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에, 엘…… 나…… 숨을 못 쉬겠…….”
“뭐? 숨을 못 쉬겠다고?”
내가 부축하자 이사나는 천천히 기대어 오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온몸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자 뒤쪽에서 엘뤼엔이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육체가 내 기운을 견디지 못하는 거다. 최대한 자제한 건데도 영향을 받는군.”
“어? 그, 그럼 어떡해?”
“기다려 봐라.”
짧게 답한 후 엘뤼엔은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한층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꺼질 듯 사그라지던 이사나의 호흡이 단번에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흡! 허억, 허억!”
“이사나! 괜찮아?”
내 질문에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사실인지 창백하던 안색에 점차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발작하는 것처럼 떨던 몸도 차츰 진정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보며 안도하는 내게 엘뤼엔의 말이 이어졌다.
“임시적인 방편일 뿐, 이 상태가 그리 오래가진 않을 거다. 아무래도 용건을 서두르는 게 좋겠군.”
“으음, 그럼 금방 헤어져야겠네.”
“어차피 내게 주어진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뭐야, 요즘도 그렇게 바빠?”
장장 몇 개월 만에야 보는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빠른 작별을 아쉬워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우울해졌다. 나도 모르게 그런 기색을 내비쳤나 보다. 잠시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가 곧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 신은 지상에 오래 존재하지 못해. 정령왕들이 지상에서 능력의 제한을 받는 것처럼, 신들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나마 인가(認可)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내려올 수 있는 장소도 신전뿐이지.”
“헉, 그, 그런 거야?”
“인간의 나약한 육체에 정제되지 않은 신의 기운은 치명적이니까. 다른 곳에서 이 기운을 정면으로 받게 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을 거다. 그래서 내가 널 여기로 부른 거고.”
“헤에, 그렇구나.”
설마 그런 깊은 뜻이 있었을 줄이야.
그제야 나는 모든 상황을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굳이 이곳까지 찾아오게 한 건가 했더니 그는 처음부터 직접 내려와 날 만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사실이 왠지 기뻤다. 그사이 대충 몸을 추슬렀는지 벌떡 일어난 라피스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뭘 화기애애하게 속닥거리고 있는 거야! 넌 네 계약자가 다쳤는데 걱정도 안 하냐?”
“멀쩡해 보이는구만, 뭘.”
“장난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을 줄 알아!”
이 녀석은 아무래도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모양이다. 귓가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크게 찡그렸다. 방금 전 피를 토한 사람인 게 맞기는 한 건지, 오히려 다른 때보다 힘이 더 펄펄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엘뤼엔이 싸늘한 표정으로 라피스를 응시했다.
“너야말로 엘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다음엔 경고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하! 나도 이번엔 순순히 당해줄 생각 없거든? 방금 전엔 방심해서 당한 거라고! 그리고 내가 엘을 어떻게 대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설마 보호자 행세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렇다면?”
“별로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닌데? 그저 친분이 있는 사이치곤 간섭이 좀 지나친 것 아냐?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남의 것에 눈독을 들이면 곤란하지.”
“……남의 것?”
“그래, 남의 것. 사태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어제부로 이 녀석은 내 소유가 됐거든.”
‘누구 마음대로!’
너무 기가 막히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나 보다. 황당한 나머지 나는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엘뤼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엘을 소유했다, 지금 그렇게 말한 건가?”
“그래.”
“그건 엘도 동의한 일이냐?”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뻔뻔한 대꾸에 엘뤼엔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빛도 더 살벌해진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 방정맞은 입이 언제고 사고를 칠 줄은 알았지만 설마 엘뤼엔 앞에서 이런 사달이 벌어질 줄이야. 창피하다 못해 쥐구멍에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흥, 저 녀석의 의사 따윈 상관없어. 계약을 했으면 얘기는 다 끝난 거지.”
“……네 멍청한 발언을 들으니 기분이 굉장히 나쁘군.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너 같은 녀석이 있었지. 고집과 오기밖에 안 남은 주제에 세상의 중심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벽창호 같은 도마뱀 말이다.”
