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90화 (90/608)

제90화

그렇게 이사나와 휴센 일행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 역시 트로웰과 작별 인사를 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당분간 작별이네.』

『그러게. 근데 너무해, 트로웰. 넌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지? 왜 휴센 일행이 알고 있다는 걸 미리 말해 주지 않았어? 나한테만이라도 귀띔 좀 해 주지. 정말 놀랐단 말이야.』

『미안, 미안. 미리 알고 있으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거든. 게다가 엘, 너는 생각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잖아.』

『윽, 그거야 그렇지만…….』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을 흐렸다. 하긴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내가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과 똑같은 기분으로 편안히 휴센 일행을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너무 방심한 나머지 사람들 앞에서 이사나의 본명을 부르는 실수를 저지른다거나. 그런 의미에서 트로웰은 나를 너무 잘 알았다.

『트로웰은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글쎄, 아마 수도에 있는 용병 길드 본사로 가게 될 것 같아. 승급 시험을 받아야 하거든.』

아아, 그러고 보니 ‘매튜’가 이번 겨울이 지나면 금패를 받게 된다고 그랬던가?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앞으로 한동안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트로웰 역시 내 기분을 읽은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좀 더 같이하고 싶었는데. 내가 끝까지 돕지 못해서 미안해, 엘.』

『아냐, 지금까지도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는걸.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우리 사이에 뭘 그 정도 가지고. 앞으로도 종종 연락할게. 유희에 빠져 있는 것도 좋지만 가끔씩은 정령계로 돌아가서 주위도 돌아보고 휴식도 즐기도록 해. 엘, 너는 처음부터 너무 험난한 유희라 특히 신경 쓰여.』

『왜,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서 불안해?』

『응? 물의 정령왕인 네가 물가에 있는 게 왜 불안한데?』

“…….”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말에 나는 일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난 물의 정령왕이지. 생각해 보니 그리 적절하지 않은 예시이긴 했다. 그렇다 해도 설마 이렇게 되받아칠 줄은 몰랐지만.

『너무한다, 트로웰.』

『하하, 미안. 엘이 먼저 내 마음을 떠보려고 했으니까 그렇지. 내가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 같지는 않더라도 그 비슷한 심정은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그런 날 생각해서라도 난 엘이 좀 더 몸을 아꼈으면 좋겠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응, 알았어. 조심할게.』

조만간 이 제국엔 전운이 감돌 것이다. 용병인 휴센 일행은 가장 먼저 격동의 날에 휘말리게 될 터. 다음에 그들을 만나는 건 전장의 한가운데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도 트로웰도 그 부분에 대해선 암묵적으로 침묵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을 구태여 미리 끌어와 전전긍긍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행운이 함께하길, 엘.”

“매튜, 너도.”

그럴듯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때 문득 뺨에 축축한 느낌이 와 닿았다. 고개를 들자 하늘 위에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물의 나이아스들이 실프들과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팔랑팔랑 몸을 움직일 때마다 새하얀 얼음 가루가 바람을 타고 두둥실 떠내려 오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떨어지는 얼음 가루를 받았다. 뭉친 얼음 알갱이가 마치 꽃송이처럼 선명한 문양을 이루며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 * *

휴센 일행과 헤어진 후 우리는 그들이 가르쳐준 비밀 통로를 이용해 곧장 내성으로 진입했다. 무역 도시라는 이름답게, 성 안엔 가지각색의 복식을 갖춘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물건을 가득 실은 수레와 그 사이를 바삐 오가는 짐꾼들의 모습이었다. 활기차고 역동적인 공기가 흐르는 거리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치 시장 안처럼 번잡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화려한 분위기에 비해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수시로 돌아다니며 불시 검문을 하는 병사들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인들 사이를 살피며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병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인해 슬슬 철수하는 분위기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이사나는 눈이 내리는 것 자체를 반겼다.

“이것 봐, 엘. 포악한 성자가 쥐고 있는 창에서 드디어 그 첫 번째 얼음 가루가 떨어지고 있어. 이제 정말 그의 휴식이 시작되나 봐.”

