게 된 데다, 드러난 외형이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 더 놀란 것 같았다.

“실례지만 라이 님은 본래 금발에 벽안을 지니고 계신 게 아니셨습니까?”

“예? 어떻게 그걸…….”

당연히 정체를 모를 거라 생각한 탓인지 이사나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황하는 그에게 나는 얼른 사실을 알려주었다.

“라이, 실은 카이테인 씨는 우리 일을 전부 다 알고 있어.”

“뭐? 저, 정말?”

“전부터 짐작하셨는데 우리를 위해 함구해주기로 하셨어.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아, 아냐. 그랬구나.”

이미 한 번 샴페인 용병단의 일을 경험한 탓인지 이사나는 예상보다 침착했다. 잠시간 머뭇거리던 그는 곧 카이테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에 카이테인 역시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그 속에 담긴 의미만은 충분히 전해졌다.

직후 카이테인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본론이 시작될 차례가 온 것이다.

“어쨌든 엘 님, 짐작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일이 커지게 된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문장을 받은 위치 때문인가요?”

예상대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의 운명은 대개 태어난 지 5년, 즉, 5살 전후로 결정된다. 부모의 신분이 고귀하든 그렇지 않든, 심지어 죄인의 아이라 할지라도 일단 신의 문장을 갖고 태어난 아이는 사제로 칭함을 받으며 신전에서 직위를 부여받는다.

그 외에는 스스로 신관의 길을 갈망하거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신관이 되는 경우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문장을 받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고 설령 받더라도 그 위치가 보이지 않는 쪽인 경우가 태반이라 결코 고위 신관은 될 수 없었다. 그건 엘뤼엔의 교단만이 아니라 모든 교단이 전부 마찬가지였다.

이미 유년기가 지난 사람이 고위직의 문장을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누구나 크게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더 경악스러운 건 문장이 찍힌 위치가 바로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얼굴에 문장이 있다는 건 단지 높은 위치라는 의미 정도가 아니었다. 어느 교단이나 공통적으로 얼굴에 문장을 받은 신관이 탄생하는 경우는 오직 하나, 아주 특별한 조건이 성사될 때뿐이라는 것이다.

“특별한 조건……이라면?”

“그 신을 최고신으로 섬기는 나라가 세워질 때입니다.”

이번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대신관 루얀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온 이후부터(아니, 사실 문장을 받은 그 순간부터) 그는 이상할 정도로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려다 말고 의아해져서 물었다.

“최고신이요? 이 대륙에 엘뤼엔을 최고신으로 섬기는 나라가 있나요?”

“지금까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엘 님이 문장을 받으심으로써 이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신전이 있는 이 산 자체가 하나의 신성왕국이 된 셈이죠.”

“……그게 인정이 된다고요?”

“신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교단들은 대체로 국법을 따르는 편이지만 이런 식으로 신이 강하게 개입한 경우엔 국가에서도 교단의 독립적인 주권을 인정합니다. 특히 이곳 스왈트는 이미 신성제국으로서 교권과 황권이 분리되어 있기도 하고요.”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크아돈처럼 신의 개입이 활발한 땅에선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인간들의 입장에선 언제든 예외를 생각해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종족들의 영역에선 또 그 나름의 규칙이 달리 적용된다고 하니, 여러모로 특이한 세상인 건 틀림없었다.

“으음, 그렇군요. 아무튼 조건이 세워지면 얼굴에 문장을 받는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거죠?”

“사람들이 아닙니다.”

“……?”

“단 한 사람만이 그러한 문장을 지닐 수 있습니다. 모든 신관들과 신성왕국을 다스리는 최고 신관의 직위니까요.”

“그 말은…….”

“즉, 엘 님이 저희의 교황이시라는 겁니다.”

‘엘뤼에엔!’

오늘만 벌써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지 모르겠다. 나는 쓰러지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카이테인의 말에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내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대신관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이 크신 걸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하, 심신을 굳게 하셔야 합니다.”

