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솜털 같던 눈송이는 오후가 되자 매서운 폭설로 변했다. 빠르게 쌓이기 시작한 눈덩이들이 발목을 넘어 무릎까지 차오른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어느새 새하얗게 변해버린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최근 들어 기온이 많이 낮아지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한순간에 분위기가 달라질 줄이야. 마치 첫눈과 동시에 한겨울이 시작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래서야 카이테인 씨와 무사히 만날 수나 있을까?’
성문 밖은 여전히 들어오려는 인파로 가득 차 있었지만 검문 속도는 전보다 더 느려진 상태였다. 설령 들어온다 해도 이런 눈발 속에선 그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바로 신전에서 보자고 할걸. 때늦은 후회에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왜 한숨질이야?”
……그래, 바로 저 녀석. 레드 드래곤 라피스라즐리 말이다.
뜻밖의 재회 직후 바로 쏟아지기 시작한 눈발을 피해 우리는 근처에 있던 한 식당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런 모습이다. 마주 앉은 채 멀뚱히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랄까.
얼결에 같이 들어오긴 했는데 딱히 친근한 관계도 아니라서 나로선 이 자리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평균을 훨씬 웃도는 녀석의 외모였다. 점원들은 물론 근처에 있던 손님들조차 모두 녀석의 외모에 넋이 팔려 이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인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맞은 편 소파에 태연히 기대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영문을 알지 못하는 이사나는 덩달아 긴장한 얼굴로 나와 그의 눈치만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결국 기나긴 침묵의 끝에서 먼저 항복을 선언한 건 나였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몰라서 물어? 왜 네가…….”
“라피스.”
“……그래, 라피스. 아무튼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왜냐니. 네가 일정에 합류해달라고 부탁했잖아.”
“내가 언제! 계약할 거면 네 쪽에서 나한테 맞추라고 한 거지.”
“그거나 그거나.”
“의미가 전혀 다르거든? 어라? 아니, 잠깐 기다려. ……그럼 설마 여기에 날 만나러 온 거야? 계약하려고?”
내 질문에 그는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내가 왜 이런 촌구석까지 찾아왔겠어?”
“헤에, 정말이야? 별로 내키지 않아 했잖아.”
“마음이 바뀌었어. 이번은 내가 양보하지, 뭐.”
의외의 결정에 나는 잠시간 망연해졌다.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았건만, 설마 그에게서 양보하겠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천지가 개벽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별로 어렵지 않던데? 이미 세간에 소문이 파다하더군.”
“소문?”
“그래. 쫓겨난 황제가 카웰 공작을 만나러 클모어로 향하는 중이라고 말이지.”
“……!”
그 말에 멍하니 듣고 있던 이사나의 얼굴이 굳었다. 나 역시 기겁해서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 이런 곳에서 그런 말을 대놓고……!”
“나 참, 흥분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 여기서 하는 말은 다른 인간들에겐 들리지 않으니까.”
“뭐?”
그 말에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 말대로 식당 안의 사람들은 전혀 이쪽의 대화를 인식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일어난 내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았다.
밀려오는 창피함에 냉큼 주저앉자 라피스가 얄밉게 키득거렸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느끼며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한 거야?”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걸었지. 바로 앞까지 오지 않는 이상 이 안에서 나는 소리는 못 들어.”
“하지만 주문을 외우는 건 못 봤는데.”
“흥,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드래곤의 마법을 인간의 수준과 비교하면 곤란하다고. 이 정도 수준엔 주문이나 시동어 같은 건 쓸 필요도 없어.”
“드, 드래곤?”
그 순간 이사나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제야 라피스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에게 사전 설명이 부족했음을 떠올리고 볼을 긁었다.
“으음. 미안, 이사나. 소개하는 게 늦었지? 실은 이 녀석 드래곤이야. 레드 드래곤 라피스라즐리라고 해.”
“어, 어떻게 드래곤께서…….”
“음, 실은 그가 나와 정령의 계약을 하고 싶어 하거든.”
이사나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나와 라피스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드래곤을 눈앞에서 본 충격과, 그가 계약을 하러 왔다는 호기심에 온통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러자 라피스의 눈매가 바로 험악해졌다.
“뭘 봐. 네가 나보다 먼저 계약했다고 으스대는 거냐?”
“네, 네?”
“말해두지만 난 너한테 진 게 아니야. 네가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이거든?”
“…….”
어린애처럼 유치한 시비에 이사나는 반문을 하지도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위대하다는 드래곤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겠지. 내가 정령이라 정말 다행이다. 같은 종족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이 무지 부끄러웠을 테니까. 이왕이면 아예 모르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지만, 그건 이미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이므로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사나한테 시비 걸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뭐 하는 거야?”
“흥, 일단 계약이나 해. 설마 약속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 넌 분명히 말했어. 내가 너한테 맞추는 조건이라면 계약해주겠다고 말이야.”
“아, 그래! 해! 한다고! 까짓 거 하면 될 거 아냐!”
투덜거리며 대답하자 라피스는 씩 웃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계약한다니까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니 기분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가만있자. 이럴 땐 계약을 어떻게 하는 거더라?’
보통 정령의 계약은 소환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지금은 그런 의식을 펼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다행히 정령왕의 본능은 이 순간에도 차분히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굴리자 저절로 방법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라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손.”
“……?”
내가 손을 내밀자 라피스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찌푸린 얼굴을 하면서도 묵묵히 따르는 모습을 보니 마치 덩치 큰 강아지를 훈련시키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사납고 제멋대로인 맹견을.