……해석하자면 ‘와, 첫눈이다. 이제 정말 겨울인가 봐.’라는 뜻이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아마도 지금 그가 들뜬 건 비단 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두 달간 이어 온 기나긴 여정이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저 멀찍이 우뚝 선 본성의 모습을 보니 나 역시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도착했네.”

“그러게.”

매시간 동고동락하며 의지가 되어 주던 동료들은 사라지고 이제 다시 단둘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정신없는 일정에 빠져 지내느라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긴장감이 새삼 피부에 와 닿았다. 이사나 역시 결전을 앞 둔 비장한 표정이었다.

“형님이 날 만나 줄까?”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만나야지.”

“혹시 싫다고 하면?”

“걱정 마. 그땐 무슨 수를 써서든 강제로 얼굴을 보게 할 테니까.”

그 말에 자신감을 얻은 듯 이사나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준비됐어, 엘. 이제 출발하자.”

“아, 잠깐 기다려. 실은 네 형님에게 가기 전에 먼저 신전에 들를 생각이었거든.”

“신전? 아아, 신의 문장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지. 그럼 바로 그쪽으로 가면 되는 건가?”

“음, 그렇긴 한데…… 카이테인 씨가 아직 밖에 있어서 말이지.”

그제야 문제를 깨달은 듯 의아해하던 이사나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카이테인이 신전까지 안내하기로 한 것을 뒤늦게 상기한 것이다.

우리가 먼저 출발한 탓에 그는 성문 밖 행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트로웰을 통해 안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전해 두긴 했지만, 워낙 줄이 길었던 만큼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럼 어떡하지?”

“일단 어디 건물 안에라도 들어가 있자. 눈이 더 많이 내릴 것 같아.”

“응.”

나는 그와 함께 갈 만한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대로 적당한 장소에서 카이테인을 기다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할 생각이었다.

“여어―.”

그런데 그때 걸음을 옮기려는 우리 앞으로 낯선 남자 세 명이 다가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자질이 불량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누구세요?”

내가 경계하며 묻자 그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히죽 웃었다. 왠지 기분 나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까 다 봤다.”

“네?”

“너희들, 숨겨진 구멍을 통해 들어왔지?”

“……!”

설마, 그걸 목격한 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분명 구멍을 통과하기 전에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미리 확인했었다. 아마 멀찍이 숨어서 지켜보다가 누군가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쪽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건 아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검문을 피해 몰래 들어오다니, 수상한 녀석들이네.”

“그러고 보니 둘 다 시커먼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잖아. 혹시 너희들 수배자들이냐?”

“어이쿠, 무서워라. 우리 영지에 범죄자가 숨어들다니, 그러면 큰일이지.”

낄낄 웃는 사내들은 명백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이사나를 내 뒤쪽으로 보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흰 그냥 구멍이 보이기에 들어온 것뿐이에요. 수배자도 아니고, 딱히 검문을 피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흐흐, 코흘리개 어린애도 속지 않을 말을 우리더러 믿으라고?”

“정말이거든요?”

“그래? 그럼 지금 당장 검문소로 같이 가 볼까? 네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떳떳하다면 말이야.”

“…….”

물론 대답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그들은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더 야비한 표정을 지었다.

시작부터 이렇게 일이 꼬일 줄이야.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을 치는 건 간단했지만 그들이 신고를 하면 그 즉시 수많은 병사들의 추격이 따라붙을 것이다. 최대한 일이 크게 불거지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자아, 어떻게 할까? 저기 지나가는 병사 아저씨들을 부를까? 우리는 그래도 상관이 없는데 말이야.”

“……원하는 게 뭐예요?”

“흐흐,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불량배들은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그중 가운데 남자가 두툼한 손을 내 앞에 펼쳐보였다.

“한 사람당 10실버씩, 총 20실버.”

“네?”

“그 정도 내놓으면 특별히 눈감아 주지.”

“미, 미쳤어요?”