“그거 잘됐군.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을 했거든.”
“본인이 벽창호라는 사실에 동의를 하는 모양이지?”
“……그래, 그 재수 없는 말투. 오래전 날 짜증나게 했던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게, 어째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
지금 서로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나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두 남자의 대립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엘뤼엔을 똑바로 응시하던 라피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빠르게 굳어가는 표정을 보고 나는 직감적으로 상황을 눈치챘다. 드디어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뭐야. 너, 이제 보니 그 얼굴…….”
“뭐지?”
“왜 네가 엘퀴네스와 똑같은 얼굴을 갖고 있어?”
경악하며 외친 소리에 엘뤼엔은 다시금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네 눈은 장식으로 달렸나? 나의 어디가 엘과 똑같은 얼굴이라는 거냐?”
“제기랄! 그 엘퀴네스 말고! 엘 전대의 엘퀴네스 말이다!”
“…….”
“맞아! 틀림없어! 그 오만한 표정! 기분 나쁠 정도로 예쁘장한 얼굴! 머리색과 눈동자색만 빼고 전부 다 똑같잖아! 뭐야, 이걸 왜 지금에서야 깨달았지? 너 설마 전대의 엘퀴네스냐? 하하, 말도 안 돼! 그런 거 아니지?”
“……그래, 이제 알겠군. 네가 바로 그 녀석이었나.”
그리고 엘뤼엔 역시 그의 정체를 깨달은 듯했다. 한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에 노골적이다시피 짙은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엘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그런 일이 있었나 했지. 얼굴을 보니 분명히 알겠군. 그래, 확실히 그런 얼굴이었지.”
“뭐, 뭐?”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덕분에 생각났다, 도마뱀. 멍청할 정도로 한심한 행동은 지금도 여전하군.”
“…….”
직접적으로 정체를 밝힌 건 아니었지만 그와 다름없는 발언이었다. 그에 잠시간 굳어 있던 라피스가 휙 소리가 나도록 내게 고개를 돌렸다. 뚫어지게 노려보는 눈빛은 현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만나보면 알 거라고 했잖아.”
“……이게 그냥 그렇게만 말하고 말 일이야? 젠장, 대체 뭐 이런 경우가…….”
라피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정령왕이 신으로 환생한다는 사실은 바로 얼마 전까지 정령계에서조차 알지 못했던 일이다.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엘뤼엔은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애초에 그를 정말로 기억한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라피스를 바라봤다.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도무지 짐작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물의 정령왕과 계약하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곤 하지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바라만 보던 존재였다. 끊어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진 지금,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마치 예고편이 없는 드라마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남자와 남자라는 점에서 막장 드라마 같긴 하지만…….’
그러나 잠시 후 라피스의 입에서 나온 건 내 기대(?)와는 사뭇 다르게 전혀 엉뚱한 말이었다.
“잠깐, 이거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전대가 네 일에 관여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설명해봐.”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신으로 태어났건 어쨌건 저 녀석은 이미 엘퀴네스의 임기가 끝났잖아. 왜 지금의 너한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냐는 말이다. 너 설마 저 녀석이 시키는 대로 정령계의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아, 아냐. 내 쪽에서 조언을 구할 때도 있긴 하지만 그게 아니면 엘뤼엔은 기본적으로 정령계의 일엔 관여하지 않아.”
“흥, 지금이야 그렇지만 속내가 어떨지 어떻게 알겠어? 너 정신 단단히 차려. 그렇게 어리바리하게 있다가 정령계를 저 녀석에게 홀랑 내어 바치는 수가 있다고.”
어라? 이, 이게 아닌데?
시큰둥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조언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로맨스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반가워하는 광경은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원수를 만난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닌가? 당연히 엘뤼엔의 표정은 더 싸늘해졌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나, 도마뱀?”
“그야 매우 잘 알지. 신들이 호시탐탐 이 세계의 장악을 노리고 있다는 거 말이야. 하지만 정령왕들의 눈치를 보느라 뜻대로 하지 못해서 상당히 불만이 많다고 하던가?”
“어디서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주워들은 모양이군.”
