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그럼 호남형은 어때?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지금보다 약간 남자다운 얼굴도 괜찮지 않아?”
“갈색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색이야. 똥파리 골드 놈들이 생각나거든. 지네들 딴에는 황금색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게 어디 금색인가? 똥색이지.”
“……그럼 검은 머리는?”
“칙칙해 보여서 싫어.”
“일일이 네 취향에만 맞출 수는 없어.”
“마법을 실행하는 건 나야.”
“이쪽 의견을 반영해주겠다고 했잖아.”
“그건 나도 동의했을 때의 경우지.”
결국 한참의 실랑이 끝에 나는 깨끗이 포기를 선언했다. 당사자인 이사나에게 전권을 위임한 것이다. 말이 좋아 위임이지, 그건 사실 라피스에게 결정하도록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인 이사나가 그의 요구를 거스를 수는 없을 테니까. 실제로 대화 몇 마디 끝에 완성된 외형은 전부 라피스의 일방적인 주장에 맞춰져 있었다.
“은발에 금안? 너무 화려하지 않아?”
“괜찮다니까 그러네. 자, 그럼 실행해볼까? 폴리모프!”
남의 기분이야 어쨌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자 라피스는 마냥 신이 난 듯했다. 그가 주문을 외우자 짧은 마나의 파동과 함께 이사나에게서 잠시간 은은한 빛이 나타났다. 다행히 후드에 가려져 있어 그다지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다 됐어. 이제 후드 벗어도 돼.”
“예? 버, 벌써 끝입니까?”
“그럼 얼마나 오래 걸릴 줄 안 거야? 아무튼 확실히 변했으니까 날 믿고 벗어 봐.”
라피스의 말에 이사나는 잠시간 머뭇거리고는 천천히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 순간 드러난 모습에 나는 헉 하고 숨을 터트릴 뻔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준수한 소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대신 어깨까지 드리운 화사한 은발에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피부, 매혹적인 금색의 눈동자를 지닌 요정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엘? 나 어때?”
“…….”
굳어버린 내게 이사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가 눈동자를 깜빡일 때마다 은백색의 긴 속눈썹에서 새하얀 빛 가루가 떨어지는 듯했다.
‘이건 아예 인간이 아니잖아!’
“좋아, 봐줄 만하네.”
내가 바뀐 모습에 경악하는 동안 라피스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낮게 이를 갈았다.
“……봐줄 만해? 이건 너무 눈에 띄잖아. 내 부탁은 귓등으로 흘려들었어?”
“뭘 모르는군. 어차피 나와 네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눈에 띄어. 균형을 맞추려면 이 정도는 되어줘야지.”
“그래서 아주 작심하고 시선을 끌어보자 이거냐? 이래서야 그냥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게 더 낫겠다!”
아니다 다를까. 이사나가 후드를 벗는 순간부터 주위가 온통 술렁거리고 있었다. 이미 라피스 때문에 끌어질 대로 끌어진 이목이, 그의 요정 같은 외모를 보고 폭발하다시피 달아오른 것이다.
“세상에, 저기 저 사람들 좀 봐. 정말 너무 아름답다!”
“둘 다 남자인 거 맞지? 엘프일까?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아아, 가까이 가서 말 걸어보고 싶다…….”
여자들이 부산스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히 울렸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넋을 잃은 얼굴로 이사나를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거보란 뜻으로 라피스를 노려보자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원래 잘난 사람은 군중의 주목을 받게 되어 있어.”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거야?”
“못 한 건 또 뭔데? 아무튼 원래 모습이랑은 전혀 다르니 됐잖아. 지금 주위에서 이사나를 의심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
“윽, 그건 아니지만…….”
“그것 봐. 그럼 아무 문제 없네.”
“…….”
음, 그러고 보니 그런가? 왠지 찝찝했지만 듣고 보니 모두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오히려 화려한 외모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연상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이사나는 변한 자신의 모습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는 그를 보니 나 혼자 지레 흥분한 것 같아 괜히 머쓱해졌다.
“이사나 넌 어때? 바뀐 모습 마음에 들어?”
“으응, 난 아무래도 괜찮아. 후드를 벗고 다닐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좋아.”
“뭐,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하긴 나야 가끔씩 편하게 다닐 때도 있었지만 이사나의 경우엔 늘 얼굴을 가리느라 바빴으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상당히 컸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감지덕지한 기분일 터였다.