뻔뻔하다 못해 황망한 요구에 나는 헛숨을 삼켰다. 그 정도면 이곳에서의 평민 가족 기준으로 한 달은 족히 먹고살 수 있는 돈이다. 누구나 쉽게 지니고 다닐 리도 없고, 설령 소지하고 있다고 해도 불량배 따위에게 쉽게 넘겨줄 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푼돈이나 뜯는 양아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그들의 뇌 구조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래 봬도 사정 많이 봐준 거라고. 설마 그만한 돈도 없이 넘어갈 거라 생각했어?”

“말이 되는 걸 요구해야죠. 저희한테 그렇게 큰돈이 있을 것 같아요?”

“뭐야, 정말 없어?”

“당연하죠!”

사실은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대꾸했다. 만약 순순히 내준다고 해도 이런 심보를 지닌 자들이라면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자 당장 화를 낼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불량배들은 저들끼리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마치 이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뭐, 정히 안 되면 몸으로 갚는 방법도 있지.”

“뭐라고요?”

그 순간 나는 배 쪽에 와 닿는 딱딱한 감촉을 느꼈다. 내려다보니 예리하게 날이 선 단검이 보였다. 그 옆에서 다른 녀석이 이사나에게도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조용히 입 다물고 순순히 우리를 따라와.”

“무슨…….”

“쉿, 병사들에게 고발당하고 싶어?”

나직한 협박에 입을 다물자 그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바로 그때 그들끼리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오늘은 운이 좋네. 두 놈이나 잡다니.”

“그러게 말야. 나이들도 어려 보이는데, 좀 더 받아먹을 수 있겠어.”

“……!”

뭐야. 설마 이 녀석들, 인신매매를 하는 건가?

그제야 나는 불량배들의 진정한 목적을 깨닫고 경악했다. 어쩐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더라니, 처음부터 팔아먹을 생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의도를 알게 된 이상 그들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잡아끄는 손길에 저항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불량배들의 시선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뭐야? 순순히 따라오라는 말 안 들려?”

“당신들, 인신매매범이에요?”

“뭐, 뭐?”

“지금 우리를 협박해서 끌고 가는 거, 어디론가 팔아넘기려고 하는 거잖아요. 이거야말로 범죄 아닌가요?”

“이 자식, 그 입 다물지 못해?”

정곡을 찔린 탓인지 불량배들은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거칠게 붙잡는 손길과 함께, 두꺼운 손바닥이 빠르게 내 얼굴 쪽으로 날아들었다. 폭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엘!”

뒤쪽에서 기겁한 이사나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물론 나 역시 얌전히 당해 줄 마음은 없었다. 소란이 커질 땐 커지더라도 이 괘씸한 놈들에겐 응징을 가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퍼억!

“꾸웩!”

날아든 손이 내게 채 닿기도 전에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누군가 그를 걷어찬 것이다.

“뭐, 뭐야!”

“어떤 놈이 감히……!”

갑자기 일어난 일에 크게 놀란 듯 다른 두 사람이 당황하여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어진 공격에 얻어맞아 속수무책으로 굴러떨어졌다.

퍽! 콰악! 콰직!

듣기만 해도 움찔할 정도로 거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얼마나 강한 일격이었는지 단숨에 나가떨어진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사방에 시체처럼 너부러진 불량배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 앞으로 무심히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훤칠한 키에 날렵한 체구, 곧게 뻗은 다리가 마치 그린 듯이 완벽한 비율을 지닌 사람이었다. 허리 아래로 가볍게 묶어 내린 머리칼은 짙은 붉은색을 띠었는데, 바람이 스칠 때마다 빛이 닿는 자리가 루비 가루를 뿌린 듯이 반짝거렸다.

“한심하군.”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런 곳에서 들을 리가 없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굳어진 나를 향해 등지고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찬란한 햇빛 아래,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가볍게 찌푸려진 상태로 나를 곧게 응시했다.

“이런 조무래기들을 상대로 뭘 쩔쩔매고 있는 거야?”

“라…… 피스?”

레드 일족의 드래곤 라피스라즐리.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그와의 예상치 못한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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