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엘과 이사나가 클모어에 다다른 그 시각, 페리스를 비롯한 황제의 친위기사들도 수도 헤리카를 지척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목적지를 코앞에 뒀다는 기쁨도 잠시, 그들은 예상 밖의 위기를 맞이해야 했다. 검문을 피해 숨어든 숲에서 매복해 있던 대공의 병사들과 마주친 것이다. 매일같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추격전이 드디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죄인 케이 드 세리크와 역당들은 들으라! 그대들의 운도 여기까지다! 얌전히 투항하라!”
상대의 진영으로부터 들려오는 우렁찬 음성에 기사들은 나직이 이를 갈았다. 어림잡아 세어본 숫자만 족히 백 명은 넘는 것 같았다. 맞서 싸우기에도, 무작정 도망치기에도 만만치 않은 수였다.
“흔적을 지운다고 지웠는데…… 역시 엘 님이 하신 것만큼 완벽할 수는 없었나 봅니다.”
“할 수 없지. 그대는 최선을 다했으니 자책할 것 없소, 페리스. 모두 준비를 단단히 해라. 이 전투에 우리의 모든 힘을 싣는다.”
“예, 알겠습니다!”
대장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모두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보다는 황제를 끝까지 보필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더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죽음이 알려지면 어린 황제는 매우 상심하리라.
‘엘퀴네스 님, 부디 황제 폐하를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무기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아마도 마지막일 전투에 임하는 그들의 마음은 차분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의 곁에 정령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기꺼이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라면 분명 황제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대치한 상대 병영으로부터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온몸을 검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거구의 기사였다.
친위대의 대장 케이는 그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대공의 왼팔이라 불리는 세트니오 백작, 그의 직속 기사단인 어둠의 기사단의 부단장 페일러였다. 평소 이렇다 할 친분을 쌓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종종 황실 연무장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세트니오 백작이 움직였으니 이런 날이 오는 건 당연했지만 막상 얼마 전까지 웃으며 대하던 사람을 적으로 만나게 되니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와 달리 페일러는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케이를 향해 희게 웃었다.
“이거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리크 경. 못 보는 동안에 얼굴이 많이 상하셨군요. 한때 황제의 친위대로서 위명이 드높던 분들께서 어쩌다 이리되신 겁니까? 정말 안타깝기 이를 데 없습니다.”
“……쓸데없는 얘기는 접어 두고 본론만 말하지.”
“하하, 이런 순간에도 고고한 건 경다우시군요. 뭐, 좋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경과 경의 기사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마시고 그냥 순순히 투항하시지요.”
“거절한다.”
“이런, 그렇게 쉽게 거절하셔도 되는 겁니까? 장담하건대 전투가 벌어지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을 겁니다.”
“내가 그런 말 따위에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 답답하신 분이군요.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경들이 지키고자 하는 그분을 구하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대공께서 누구를 보내셨는지 아십니까? 바로 파이런 님입니다.”
“……파이런?”
“대륙 제일 검사인 파이런 드 카리브디스 님 말입니다.”
“……!”
뜻밖의 대답에 케이를 비롯한 친위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파이런 드 카리브디스, 대륙 제일검이자 최연소 소드 마스터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불과 열아홉의 나이에 공작위를 하사받은 남자였다. 동시에 그는 대공 직속 친위군단의 총사령관이기도 했다.
그의 합류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짐작했던 것보다 너무 일렀다. 공작은 대공이 가장 신뢰하는 수하임과 동시에 그의 수하들 중에서 가장 강한 전사였다. 즉, 쉽게 쓰이고 버려질 패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설마 그 패를 이렇게 빨리 꺼낼 줄이야. 그만큼 대공이 이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대공의 입장에서 황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살아 있는 친위대는 고작 열 명 남짓, 그때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진작 전멸을 면치 못했을 숫자다. 예상보다 고전하고 있다고 해도 대공은 당연히 자신의 승리를 점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뻔한 전투에 대륙 최강의 전사를 보낸다? 과해도 너무 과한 처사다. 벼룩 하나를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었다.
‘설마 폐하께서 정령왕과 계약하신 걸 눈치챘나?’
대공은 뛰어난 정보력을 지닌 자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이었기에 케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자신들 때문에 긴장한 것으로 오해한 페일러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후후, 그래.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지금 그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황실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황제의 친위대는 그에게 늘 눈엣가시인 존재였다. 그런 그들의 몰락을 제 눈으로 지켜보게 된 것만이 아니라 직접 박살 낼 기회를 가지게 되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에겐 얼마 전에 백작으로부터 하사받은 보검까지 존재했다. 카리브디스 공작이 오크 떼로부터 습득한 전리품을 백작이 직접 수거하여 자신에게 준 것이다.
