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자, 똑바로 봐. 뜨겁지?”
이사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불꽃을 주먹으로 움켜쥐고는 이사나의 가슴 위에 대었다. 동시에 불꽃의 열기가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 듯 파고들었다. 마치 거대한 불덩어리에 휩싸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러자 급히 숨을 몰아쉰 이사나가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방금 자신이 겪은 일에 혼비백산한 얼굴이었다.
“어때?”
“……굉장히 따뜻해요.”
“좋아, 암시가 풀렸군.”
라피스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거뒀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백지장 같았던 이사나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위험 수준까지 떨어졌던 체온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나는 감탄하며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모습이 엄청나게 위대하게 느껴졌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뭐? 아아, 불꽃은 그냥 암시를 풀기 위한 눈속임 용도고, 실제로는 보온 마법을 건 것뿐이야.”
“보온 마법?”
“말 그대로 적정 온도를 유지시켜주는 마법이지. 이제 어지간하면 추위는 느끼지 않을 거다.”
“뭐야,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좀 걸어주지.”
“유감이지만 난 부탁받지 않은 일은 안 하거든.”
“……너 잘났다.”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자 라피스는 흐뭇하게 웃었다. 뻔뻔함이 도에 지나치다 못해 이젠 비꼬는 소리조차 칭찬으로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앞으로는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하라고. 이사나, 너한테 하는 말이다. 정령왕이 보모인 줄 알아? 언제까지 엘이 널 챙기게 만들 생각이야? 황제랍시고 어릴 때부터 떠받들어져 키워져서 누가 옆에서 알아서 챙겨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나 본데, 어리광은 여기까지야. 알았어?”
“죄, 죄송합니다.”
라피스의 말에 이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발끈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왜 이사나한테 시비야? 그냥 내가 좋아서 챙기는 건데. 그리고 알아서 챙겨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참을성이 많은 것뿐이거든? 이런 건 오히려 어른스럽다고 하는 거라고.”
“뭐야, 지금 내 앞에서 저 녀석 편을 드는 거야?”
“편을 드는 게 아니라…….”
“흥, 넌 저 녀석한테 하는 반의반이라도 날 챙겨 봐. 같은 계약자인데 너무 차별이 심한 거 아니야?”
어린애처럼 툴툴거리는 라피스를 보며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저게 나보다 수천 배는 더 살았다는 존재가 할 소린가?
대체 누가 누구더러 어리광이라는 건지. 역시 저 녀석은 단어의 뜻을 반대로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 * *
우리가 산 정상에 도착한 건 이튿날 이른 아침이었다. 전날 아침에 출발했으니 말 그대로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었다.
아무리 이사나의 체력을 고려해서 수시로 휴식을 취했다고는 하나 설마 산에서 밤까지 새우게 될 줄은 몰랐기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는 기분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다행히 보온 마법이란 게 효과가 좋기는 한 모양인지 한밤중 모진 바람 속에서도 이사나는 기침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체온이 높을 정도였다.
도착한 정상 위에는 널따란 고원이 펼쳐져 있었다. 갈대숲처럼 늘어진 수많은 식물들이 눈 속에서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들 사이로 흩어지는 얼음 알갱이들이 수정 구슬처럼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위에 새하얀 신전이 찬란한 태양 빛을 받으며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헤에, 드디어 도착인가?”
이렇게 외진 장소, 게다가 사람이 오르기 쉽지 않은 장소에 건물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신전의 모습은 상당히 신비롭게 보였다. 게다가 일반적인 건축물들과는 다른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도 있었다. 잠시간 살펴본 끝에 나는 그 원인을 찾아냈다. 마치 통째로 깎아낸 듯 구조물들 사이에 이음새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벽면 자체도 페인트를 칠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하얀색인 재질로 이뤄진 것 같았다. 비단 종교적인 감상이 아니더라도 경이로운 기분이었다.
그러나 원치 않은 강행군에 산에서 밤을 새웠다는 불쾌감으로 온통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라피스의 경우엔 의견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신전을 보자마자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무슨 놈의 신전을 이딴 곳에 박아둔 거야? 취미도 더럽게 나쁜 신 같으니. 게다가 신전의 규모가 저게 뭐야? 하긴, 생긴 지도 얼마 안 된 애송이 신의 신전 따위에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군.”
“그래도 상당히 멋진걸요. 설원에 세워진 얼음성 같아요.”
“뭐? 네 눈엔 저게 멋져 보여? 다른 신전을 가 봐. 마신의 가장 작은 신전도 저것보다는 클걸?”
“으음, 확실히 마신전에 비하면 소박한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흥, 소박한 게 아니라 초라한 거겠지.”
과감한 혹평에 이사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신전 앞에서 신을 모욕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저러다 벼락 맞는 거 아니야?’
나는 불안감에 휩싸여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엘뤼엔이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신전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모두 새하얀 법의를 입은 것을 보니 아마 이곳에 거주하는 신관들인 듯했다. 그들은 멀찍이서 우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척박한 외지에 이른 아침부터 손님이 찾아왔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잠시 후 그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신관이 급히 달려나왔다. 그는 가슴 부위에 손가락으로 한 바퀴 별을 그리더니(아마 성호인 것 같았다) 공손하게 말을 걸어왔다.
“여러분께 엘뤼엔 님의 가호가 임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엘뤼엔 님의 작은 종 세이렌이라 합니다. 실례지만 이곳엔 어떤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아, 안녕하세요. 엘뤼엔 님께 기도를 드리려고요.”
