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01화 (101/608)

제101화

“빛으로 빚은 것 같은 백금색의 머리칼, 푸른색의 눈동자. 설마…….”

카이테인은 한눈에도 알아볼 정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내가 했던 말이나 그동안의 정황을 통해, 직감적으로 엘뤼엔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 틀림없었다.

“카이테인 수석 사제님! 바로 그자가 신전을 무너트린 범인입니다!”

그때 누군가 눈치 없이 끼어들어 소리쳤다. 조금 전 우리를 추궁했던 바로 그 신관이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대신관이 그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 말이 사실인가?”

“틀림없습니다, 대신관님! 그자가 자신의 입으로 자백한 소리를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참배실이 필요가 없기에 없앴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그것만이 아닙니다! 저희의 참배가 의미가 없다는 둥, 무례한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늘 아래 어찌 저런 자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감히 신성한 터전과 신의 종들을 모욕한 자입니다! 마땅히 그 죄를 치르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는 데 희열을 느낀 것일까.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크게 외치며 주장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엘뤼엔이 시선을 보내는 순간,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기 때문이다.

“컥!”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것처럼 이상한 신음을 뱉기 시작했다.

“큭! 크으윽!”

“에룬 님?”

“에룬! 왜 그러는 건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곁에 있던 신관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그가 그대로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엎드린 그에게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직후 신관 중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상태를 살피더니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주, 죽었습니다.”

“…….”

“…….”

일순 사람들 사이에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멀쩡하던 사람이 별안간 눈앞에서 죽었으니 누구든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입을 꾹 다문 신관들은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구경꾼들 중 몇몇은 그대로 풀썩 주저앉기도 했다. 나는 굳은 얼굴로 엘뤼엔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듯 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게 아냐.”

“그, 그럼?”

“신관이 자신의 근원을 부정했으니 저주를 받은 거다. 경솔함이 스스로 화를 불렀군.”

엘뤼엔은 어리석은 사람을 바라보듯 낮게 혀를 찼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신관들에게 깨달음을 준 듯했다. 그들은 모두 흙빛이 된 얼굴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쐐기를 박는 것처럼 카이테인이 엎드리며 소리쳤다.

“미, 미천한 종 카이테인이 우리의 주인, 전능하신 엘뤼엔 님을 뵙습니다!”

“……!”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대신관 루얀은 물론 다른 신관들 또한 파도처럼 차례로 엎드리기 시작했다. 신력이 낮거나 객으로 온 일반인들은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그들 역시 신관들을 따라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엎드려지는 광경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나는 무심코 덩달아 몸을 굽히려 했다. 그러자 엘뤼엔이 바로 저지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너까지 무릎을 꿇으려는 거냐?”

“아하하, 그, 그러게.”

내가 어색하게 웃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혹시나 내 행동에 질린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분위기에 선동되어 사람들을 따라 하는 정령왕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한심하긴 했다. 그의 입장에선 더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엘뤼엔이 내 머리를 세게 쓰다듬었다. 말이 좋아 쓰다듬는 것이지, 머리를 마구잡이로 내리누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왁! 지금 뭐 하는 거야?”

“엘, 내가 너의 뭐라고 했지?”

“뭐? ……아, 아버지?”

“알면 됐다.”

뭐야, 그게 끝이야?

나는 황당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엘뤼엔은 이미 관심이 떠난 듯 내게서 시선을 돌린 뒤였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가벼워졌다. 왠지 괜스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실실 웃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내 얼굴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분명히 엄청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테니까.

물론 보았다고 해서 그들 중에 날 눈여겨볼 사람이 있을까 싶긴 했다. 그 정도로 좌중은 경직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신경은 온통 엘뤼엔에게만 쏠려 있는 상태였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든 상황을 깨닫고 납작 엎드려 떨고 있었다.

신의 강림. 그것도 이 신전의 진정한 주인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일평생을 통틀어도 겪지 못할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기적 앞에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조차 잇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대신관이 머리에 쓰고 있던 관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두려움과 경이에 찬 얼굴로 크게 절하며 말했다.

“엘뤼엔 님의 첫 번째 종 루얀이 신성하신 분을 뵈옵니다. 감히 우매한 눈으로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 죄를 다스려 주옵소서.”