‘제아무리 강한 자들이라도 이만한 병력 앞에선 어쩔 수 없겠지. 게다가 이쪽의 무기는 전부 보검이니 저들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페일러는 흘끗 케이와 친위대들의 무기를 살폈다. 그들이 지닌 검은 여러 전투를 거치는 동안 모두 날이 닳고 낡아 있었다. 게다가 오랜 도망 생활 탓에 많이 지쳐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래도 투항하지 않겠습니까?”
“……이 목숨은 오직 한 분의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뜻대로 해드리지요.”
페일러는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듣기 좋은 울림과 함께 검신으로부터 충만한 마나가 전해져왔다. 그가 받은 것은 고위 빙격계의 마법이 걸린 검이었다. 두 뺨까지 와 닿는 차디찬 냉기에 그의 자신감은 더욱 충만해졌다. 그 어떤 뜨거운 심장이라도 그의 검이 닿는 순간 바로 얼어붙고 말리라.
“모두 역적을 단죄하라!”
“와아아!”
명령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모두 무기를 치켜들었다. 케이와 친위대들 역시 다가올 공격을 대비해 방패를 굳게 움켜쥐었다. 두 무리가 충돌하려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쿠웅!
바로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떨어진 지점은 정확히 양측이 마주 서 있는 정가운데였다.
뜻밖의 상황에 달려들던 대공 측의 기사들도, 대비하던 케이와 친위대도 일순 모든 행동을 멈췄다. 이윽고 매캐한 먼지가 걷히고 뿌옇던 자리가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드러난 자리에 누군가 낯선 이가 서 있었다. 어깨까지 드리운 흑발에, 서늘한 눈매를 지닌 남자였다.
“뭐, 뭐 하는 놈이냐, 너는!”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를 향해 페일러가 외쳤다. 그러자 고요히 서 있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저 소리에 반응한 것쯤으로 보이는데도, 기사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감히 다가설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기사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놈들이냐?”
“……무슨?”
“네놈들이 그 잡것들이냐고. 감히 남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가지고 튄 싸가지 없는 놈들이 바로 네놈들이라 이거지?”
“뭐, 뭣?”
느닷없는 하대도 모자라 막말에 가까운 단어가 쏟아지자 페일러는 당황했다. 그는 꿈에도 상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보검에겐 본래 주인이 따로 있으며, 눈앞의 남자가 바로 그 보검을 찾기 위해 찾아온 원주인, 블랙 드래곤 메세테리우스라는 사실을 말이다.
메세테리우스는 몸이 회복되자마자 바로 무기들을 찾기 위해 추적마법을 발동시킨 참이었다. 지금 이 순간, 제 것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고 있는 인간들을 보니 참아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들끓었다.
“네놈들 전부 다 죽여 버릴 테다!”
부릅뜬 눈동자에 살의가 일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검은색의 연기가 폭사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마나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가장 먼저 직감한 건 친위대 측에 있던 정령사 페리스였다. 다른 친위대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그는 갑자기 등장한 사내에게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자 바짝 긴장했다. 당황한 사람들이 허둥거리는 동안 그는 본능적으로 슈리엘을 소환하여 일행들 주위로 바람의 장막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슈우욱! 콰아아아앙!
“크윽!”
“우와악!”
장막의 보호하에 있음에도 엄청난 압력이 쏟아졌다. 페리스와 친위대들은 무형의 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악물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후 공기가 진정된 것을 느낀 그들은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시야 가득 온통 시커먼 폐허가 들어왔다.
숲도, 나무도, 수많은 병사들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 앞에 있었던 것들이 그 잠깐 사이에 전부 사라져 있었다. 매캐한 잿더미 속에서 무사한 것은 오직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과 정령의 비호를 받은 친위대들뿐이었다.
“맙소사…….”
페리스와 친위대는 모두 신음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검은 머리의 남자, 메세테리우스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화를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고작 이딴 걸로 죽어 버릴 놈들이 어딜 감히 남의 물건에 손을 대? 제기랄!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존심 상하는군! 이런 썩을 놈들 때문에 내가! 이 몸이!”
그는 시꺼멓게 잿더미로 변한 시체들 사이에서 무기들을 건져 들며 연신 투덜거렸다. 그 엄청난 폭발 후에도 무기의 상태는 흠집 하나 없이 말짱했다.
“저, 저어…….”
“응?”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메세테리우스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당연히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남은 놈들이 있었던 것이다.
“뭐야, 네놈들은 왜 살아 있어?”
돌아본 그의 눈에 열 명 남짓한 인간들이 보였다. 그중 한 사람에게서 꽤 정순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람과 물의 정령의 향기였다.
‘마법을 쓸 때 정령의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저 녀석이었군.’
그자들은 전부 초라한 옷차림에 변변찮은 방패와 검을 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메세테리우스는 눈에 준 힘을 살짝 풀었다. 만약 관련자들이라면 정말 화가 났겠지만, 다행히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의 검을 들고 튄 인간들 쪽은 아닌 것 같았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흥! 그걸 알아서 뭐 하게?”