“그러시군요. 혹시 사제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무심코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치유의 성력이 필요하냐고 묻는 거야. 즉, 우리 중에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거지. 보통 신전의 방문 목적은 치료와 축언을 받기 위해서니까.”
“아, 그렇구나. 아뇨, 저희는 그냥 기도만 드릴 거예요.”
“그러시군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참배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말과 함께 신관은 먼저 걸음을 떼었다. 우리는 앞서 걷는 그를 따라 천천히 신전 안쪽으로 이동하며 주위를 구경했다.
가까이에서 본 신전은 멀찍이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보통 아무 무늬가 없는 흰 벽은 밋밋해 보이기 마련인데,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느낌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낼 뿐 아니라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정화시켜주는 것 같았다. 심지어 건물 전체에 은은한 광채마저 나고 있는 듯했다.
예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건물을 본 적이 있다. 신계에 있는 엘뤼엔의 궁처, 바로 그곳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비록 거기에 비해서는 훨씬 작고 단순한 구조이긴 했지만, 재질만은 같은 것을 사용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이 신전을 만든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
‘하긴, 이런 산 위에 인간의 힘으로 신전을 세웠을 리가 없지.’
만약 한국에서 이런 건물이 발견됐다면 전 세계 언론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사실이 여기서는 크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닌 듯했다. 원래 신전은 신이 직접 세운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관들은 신전의 위치를 고를 필요도, 돈을 들여 지을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아무리 강력한 제국이라도 신전을 함부로 허물거나 주인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했다. 자기 땅에 멋대로 신전이 세워져도 그냥 묵묵히 받아들이고 신관들에게 양보해야 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 어느 곳보다 신의 개입이 강력한 세상이다 보니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신전 안에는 신관을 제외하고도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부터 후줄근한 복장을 한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 있었다. 그들은 새로 등장한 우리에게 잠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저들끼리 떠들었다.
“참배객이 굉장히 많네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금 놀라웠다. 오지에 가까운 곳이니만큼 완전히 썰렁한 신전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령왕인 내 기준으로 봐도 이곳의 산은 오르기가 그리 만만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험악한 지형을 뚫고 방문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안내를 하던 신관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평소엔 이렇게 많은 편은 아닙니다. 저분들은 모두 이제 곧 방문하실 귀한 손님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랍니다.”
“귀한 손님이요?”
“아, 소식을 아직 못 들으셨나 보군요. 실은 얼마 전에 바로 이곳에 천사가 강림했거든요. 무려 여섯 장의 날개를 지닌 대천사 나드엘이 말입니다. 나드엘께서 말씀하시길 곧 저희 신전에 귀한 손님이 방문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예고를 했다고 했지.
새삼스레 상기한 사실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신관은 달라진 내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듯 연신 흥분해서 떠들었다.
“그날 이후로 며칠간 오렌 산 전체에 엘뤼엔 님의 성력이 충만했답니다. 본래 이 산은 사시사철 혹독한 추위로 유명한데 그 시기만큼은 선선한 날씨였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참배객들이 무사히 산을 오를 수 있었죠.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그때 소식을 듣고 방문하신 분들입니다.”
“그, 그렇군요.”
“사실 그래서 조금 놀랐습니다. 다시 산이 추워졌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제 한동안 손님이 찾아오실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잠시 나드엘께서 예언하신 분들인가 싶기도 했었지요. 물론 그분들은 수석 사제이신 카이테인 님께서 직접 모셔오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수석 사제요?”
뜻밖에 들린 낯익은 이름에 나는 무심코 반문했다. 그러자 직분에 감탄한 것이라 여겼는지 신관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테인 신관님은 갓난아이일 때 신의 부름을 받아 본교에서 자라신 분입니다. 저희 교단에선 가장 신성에 가까운 존재라는 평가와 함께, 차기 대신관으로 거론되고 계시는 분이죠.”
“헤에…….”
“저도 언젠가 멀찍이서 뵌 적이 있는데 정말 고결한 성품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이번 손님들을 모셔오는 임무도 엘뤼엔 님께서 직접 명하셨다고 하더군요.”
설마 카이테인이 그 정도로 거물일 줄이야. 상당한 성력을 지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놀라운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코앞에 연예인을 두고 알아보지 못한 기분이랄까?
“자, 바로 여기입니다.”
잠시 후 신관이 멈춘 곳은 굳게 닫힌 거대한 문 앞이었다. 우뚝 솟은 상아색의 양 문 위엔 나팔을 부는 천사의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문을 열자 탁 트인 실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휑할 정도로 넓은 공간에 있는 건 가장 상단에 놓여 있는 작은 제단 하나뿐이었다.
“마침 미사 시간이 다가오는지라 안이 비어 있습니다. 시간은 상관이 없으니 원하시는 때까지 머물다 가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안내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걸요.”
신관은 정중하게 답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바로 그때 근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숙한 신전의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매우 소란스러운 느낌이었다. 어리둥절해져서 돌아본 나는 한 무리의 신관들이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들 모두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지금 다들 어디를 가시는 길이십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궁금한 것은 우리를 안내한 신관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몰려가는 사람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러자 신관들 중 한 사람이 다급히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 세이렌 형제. 기쁜 소식이네! 방금 카이테인 수석 사제께서 도착하셨다는군!”
“예? 그, 그게 정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