“……저기, 잠깐만요. 뭔가요, 그 예하라는 말은?”

“교황 폐하이시니 이제부터 정식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도리지요.”

“윽, 그러지 마세요! 일이 좀 꼬인 것 같은데요, 저는 교황이 될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사실 정령왕이 교황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한 일이었다. 종족의 문제를 떠나, 일단 나한테는 성력이라곤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대신관은 단호했다.

“신이 정한 운명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예하께선 이곳 신성왕국의 첫 주인으로서 교황의 길을 걸으셔야만 합니다.”

“그런…….”

“납득하기 힘드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부디 주어진 운명에 빠르게 순응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주의하실 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향후로 예하께서는 사람들 앞에 함부로 모습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이곳을 떠나시는 것도, 멀리 여행을 가시는 것도 허가되지 않습니다.”

“뭐, 뭐라고요? 대체 그런 경우가……!”

날더러 이 외진 신전에 틀어박혀 망부석이 되라는 소린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결심을 굳혔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모든 상황을 상세하게 고백할 작정이었다. 특별히 신경을 써준(비록 그 신경이 조금 많이 지나치긴 했지만) 엘뤼엔이나 교황이 생겼단 사실에 기뻐하는 대신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내 계획을 송두리째 변경할 수는 없었다. 이마의 문장을 반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상황만은 모면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여는 것보다 대신관의 말이 이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사실 그 부분은 예하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는 멀뚱히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표정이 웃겼는지 그가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렇게 작은 교단에선 교황의 역할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특히 첫 번째 교황은 신께서 신성왕국을 세운다는 뜻을 밝힌 초석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더 크지요. 교황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할 때가 오려면 앞으로 몇 세대는 더 지나야 할 겁니다. 그래서 대개 첫 번째 교황은 자유로이 대륙을 돌아다니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교리를 전파하는 일을 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명예직이라는 건가요?”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도 있겠군요. 물론, 그렇다 해도 교황으로서의 권리는 전부 갖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의무 없이 권리만 지닌 속 편한 자리라는 소리였다. 뭐야, 그럼 이렇게 수선을 피울 필요가 전혀 없었던 거잖아? 벼랑 끝에 내몰렸다가 간신히 구제받은 기분이다. 이사나도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인지 연신 웃고 있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눈치를 챘어야 하는 일이었다. 엘뤼엔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날 곤란하게 만들 일을 벌였겠는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조금이나마 그를 원망했던 게 너무 미안했다. 창피한 기분에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내게 대신관은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시든 저희는 예하의 뜻을 존중할 겁니다. 다만 가끔씩 사람을 보내 안부만 전해주십시오. 본교에서 예하의 안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무래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하하, 그, 그럴게요.”

“아, 그리고 가급적 이마의 문장은 가리고 다니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원치 않은 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분쟁이요?”

의아해져서 바라보자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사실 조금 전에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조건이 갖춰진다고 해서 반드시 그 교단에 교황의 운명을 가진 사람이 태어나는 건 아닙니다. 실제 역사상으로도 그리 많지 않죠. 가장 큰 세를 지니고 있으며, 이곳 신성제국 스왈트의 최고신으로 군림하는 마신의 교단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들 역시 첫 선출 때 이후로 한두 명에게만 교황의 문장이 나타났을 뿐, 이후로는 대신관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을 쓰고 있으니까요. 간혹 문장이 없는데도 교황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장이 없는데 교황이 된다고요?”

“상당히 드문 편이긴 합니다만, 황족 출신의 신관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사례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스왈트 황실에서는 태어난 황손 중 한 명을 교단으로 보내 신관으로 자라게 하는 관습이 있거든요. 그 황족은 문장이 없어도 처음부터 대신관의 자격을 부여받습니다. 황족의 핏줄은 그 자체로 마신의 축복을 받았다 여기기 때문이죠. 그런고로 교황 후보의 자격도 지니고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어요. 황손 중에서 교황이 나온 적이 있는데, 그 덕에 황실과 마신교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고요. 그게 그래서 가능한 거였군요.”