“죄를 다스려 주옵소서!”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관들이 일제히 합창하듯 소리쳤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사람들의 얼굴엔 체념의 빛이 만연했다.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지든 모두 감내할 작정인 듯했다.

엘뤼엔은 그 모습을 심드렁히 돌아보며 말했다.

“첫 번째 종은 들으라.”

“하, 하명하시옵소서.”

“너희는 내가 명한 일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대신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칠거렸다. 하지만 엘뤼엔은 그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고 곧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이날 이후로 너희는 살아 있는 동안 참배실의 복원을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두 번 다시 나의 계시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무심한 어조에 담긴 내용은 가혹할 정도로 냉정했다.

계시를 받지 못한다는 건 신과 단절하게 된다는 의미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들 모두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신과 소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말이 좋아 단절이지 실제로는 파면이나 다름없는 선언이었다.

“하명, 받드옵니다.”

대신관은 생각보다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참담한 심정은 숨길 수 없었는지 답하는 목소리 끝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주위에선 조금씩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사람들이 울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이런 사달이 벌어지게 될 줄이야.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엘뤼엔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안 돼.”

“그, 그치만 너무하잖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맡긴 일을 수행하지 못했을 땐 그만한 책임도 지는 거다.”

“내가 먼저 잘못한 거야.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일부러 이름도 말하지 않고 엘뤼엔의 손님이라는 것도 밝히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그 또한 애초에 저들이 네가 부담을 느끼게 만든 탓이지.”

“윽, 그렇게 치면 애초에 엘뤼엔이 천사를 보냈기 때문이잖아. 저 사람들이라고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겠어?”

“…….”

그 순간 어떤 말에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엘뤼엔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어라, 혹시 내가 정곡을 찔렀나? 그렇다 해도 설마 엘뤼엔이 당혹감을 드러낼 줄이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보면서도 신기한 기분이었다. 내친김에 나는 좀 더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천사는 왜 보낸 거야? 그냥 넌지시 한두 사람에게만 알려도 되는 일이었잖아. 그랬으면 애초에 사람들이 몰려들 일도 없었고, 이렇게까지 시끄러워지지도 않았을 텐데.”

“어떤 방식이든, 그건 내 마음이다.”

“그래도 너무 눈에 띄었는걸. 나만 해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다고. 손님 하나 온다고 천사까지 보내서 마중을 시키는 신이 몇이나 되겠어? 누가 보면 엘뤼엔이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인 줄 알걸?”

“그게 어떻다는 거지?”

“응?”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그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아하하, 그, 그건 그렇지.”

설마 그가 이렇게 쉽게 긍정할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라니. 뭐야, 그럼 정말 그 모든 것들이 날 생각해서 그런 거란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뒤통수를 거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 더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그대로 불타올라 재가 돼버릴 것 같았다.

사실 지금까지는 자식 자랑하는 부모를 자녀가 꺼려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야 겨우 그들의 심정을 알겠다. 우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해서 몰랐는데 이거 진짜 창피한 기분이잖아? 나는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허둥지둥 화제를 돌렸다.

“으음, 아무튼 엘뤼엔, 조금 전에 한 말은 그냥 취소해주면 안 될까?”

“봐주는 건 한 번뿐이라고 했을 텐데.”

“그건 내 교우 문제잖아. 이번 일은 엄연히 경우가 다르지.”

“그런 억지를…….”

“불쾌한 거 알아.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좀 안 될까? 이렇게 끝나면 나 이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밤에 잠도 못 잘지도 몰라. 죄책감 때문에 계속 시달릴 거라고. 엘뤼엔은 내가 그렇게 돼도 괜찮아?”

“……정말 못 말리겠군.”

“그럼 들어주는 거야?”

엘뤼엔은 잠시간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내 눈을 감고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안 되는 건가. 밀려오는 실망감에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복원.”

그 순간 눈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바닥에 엉망으로 굴러다니던 돌조각들이 공중에 한꺼번에 떠오르더니,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하나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뭉친 조각들은 이내 한 덩어리가 되어 빠른 속도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 스스로 의지를 갖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놀란 건 나만이 아니라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가 입을 벌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멍하니 구경했다.