“뭐야?”
“가만있어 봐. 음, 이다음엔…….”
나는 마주 잡은 손을 통해 그의 마나를 끌어왔다. 소환 의식에 필요한 마나를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보면 강제로 남의 생기를 뺏는 거나 마찬가지인 행위라 내키진 않았지만 매개체가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마나의 소모에 라피스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딱히 거부하거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 모습이 나로선 조금 의외였다. 간단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내가 끌어가는 마나는 일반 사람이라면 금세 탈진할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이는 것이 당연한데 라피스에게선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나를 완전히 믿고 있거나, 이 정도 소비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처음에 약간이나마 반응을 보였던 걸 보면 후자는 아닐 테고 결국 전자라는 소린데, 오늘로 고작 두 번째 보는 날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생각보다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곧 낯선 마나가 내 몸을 휘감으며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적당한 양이 되자 나는 본격적으로 계약을 체결할 준비를 했다.
“여기선 사람들 시선이 있으니까 계약서는 꺼내지 않을게. 괜찮지?”
“마음대로.”
그 순간에도 라피스는 느긋하게 내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작정 끌어간 마나가 계약 의식에 쓰인다는 걸 알게 돼서인지 오히려 신이 난 것도 같았다.
“너는 나와 계약을 이행함으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낼 힘을 제공하며, 나는 그 대가로 너의 보필자가 될 것이다. 계약……은 당연히 할 테니 따로 의사를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성의 없게 묻는 말에도 그는 마냥 기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전처럼 거만이라도 떨면 얄밉기라도 할 텐데,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나는 끌어올린 물의 기운을 두 개의 손가락 위에 집중시킨 다음, 그것을 라피스의 이마에 대었다. 그러자 푸르스름하게 맺혀 있던 기운이 그의 피부 위에 선명한 그림을 새기며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사나에게 새겨진 것과 동일한 모양의 물의 인장이었다.
“다 됐어.”
약간 차갑기만 할 뿐 별다른 느낌도 없을 텐데 라피스는 여운을 음미하듯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생각과는 다른 차분한 반응에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소감이 어때? 드디어 물의 정령왕과 계약했는데 말이야.”
“……느낌이 이상해.”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기분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설마 예상했던 거랑 달라서 실망한 건가? 하기야 까마득할 정도로 긴 세월을 이상하리만치 한 가지에만 집착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천천히 들어 올린 그의 눈꺼풀 안에는 확연한 기쁨을 드러낸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차가운 감촉이 기분 좋아.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이제야 겨우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야.”
“……너 정말 레드 드래곤 맞아?”
“머리색을 보면 몰라?”
“그러니까 묻는 거야. 레드 일족의 성향은 불에 가깝잖아. 물이라면 오히려 질색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 괴짜라는 말은 많이 듣긴 했지. 하지만 상관없어. 나 정도 두뇌와 외모의 소유자라면 그 정도 특이점은 있는 게 오히려 매력이지.”
“아, 예, 그러십니까.”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찌푸린 얼굴로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체 어떻게 자라면 이런 성격이 되는 걸까? 부모 드래곤이 누군지 얼굴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이제 정말 엘퀴네스가 내 것이 된 거군.”
“헐…… 왜 말이 그렇게 되는데?”
“왜긴, 나랑 계약했잖아.”
황당해서 반문한 말에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대체 이 녀석의 머릿속엔 계약이란 개념이 어떻게 박혀 있는 거지? 심지어 라피스의 만행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불쑥 이사나에게 시선을 돌리는가 싶더니 대뜸 쏘아붙이는 것이 아닌가!
“이봐, 인간. 네가 나보다 먼저 계약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소유권이 더 많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앞으로 내게 동료 취급이라도 받고 싶다면 알아서 눈치껏 구는 게 좋을 거야. 내 말 무슨 소린지 알겠지?”
“아하하…….”
갑작스럽게 협박을 받은 이사나는 차마 대답도 못 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보자보자 했더니 아까부터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물건이야? 계약했다고 해서 무조건 소유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거든? 그리고 너!”
“라피스.”
“그래, 라피스! 저번에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표현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겠다며! 그런데 뭐야? 한 달이 지나도록 전혀 변한 게 없잖아! 그리고 이번 여행은 이사나를 위한 거라고! 네 멋대로 굴지 마!”
“멋대로 군 적 없어. 앞으로 당분간 얼굴을 볼 사이라면 좋든 싫든 엮여야 할 텐데, 그런 의미에서 예의를 갖추라고 말해두는 것뿐이야.”
“너도 이사나에게 예의를 갖춰! 나이는 어려도 황제거든?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라고!”
“흥, 그래 봤자 인간…….”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알았어, 알았어. 성질은…….”
라피스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불량한 태도였다. 나쁜 녀석이 아닐지도 모르기는 개뿔. 정정한다. 이 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열 받는 녀석이다.
그때까지 이사나는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관전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사과부터 건넸다.
“미안해, 이사나. 이런 녀석이라.”
“아, 아니야. 난 괜찮아. 그런데 방금 전에 드래곤 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야? 앞으로 당분간 얼굴을 볼 사이라니?”
“응? 아, 그게 말이지…….”
“말 그대로의 의미다, 인간. 앞으로 이 몸이 너희와 함께하게 됐다는 소리지.”
대답을 이은 건 라피스였다. 전후사정 설명 없이 곧장 본론으로 직행한 대답에 이사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