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98화 (98/608)

제98화

당황한 신관만큼이나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설마 카이테인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이야. 아무래도 그 역시 우리와 비슷한 시간대에 출발했던 모양이다.

“글쎄, 그렇대도? 지금 대신관님과 대화 중이신 것 같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손님들을 마중해야지! 자네도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오시게!”

“아, 저기, 저어…….”

신관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허둥거렸다. 당장 뛰어가고 싶은 것을 손님인 우리를 생각해 간신히 자제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풋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가보셔도 돼요.”

“예? 그,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참배만 드리러 온걸요. 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 말에 신관은 구원이라도 받은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우리를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배려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미사에 참석하고 싶으시면 근처에 있는 아무 신관이나 수련 사제들을 붙잡고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대강당으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말을 마친 즉시 그는 몸을 돌려 달려나갔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신관들도 모두 그쪽으로 간 듯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간 빠르게 멀어지는 신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라피스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근데 저 녀석들이 말하는 손님이란 게 너희들 아니냐?”

“……맞아.”

“나중에 알면 땅을 치겠군.”

그의 단조로운 평가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대하고 있는 신관들이나 카이테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와 중간에 헤어지게 된 건 하늘이 내려준 안배나 다름없었다. 하마터면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될 뻔했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나는 참배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용건을 마치기 전까지 누구도 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여러 번 확인 작업까지 마친 다음 몸을 돌리자 그제야 실내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부에는 대체적으로 별다른 장식이 없이 오직 제단을 쌓은 단상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불쑥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마치 큰 전투를 앞둔 군인처럼 비장한 기분이었다.

‘……자, 이제 어떤 식으로 기도를 한다?’

단상 위 제단 안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저 마구잡이로 돌을 쌓아 놓은 듯 평범하고 단출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라피스가 눈치 없이 나를 재촉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문장 달라고 해.”

“……거참, 좀 기다려 봐. 나한테도 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하거든?”

“친한 사이라며. 뭘 마음의 준비까지 필요해?”

“이 형님께는 네가 모르는 깊은 사정이란 게 있어.”

“얼씨구?”

황당한 표정을 짓는 그를 무시하며 나는 다시 심호흡했다. 머릿속에선 온갖 문장과 단어들이 얽히고설킨 채 맴돌고 있었다. 내내 이날을 기다려왔지만 막상 현실이 되고 나니 어디서부터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잘 갈피가 서지 않았다.

‘음, 그러니까…… 일단 사과부터 하는 게 맞겠지?’

이 세계에서 신관 사칭은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중범죄다. 아무리 친분이 있는 사이라지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일부터 벌인 건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다(물론 양해를 구할 시간도 없긴 했지만). 하다못해 엘뤼엔이 내색을 비치기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불안하진 않을 텐데,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으니 마냥 찝찝한 기분이었다. 이런 내 심정을 알 리가 없는 라피스는 그저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적당히 하고 시작하지? 여기서 날이라도 새울 작정이야?”

“알았으니까 재촉 좀 하지 마.”

“쯧, 문장 하나 달라는 부탁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아무튼 정령왕이 저렇게 소심해서야…….”

“자꾸 그러면 진짜 날 새워버린다?”

“쳇, 알았어. 얌전히 기다리면 되잖아.”

협박을 듣고 나서야 그는 툴툴거리며 얌전히 물러섰다. 그러곤 괜히 심술이 났는지 옆에서 열심히 구경 중인 이사나에게 대뜸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어? 이 안에 볼 게 뭐가 있다고.”

“네? 아, 그냥 신기해서요. 아주 어릴 때 빼고는 신전에 와본 게 처음이거든요. 그때도 느꼈지만 이 안에 들어오면 정말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 같아요. 라피스 님은 그렇지 않으신가요?”

“경건은 무슨. 어디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있어야 말이지. 판자촌에 들어가도 이것보단 형편이 나을 거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군.”

“라, 라피스 님. 참배실 안에서는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신이 들으신다고요.”

“흥, 들어 봤자 지가 어쩔 거야?”

이사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마뱀은 당당했다. 드래곤 일족이 다 저런 건지, 저 녀석이 유달리 특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이란 존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러다 진짜 벼락을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금 재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뜻밖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컴컴했던 제단 위에 한 줄기 선명한 빛이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반짝이는 햇살이 마치 물웅덩이처럼 제단 안에 고여 넘실거렸다.

‘갑자기 어디서 빛이…….’

당황스러운 기분에 나는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위쪽 어디에서도 햇빛이 들어올 만한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전부 두꺼운 벽에 막혀 있었고, 그 흔한 창문조차 달리지 않은 구조였다.

상식적으로 저렇게 밝은 빛이 지붕을 투과해서 들어온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넘칠 듯이 흐르는 빛 웅덩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어떤 싸가지 없는 녀석이 감히 내 신전이 초라하다는 예쁜 말을 지껄이는 걸까.”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치켜뜬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이 내비치는 제단 위, 한 남자가 느긋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시린 얼음을 담은 것처럼 옅은 푸른색의 눈동자, 발끝까지 흐르는 백금색의 머리칼이 마치 햇살 그 자체인 것처럼 선연히 빛나고 있었다.

“……에, 엘뤼엔?”

“뭐?!”

비명과도 같은 내 외침에 이사나와 라피스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못했다. 지금 내가 선 채로 꿈을 꾸는 건가 싶을 정도로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엘뤼엔이 지상에 직접 나타날 줄이야! 반가운 것도 반가운 거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이곳 세계에서는 말 그대로 신의 강림인 셈이 아닌가!