돌조각은 벽면으로부터 시작해서, 기둥과 바닥, 그리고 장식물들을 하나둘씩 차례로 이루어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어느새 말끔해진 참배실 안에 서 있었다. 도대체 언제 파괴가 된 적이 있었냐는 듯 정교하게 복원된 참배실은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던 광경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치 꿈이라도 꾸고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공간의 복원엔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바로 조금 전, 그는 신관들을 향해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참배실의 복원을 보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선언했던 말을 깨트린 것이다.

“아아, 주인이시여!”

신관들은 감격에 벅차올라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그들 역시 눈앞에서 일어난 기적에 차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오늘의 일은 특별히 불문에 부친다.”

그의 짧은 말에 신관들이 모두 울기 시작했다. 오히려 벌을 내렸을 때보다 더 크게 흐느끼는 것 같았다. 엘뤼엔은 살짝 혀를 차곤 이제 됐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무리 문외한인 나라도 신의 언약이 얼마나 엄격한지 모르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선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번복했다. 고작 내 부탁 하나 때문에.

“……고마워.”

“말해두지만,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다.”

그는 나직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왠지 다음에도 또 다른 마지막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너무 기고만장해진 탓일까? 이러다 괜히 나쁜 버릇이라도 들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본 엘뤼엔이 나직이 혀를 찼다.

“웃지 마라. 나 참, 아들이라곤 하나밖에 없는 녀석이 이렇게 말썽을 피워서야.”

“에헤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엘뤼엔에게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순간 눈을 크게 뜰 수가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었다.

“윽! 엘뤼엔?”

“……쯧.”

그는 난처한 듯 가볍게 혀를 찼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감춰왔던 그의 존재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조차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컥!”

“커흑!”

주위를 가득 채운 신성한 기운에 신관들은 거의 넋을 잃은 것 같았다. 대신관을 비롯하여 카이테인까지 모두 실성한 얼굴로 비명인지 외침인지 알 수가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마치 약에 취한 사람들 같았다.

그나마 그들의 경우는 조금 나았다. 일반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진 채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과 귀에서 피를 쏟으며 그대로 까무러친 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사태가 이런데도 엘뤼엔은 존재감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아니, 거두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빛은 이미 기세를 전환해 역으로 그의 몸을 전부 삼켜가고 있었다. 이제 어디서부터가 빛이고 어디서부터가 그였는지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에, 엘뤼엔?”

“엘, 이리로.”

나는 아연한 심정으로 눈앞에 내밀어진, 그의 손으로 추정되는 빛 덩이를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잡자 평소와 똑같은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덕분에 긴장으로 굳어졌던 기분이 조금 안정되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 것 같다. 이 이상 기운을 갈무리하는 건 무리일 것 같군. 더 지체하면 이곳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거다.”

“윽, 그렇구나. 그럼 얼른 돌아가야겠네.”

“아아, 모처럼 만인데 미안하다.”

그의 사과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서운한 건 사실이지만, 바쁜 와중에 틈을 내어 와준 그에게 투정을 부릴 순 없었으니까. 그런 기분이 전해진 건지 엘뤼엔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본래 용건은 따로 있었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엘뤼엔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익숙지 않은 열기가 미간 위의 피부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이마를 짚었다.

“뭐, 뭐야?”

“이번 유희에 필요한 것. 이게 필요해서 날 만나려고 했던 것 아니었나?”

“응? 아! 설마 신의 문장?”

그러고 보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곳에 온 가장 중요한 용건이었는데 말이다. 십년감수한 기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엘뤼엔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제부턴 그 문장을 통해 나와 언제든 대화할 수 있을 거다.”

“우와, 정말? 어떻게?”

“나와 연결된 일종의 개별 통로가 생긴 거라 보면 된다. 신의 문장은 신전의 참배실과 동일한 역할을 하거든. 신관이 개인적으로 신탁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 그래서 정식 신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신전이라고도 불린다.”

“헤에, 그렇구나.”

“개인적으론 아들이 내 사제가 되니 기분이 좀 이상하군. 아마 신에게 문장을 달라고 하는 정령왕은 너밖에 없을 거다.”

“왜? 서로 연락이 편해지면 좋은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 점이 너답긴 하군.”

엘뤼엔은 다시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왠지 바보 취급을 당한 것 같은데, 그저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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