내 대답에 루얀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적으로 정식 교황의 문장은 신의 관여가 가장 강하게 이루어질 때 나타납니다. 그만큼 신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뜻이죠. 때문에 같은 교단의 신관들에게는 큰 자부심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겐 괜한 질시를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납치나 암살의 위협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대신관은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도 교황쯤 되면 강한 신력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라 그 능력 자체를 탐하는 자들도 많다는 것이다.

특히 치유 능력을 가진 신관은 평소에도 범행 목표가 되는 일이 잦다고 했다. 그래서 대개 신전을 떠나지 않거나, 불가피하게 장소를 옮겨야 하는 경우엔 신관기사들을 대동하고 다니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은 특이한 케이스가 형벌의 교단―즉, 엘뤼엔의 신관들이었는데, 이들은 치유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홀로 순례를 다녔다. 어릴 때부터 자기 몸 하나쯤은 지킬 만한 무예를 익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황의 경우엔 한 단체를 대표하는 존재인 만큼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관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예하의 문장을 목격한 이들이 많으니 삽시간에 관련 소문이 퍼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예하를 주시하려는 자들도 생길 거라 생각됩니다.”

“으음, 그렇겠네요. 최대한 가리고 다녀봐야겠어요.”

나는 머리칼로 이마를 덮으려는 시도를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문장의 크기가 그리 큰 편은 아니긴 하지만 제대로 가려지기나 할지 모르겠다. 두건이라도 두르고 다녀야 하려나? 정 안 되면 그 방법밖에는 없겠지만 왠지 더 눈에 띌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다 또 얼굴을 전부 가리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건 아닌지. 지난 몇 달간 후드를 덮어쓰고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문제 하나가 해결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기분이었다.

* * *

바로 떠날 예정이었던 계획과는 다르게 우리는 신전에서 며칠 더 머물렀다. 라피스의 의식이 계속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상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그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간간이 그를 들여다보며 치유술을 써주는 걸로 하루의 일과를 보냈다.

그렇다 보니 비상이 걸린 건 일반 신관들이었다.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들은 내내 필요한 것이 없는지 수시로 살피러 오기 바빴다. 그들 입장에선 하늘에서 갑자기 교황이 뚝 떨어진 셈이었으니 아무래도 대하는 것이 어려울 만도 했다.

“예하.”

처음엔 질색하던 단어도 하도 들으니 차츰 포기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적응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떨떠름하게 돌아본 나는 서 있는 사람이 카이테인인 것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 씨, 그냥 엘이라고 부르라니까요.”

“신전 안에선 봐주십시오. 사람들의 눈이 있어서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장난스럽게 웃는 그를 보며 나 역시 피식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라피스 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다른 일행분께선 아직도 깨어나지 않으신 겁니까?”

“네, 저러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도 될 기세네요.”

“미녀요? 실례지만 남자분 아니셨습니까?”

“아하하, 그냥 그런 동화가 있어요.”

“아아, 동화에 빗대신 거였군요. 그런데 그런 내용의 동화가 있었던가요? 전 처음 들어 봤습니다만.”

“그럴 거예요. 굉장히 먼 나라에 있는 동화거든요.”

이곳으로 와서 지구에서의 삶이 그리워질 때가 아주 가끔씩 있는데, 그게 바로 이럴 때다. 겪어온 환경이 워낙 다르다 보니 무심코 던지는 화제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질 않는 것이다. 이젠 익숙해졌지만 즐겨 쓰던 단어는 물론 사소한 농담조차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즐거운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게 학교 친구들과의 단편적인 기억들뿐이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외로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태진이 녀석은 잘 지내려나.’

나는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옛 친구를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그동안엔 주어진 일정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여유를 부릴 정신이 없었는데 한가해지고 보니 자꾸만 잡생각이 드는 것 같았다.

얼른 라피스가 깨어나야 할 텐데. 그의 헛소리를 듣다 보면 우울한 기분도 다시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다른 방식의 정신적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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