“근데 이런 은발이 실제로 존재하는 색일까? 이렇게 반짝거리는 은색은 처음 봐.”
“글쎄, 있으니까 만들어준 게 아닐까?”
사실 나로서도 처음 보는 색깔이긴 했다. 미네르바의 은발도 굉장히 희귀한 색이었지만 지금 이사나의 머리칼 역시 그 나름대로 흔치 않은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라피스가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실버 일족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하게 되면 바로 그런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지. 너무 눈에 띈다고 다른 색으로 일부러 바꾸고 다니지만.”
“거봐! 역시 눈에 띄잖아!”
같은 종족인 드래곤조차 일부러 바꾸는 색을 선택하다니! 이 망할 드래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도 당당했다.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네 머리색만큼은 아니니까.”
“…….”
내가 무슨 말로 저 녀석을 당하겠는가?
더 열 받는 건 그 말이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우리 셋 중에선 내 머리색이 제일 튀었으니까.
결국 나는 얌전히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대체 왜 엮이는 일들마다 이렇게 피곤한 걸까? 트로웰의 말마따나 정말 순탄치 않은 유희였다.
* * *
쉼 없이 쏟아지는 눈은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날은 거의 저물어 어느새 어두컴컴한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신전의 방문을 이튿날로 미루기로 하고 하룻밤을 묵어갈 여관을 구했다.
마침 큰 도시라 그런지 숙박 시설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골목마다 크고 작은 여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반드시 고급 여관이어야 한다는 라피스의 주장에 따라, 나는 개중에서 가장 외관이 깔끔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관의 종업원으로 보이는 소녀가 서둘러 달려나왔다. 식사 때인지라 분주한 홀 안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세 분이시군요. 식사와 잠자리, 어느 쪽이신가요?”
“하룻밤 묵어가려고 하는데 방 있나요?”
“네, 그럼요. 개인실과 단체실 중에서 고르실 수 있구요. 단체실 중에선…….”
그런데 그 순간 능숙하게 설명을 잇던 소녀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라피스를 발견한 것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멍하니 입을 벌린 소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비단 소녀만이 아니었다. 여관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단숨에 그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전의 가게에서도 이미 있었던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정말이지 대단한 존재감이었다.
‘그래 봤자 본체는 도마뱀의 확장판밖에 더 되겠냐마는…….’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단체실이 어떻다구요?”
“아, 아, 네! 단체실 중에선 일반실과 특실이 있어요. 어느 쪽으로 하실 건지 결정을 하시면 돼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설명을 이었다.
보편적으로 특실은 일반실보다 몇 배나 더 비싼 편이다. 한국의 개념으로 보면 거의 스위트룸급이라고 해야 할까? 특실을 소유한 여관도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이 세계에서는 거의 귀족들이나 머무는 그들만의 전유물 같은 거였다. 나와 이사나만 왔다면 선택항목에도 넣지 않았을 텐데, 아마 라피스의 외모 때문에 귀족이라고 오해한 것이 분명했다.
“단체실로 하면 되겠지? 일반실로 하나…….”
“특실로 해.”
끼어든 사람은 물론 라피스였다.
그는 나른한 듯 무료한 표정으로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돈이 넘쳐나는 피닉스 상단의 상주도 감히 특실에서 묵지는 못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당당히 요구하다니, 자기 돈 아니라고 막 쓰시겠다 이거지? 나는 살짝 그를 흘겨보았다.
“하룻밤 묵는 건데 특실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무조건 특실.”
“나 참, 알았어. 라이, 그럼 특실로 할게.”
“응.”
대답과 함께 이사나가 후드를 벗었다. 그 순간 경직되어 있던 소녀의 입에서 다시금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라피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못지않게 화려한 미모에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특실로 할게요. 가격이 얼마예요?”
“네? 아, 그, 저기…… 그러니까…….”
충격을 수습하지 못한 듯 소녀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근처에서 보다 못한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호통을 쳤다. 아마 이 여관의 주인인 듯했다.
“베티! 뭘 하는 게냐! 손님들을 기다리시게 하다니!”
남자는 엄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본 다음 이내 우리를 향해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특실로 하룻밤 묵어가고 싶은데요.”