“그게…… 평범하신 분은 아니신 듯하여…….”
“당연하지! 내가 어딜 봐서 평범해 보인다는 거냐? 하지만 그렇다고 너희들 따위에게 내 정체를 알려줄 생각은 없거든? 간신히 살아남은 목숨 무사히 보전하고 싶으면 쓸데없는 거 궁금해하지 마라. 난 아까 그놈들에게서 내 것을 찾으러 온 것뿐이니까.”
“내 것? 혹시 당신이 지금 들고 있는 무기들 말입니까?”
“그래! 그놈들이 감히 내게서 훔쳐서 달아났지. 놈들은 그 죗값을 치른 것뿐이다.”
코웃음 치며 대답하는 말에 친위대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저렇게 엄청난 존재에게서 무기를 훔쳤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그가 그렇다고 하니 믿어야 했다.
“그나저나 너희들은 꼴이 그게 뭐냐?”
“예?”
“방패는 죄다 낡아서 들고 있으나 마나 한 상태고, 검은 어디 싸구려 대장간에서라도 구한 거야? 그딴 걸로 잘도 내 보검과 맞설 생각을 했구나. 멍청한 건지, 미련한 건지.”
“아…….”
사납게 쏘아붙이는 말에 친위대들은 서로 어색하게 웃었다. 기사에게 검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이다. 다른 때라면 울컥 화가 치밀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검은 머리의 남자에겐 어떤 험한 말을 들어도 자존심이 상하거나 불쾌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없이 경이롭고 두려운 마음만 일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정령왕인 엘퀴네스는 절대자이면서도 스스로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인 그들이 허물없이 편하게 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허나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저 눈만 마주쳐도 온몸에서 비 오듯 식은땀이 솟았다.
바로 그때였다.
“자, 옜다, 받아라.”
“예?”
철거덕,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친위대들 앞으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발치에 던져진 것을 확인한 친위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방금 전 수거한 보검들이었기 때문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메세테리우스는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주지 뭐. 너희들 가져.”
“하, 하지만 이것을 찾으러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왜 저희에게…….”
“응, 그랬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애초에 내 목적은 도둑놈들을 혼내주려고 한 것뿐이거든. 이것 말고도 찾으러 갈 게 더 있는데 들고 다니기가 귀찮네. 겨우 이 몇 가지 때문에 집에 들르는 것도 내키지 않고, 아공간에 넣자니 나중에 꺼내볼 일이 있을까 싶고. 그러니까 그냥 니들 가져라. 그거 일단은 드워프가 재련한 거라 쓸 만은 할 거야. 너희들이 들고 다니는 그 쓸데없는 고철 덩어리보단 훨씬 나을걸?”
“드, 드워프……!”
그 이름의 가치는 기사라면 누구나 다 알았다. 친위대들은 모두 경악한 얼굴로 보검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저 훨씬 나은 정도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워프는 뛰어난 손재주를 타고나는 장인 종족이다. 그들이 만드는 무기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바위를 부술 정도로 견고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워낙 소수 종족인 데다 인간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탓에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귀했다. 기사들 중에선 드워프제의 검을 가져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 자들이 수두룩할 정도였다. 그런 엄청난 것을 아무렇지 않게 내주다니, 친위대들로서는 남자의 행동이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물론 그렇다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저어……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조심스러운 인사에 메세테리우스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로서도 흔치않은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그의 레어엔 비슷한 무기들이 차고 넘치지만 재물 욕심이 많은 편이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내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분이나마 복수를 해냈다는 후련함 때문인지 지금 그는 평소보다 상당히 관대해진 상태였다.
어차피 무기엔 추적마법이 걸려 있고, 인간의 수명은 짧으니 언제든 물건들은 다시 그의 손에 돌아올 것이었다. 보검을 마냥 묵혀두기도 아까우니 이참에 잠시간 세상에 내돌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행히 눈앞의 인간들은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자들 같으니 사용하는 동안 검을 잘 벼려줄 터였다.
“아 참, 그걸로 뭘 지지고 볶든 상관은 없는데 절대 부러뜨리지는 마. 부러진 검은 장식용으로서의 가치도 없거든.”
“예, 명심하겠습니다.”
기쁨에 찬 친위대들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은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있었던 남자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손에 들린 보검들만 아니었다면 그 순간을 꿈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마치 무언가에 홀렸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 사람은.”
“글쎄, 혹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아니었을까?”
“드래곤?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니, 드래곤인 게 확실해. 정말 엄청나게 강했잖아. 게다가 이런 보물을 선뜻 내줄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
보통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단어를 중얼거리면서도 그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사실 정령왕을 만난 그들에게 드래곤 정도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메세테리우스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줬던 검을 다시 뺏으려 들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남의 마음을 훔쳐보는 재주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사나의 기사들로서는 참으로 운 좋게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명검을 공짜로 손에 넣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