그러나 이 엄청난 사태에 경악한 나와는 다르게 엘뤼엔은 여느 때의 무표정한 얼굴로 내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 상태가 계속되었더라면 나는 너무 피곤한 탓에 환각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렇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는지 그가 불쑥 한쪽 팔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와, 엘.”

“어, 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할 거냐?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저건 설마 달려와서 안기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힐끔 눈치를 살피자 그가 어서 오라는 듯 내민 손을 까닥거렸다. 당당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에선 그 언젠가 멋대로 아들 선언을 했을 때만큼이나 독재자의 풍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익숙한 태도에 오히려 안정감을 찾은 건지, 그제야 당혹감이 걷히고 차츰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엘뤼엔은 묵묵히 팔을 내밀고 있는 채였다.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제대로’ 인사할 때까지 내내 그러고 있을 작정인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은 다음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성의를 생각해서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내 팔을 강하게 붙잡아 걸음을 멈추게 했다. 굳어 있는 얼굴의 라피스였다.

“가긴 어딜 가! 저 녀석은 대체 뭐야?”

머리색이 달라진 탓일까? 그는 엘뤼엔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혀를 차며 그의 팔을 뿌리쳤다.

“누구긴. 방금 엘뤼엔이라고 말했잖아.”

“엘뤼엔? 저 녀석이 형벌의 신 엘뤼엔이라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믿어지지 않는지 뚫어지게 응시하는 얼굴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을 본 엘뤼엔이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예의를 수프에 말아먹은 녀석이군. 엘, 언제부터 저런 무례한 도마뱀을 데리고 다닌 거냐?”

“어? 누군지 알겠어?”

나는 그가 라피스를 알아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엘뤼엔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글쎄, 내가 알아야 하는 녀석이냐?”

“어?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긴 한데…….”

“그럼 모른다.”

“그, 그래? 그런데 드래곤인 건 어떻게 알았어?”

“신의 눈에는 언제나 본질만이 보이지. 꽤나 더럽게 생긴 붉은색 도마뱀이로군.”

누가 독설가 아니랄까 봐 일말의 배려도 담기지 않은 가차 없는 평가였다. 한순간에 더럽게 생긴 도마뱀이 된 라피스는 당연히 광분했다.

“뭐야?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얼굴이 더러우면 성격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라니, 쯧. 엘, 이런 참견은 기분 상할지 모르겠지만 가급적 어울리는 종자는 구분하도록 해라. 뭐, 저런 것 때문에 네 격이 떨어지지는 않을 테지만.”

“아하하…….”

왠지 정령왕 시절일 때의 그와 라피스의 모습이 어땠을지 한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분명히 그때도 어마어마한 독설을 쏟아 부었겠지. 그런데 심지어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이 순간만큼은 라피스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너 지금 말 다했냐? 애송이 신 따위가!”

“애송이? 나한테 하는 말이냐?”

“그럼 여기에 너 말고 애송이 신이 누가 있는데? 태어난 지 이제 삼십 년은 되셨나? 드래곤으로 치면 알 속에서 한창 헤엄이나 치고 있을 시기지. 그런 걸 두고 애송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겠어?”

“흐응, 재밌군.”

“뭐라고?”

“거기서 한마디만 더해 봐. 한번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릴 것 같으니.”

노골적인 도발에도 엘뤼엔은 무심히 반응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그가 두 번의 경고는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라피스는 용감했다.

“흥! 누가 해보라면 못 할 줄 알아? 이 애송이……!”

‘저 바보!’

기겁하며 돌아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콰앙! 하는 거대한 소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어느새 라피스의 몸이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나는 그가 날아가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라피스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구부려진 그의 몸 위로 갈라진 벽의 잔해가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방금 전에 받은 충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선명히 알 수 있었다.

“큽! 쿨럭, 쿨럭!”

멀쩡해 보인 것도 잠시간, 그는 이내 엎드린 채 울컥 피를 쏟아냈다. 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핏물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단번에 질린 나와는 다르게 엘뤼엔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유롭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제단에 걸터앉은 몸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다만 조금 전보다 기분이 더 나빠 보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 말을 귓구멍으로 처 듣는 놈들이 없군.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 굳이 내가 수고를 하게 만들거든.”

“큭! 너…….”

“멍청한 녀석은 몸이 고생을 한다고 하지. 엘, 저 녀석과는 인연을 끊는 게 좋겠다. 내버려뒀다간 널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 녀석이야.”

“아하하…….”

설마 이것도 경고인 건 아니겠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다른 때라면 그의 말에 적극 동감했을 테지만 처절하게 밟힌 라피스를 보니 왠지 그러마고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두고두고 후환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뭔가 허전한 기분이…….’

내가 여기서 잊고 있는 게 있었던가? 잠시간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곧 그 원인을 깨달았다. 당연히 느껴져야 할 이사나의 기척이 이상하리만치 잠잠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의 모습은 근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심하는 대신 얼굴을 굳혀야 했다. 그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온몸을 둥그렇게 만 자세로 구석에 바짝 붙어 있는 상태였다. 마치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작은 동물 같았다.

“이사나?”

라피스가 피를 토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걸까? 당황해서 말을 걸자 그가 허옇게 질린 안색으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새파래진 입술이 냉동고에 들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왜 그래, 이사나! 어디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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