“아이고, 정말 잘 선택하셨습니다. 저희 여관의 특실은 수도에 계시는 귀족분들도 종종 찾아주실 정도로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요.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보다 눈을 많이 맞으셨군요. 베티, 뭐 하는 거냐. 어서 닦으실 것을 드리지 않고.”
“네, 넷!”
그의 말대로 잠깐 사이 맞은 눈이 꽤 쌓였는지 어느새 흥건히 녹아 뚝뚝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베티라 불린 소녀는 서둘러 마른 천을 가져와 우리들에게 건넸다. 뜻밖인 건 라피스의 반응이었다.
“아아, 고마워요. 친절한 아가씨군요.”
어울리지도 않게 상냥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존댓말이라니. 초면에 말꼬리 잘라먹는 게 특기가 아니었던 건가? 황당해져서 돌아보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시선을 받았다. 철면피인 줄은 알았지만 이제 보니 사기꾼 기질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소녀의 얼굴은 이제 토마토를 넘어 불타는 화로가 되어 있었다. 저러다 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나는 속으로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뭐 해? 어서 닦지 않고.”
“아, 예.”
나와 마찬가지로 굳어져 있던 이사나가 그의 말에 어설프게 답했다. 라피스는 옷을 닦다 말고 날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넌 왜 후드를 안 벗고 있어? 젖어서 물이 떨어지는 걸 계속 쓰고 있고 싶어?”
“난 아무렇지 않은데.”
인간의 모습이라곤 해도 본질이 물이다 보니 난 젖는 느낌 같은 걸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딱히 별생각이 없었지만 라피스의 의견은 달랐다.
“내가 안 괜찮아. 꼭 비 맞은 쥐처럼 궁상맞아 보인다고.”
“뭐? 궁상? 비를 맞는 게 왜 궁상이야? 너 지금 비를 무시하냐?”
“비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 젖은 꼴을 좋다고 서 있는 널 무시하는 거다. 일반적으론 실내에선 젖은 옷은 벗는 게 예의거든? 상식이 없어도 때와 장소는 가려달라고.”
‘상식이 없는 건 너잖아!’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참았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내 쪽이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벗으면 될 거 아냐! 벗으면!”
그러자 우리들의 대화가 재미있었는지 종업원 소녀가 옆에서 키득거리고 웃었다. 다 큰 남자 둘이서 만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유치한 짓인가 싶다. 다른 사람들 눈에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하니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나는 곧장 후드를 벗은 다음 보란 듯이 물기를 탈탈 털어냈다. 그러자 갑자기 묘하게 조용해진 공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사람들이 모두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엔 여관 주인까지 마찬가지였다.
‘뭐, 뭐지? 물을 너무 과격하게 털었나?’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여관 주인이 황급히 웃음을 지었다. 다만 억지웃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만은 막지 못했다.
“저어,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손님. 단체실로 특실 하나가 맞으십니까?”
“네, 맞아요.”
“으음, 단체실은 방이 나눠져 있지 않습니다만.”
“그렇겠죠, 단체실이니까요.”
“아하하,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어설프게 웃는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대체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어 나는 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종업원 소녀의 태도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급격히 얼굴이 싸늘해지더니,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내가 뭘 실수했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훈훈한 시선을 보내왔던 소녀였기에 갑자기 달라진 태도가 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사이 여관 주인이 다른 종업원을 불러(이번엔 남자였다) 우리의 안내를 맡겼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종업원은 다행히 내게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내 옷자락을 잡으며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손님, 제가 옷을 받아드리겠습니다.”
“아…….”
괜찮다고 답하려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문득 내 뒤쪽에 시선을 보내는가 싶던 종업원의 얼굴이 갑자기 파랗게 질린 것이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자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는 라피스의 모습이 보였다.
“남의 거 함부로 건드리지 마.”
“죄, 죄송합니다.”
단 한마디에 기가 죽은 종업원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말에 기가 막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뭘 함부로 건드리지 마?
“지금 뭐 하는 거야?”
“난 내 것이 허락 없이 손 타는 거 제일 싫어해.”
“너 또 사람을 물건 취급…….”
하지만 내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눈치 없이 불쑥 끼어든 여관 주인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내용이 날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하하, 정말 선남선녀이시군요.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을 보니 제 기분이 다 좋습니다.”
“……네?”
“함께 계신 다른 일행분은 아직 어려 보이시는데, 동생이신가요?”
“아, 뭐…….”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왠지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보고 있던 여관 주인이 안심했다는 듯이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