“딱 잘라 아니라곤 못 할걸? 네 입장에선 상당히 안타깝겠어. 한때는 정령왕이었는데 이젠 전세가 바뀌어 이런 초라한 신전이나 지키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지. 그래서 정령왕 하나 잘 구워삶아 마음대로 해볼 생각인 거 아냐?”
‘맙소사.’
다른 신도 아니고 엘뤼엔더러 전세가 바뀌었다니. 상급신이라고 친히 일러준 얘기는 그새 전부 다 까먹은 건가?
나는 황망한 심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 건지 전혀 깨닫지 못한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 옆에서 이사나가 ‘정말 그런 거야?’ 하는 얼굴로 경악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더 머리가 아파왔다.
물론 라피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언젠가 트로웰이 불만을 내비친 적이 있을 만큼, 아크아돈은 수많은 신들이 관여하고 싶어 하며 탐을 내는 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하위급의 신들에 한정될 뿐, 상급신은 전혀 경우가 달랐다.
상급신이 상급신인 이유는 그 존재 자체가 다른 자들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각기 주 관할 차원이 주어지며, 그 세계의 유일신으로 군림했다.
신계가 그저 주 거주지일 뿐 다스리는 영역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 정령계는 역시 스쳐 지나간 고향땅일 뿐 탐나는 대상은 아니었다. 사실 맡고 있는 차원만으로도 방대한 양의 일거리가 쏟아지는데 굳이 다른 차원을 장악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지금도 엄청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엘뤼엔의 입장에선 충분히 어이없을 수밖에 없는 오해였다. 그러나 당장 응징을 가할 것이란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을 뿐이었다.
“유치해서 도무지 상대해줄 수가 없군.”
“뭐야?”
“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런 녀석은 곁에 두지 마라. 전염이 될까 두려울 정도로 멍청한 것 같으니 말이다.”
“아하하…….”
설마 갑자기 관대해졌을 리는 없고, 대체 왜 화를 내지 않는 거지? 지금쯤이면 주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잠잠한 모습을 보니 오히려 더 불안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나 하나뿐이었는지 라피스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는 착실하게 엘뤼엔을 도발하고 있었다.
“찔리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지그래? 애써 아닌 척해봤자 비참해 보이기만 할 뿐이거든. 게다가 아까부터 곁에 두라 마라, 뭘 당연한 듯이 참견하는 거야?”
“왜, 그게 불만인가?”
“당연한 거 아냐? 대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자격이야 충분하지. 아버지가 아들이 잘못된 길에 들지 못하도록 조언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뭐, 뭐? 아버지라니? 누가 누구의?”
예고도 없이 내뱉어진 부자 선언엔 나조차 당황했다. 설마 그가 타인 앞에서 이렇게 대대적으로 공개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라피스는 놀라다 못해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경청만 하던 이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엘뤼엔은 오히려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엘의 아버지다.”
“뭐?”
“귓구멍이 막혔나? 엘이 내 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신과 정령 사이에 혈연관계가 가능하다고?”
황당해하는 그에게 엘뤼엔은 평온한 어조로 다시 답했다.
“물론 직접적인 혈연은 아니다. 하지만 피보다 더 짙은 인연이지.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하! 뭐야, 결국 양자라는 소리잖아?”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당연하지! 그게 뭐가 아버지와 아들이야?”
라피스는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입매를 비튼 채 비아냥거렸다.
“무슨 속셈인지는 알겠어. 저 녀석이 전생에 인간이었다고 하니까 인간 흉내를 내서 환심이라도 살 생각이었겠지. 홀랑 넘어오게 한 다음에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말이야. 하지만 뭐든 적당히 해야지. 이건 너무 허무맹랑한 주장이잖아. 애초에 신이 정령을 양자로 들인다는 게 말이 돼? 그런 관계가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남의 인정 따윈 상관없다.”
“상관이 없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겠지. 네 주장이야 어쨌건 그게 바로 현실이니까.”
“현실이라…….”
“뭐야, 설마 진심이었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소용없어.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거든.”
“…….”
“어차피 전부 ‘가짜’인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