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88화 (88/608)

제88화

그 뒤의 일은 당연히 일사천리였다.

연기이긴 하지만 트로웰은 봐주지 않고 시큐엘을 몰아붙였다. 빠르게 쏟아지는 그의 공격에 시큐엘은 거의 농락당하다시피 굴러다녀야 했다. 물론 강한 마수라는 설정답게, 그 와중에도 건물의 일부분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며 틈틈이 괴력을 과시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사이 놓아 버린 영주의 아들은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무사히 받아 낸 뒤였다.

나는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휴센 일행과 전투(를 빙자한 도망) 중인 시큐엘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는 돌려보낼 타이밍을 재는 것이 관건이었다. 자칫 틀어지기라도 했다간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환자인 이사나가 고스란히 타격을 받게 된다.

사실 지금까지 소환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이미 이사나는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더 늦기 전에 시큐엘을 무사히 돌려보내야 했다.

“으랏차!”

바로 그때 헤롤이 휘두른 도끼가 정면으로 시큐엘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그대로 가만히 있다간 고스란히 꿰뚫릴 위기였다.

“지금이야, 이사나!”

신호가 떨어진 즉시 이사나는 심호흡을 하고 시큐엘의 소환을 해지했다. 그러자 그 순간 시큐엘이 목을 뒤로 젖히며 하늘을 향해 크게 포효했다. 그 상태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괴롭힘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의 뜻을 누구보다 제대로 이해한, 진정 마지막까지 투철한 연기력이었다(아니, 실제로도 시달리긴 했지만).

“샴페인 용병단이 또 마수를 물리쳤다!”

“와아아!”

사방은 순식간에 함성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와 동시에 이사나가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결국 극심한 마나 소모를 이기지 못하고 탈진하고 만 것이다.

“괜찮아, 이사나?”

“으응…….”

나는 그를 얼른 부축한 다음 생기가 고갈된 육체에 천천히 물의 기운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조금은 나아졌는지 창백하던 안색에 조금씩 혈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정말 수고했어.”

“엘, 너도.”

우리들은 다시금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사기 행각이면 아무렴 어떤가. 이 순간만은 동료를 지켜 냈다는 충족감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 * *

약속대로 할버크의 영주는 휴센 일행을 전원 무사히 방면했다. 더불어 사과로 대신하기로 한 포상금마저 든든히 챙겨 주기까지 했다. 비록 아들은 망나니일지언정 영주 자체는 비교적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뭐야, 그게 라이가 불러낸 정령이었어?”

풀려난 직후 뒤늦게 배후 상황을 알게 된 일행들은 모두 황당해했다. 특히 영주만이 아니라 감쪽같이 일행들 전부를 속인 휴센의 연기력에 배신감을 느낀 얼굴이었다.

“어쩐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했어. 마수치곤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거든. 하지만 처음 보는 건데다가 굉장히 신비하기도 해서 그냥 철석같이 믿었지 뭐야. 그런데 그게 전부 거짓말이었다니.”

“정말 너무했다, 단장. 어떻게 우리까지 속일 수가 있어?”

“그 상황에서 일일이 상황을 설명할 순 없잖아. 엘과 라이에게 고맙다고나 해. 우리가 무사히 풀려난 건 다 두 사람 덕분이니까.”

불만을 토로하는 동료들을 향해 휴센은 무심히 대답했다. 그에 일행들은 잠시간 샐쭉한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를 향해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정말 고맙다. 너희들 덕분에 살았어. 안 그래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거든.”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다행히 끝까지 아무도 정령인 걸 눈치채지 못하더라고요.”

“아, 맞아. 나도 그렇게 거대하고 아름다운 늑대는 태어나서 처음 봤어. 그게 물의 정령이라는 거지?”

“네, 상급 정령인 시큐엘이에요.”

“헉! 사, 상급 정령? 그럼 라이가 상급 정령사란 말이야?”

쏟아지는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이사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상급 정령사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존재다. 모두가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은 정령왕의 계약자지만.’

나는 차마 밝힐 수 없는 사실을 속으로 삼켰다. 아마 이것이 알려지면 세상이 들썩일 정도로 엄청난 파장이 일 것이 뻔했다. 아직은 조용히 숨죽이고 감춰야 할 때였다.

“굉장하다, 라이! 상급 정령사라니! 그건 그냥 조금 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그러게 말이야. 마스터 마법사보다 귀하다는 상급 정령사가 설마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었을 줄이야.”

“어떻게 보면 그 영주 아들놈은 운이 좋은 거네. 상급 정령에게 공격을 받고도 살아 있는 거니까.”

“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아무튼 그 녀석은 한동안은 꼼짝도 못 한다는 것 같아. 듣자니 갈비뼈에 금이 갔다고 하더라고.”

“흥, 꼴좋다. 그러게 감히 누구 여자를 넘봐? 그냥 확 거세를 시켰어야 했는데.”

마지막 헤롤의 말은 그 언젠가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쉐리의 강간을 모의했던 용병들에게 휴센이 친절히 복수했던 사건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장면을 상기했는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불현듯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아차, 그러고 보니 영주 아들이 돈을 가져갔는데……!”

“응? 돈이라니?”

“여러분이 유족들에게 전달한 돈이요. 그 사람들이 여러분을 방면하려고 그 돈을 영주 아들에게 바쳤거든요.”

“이런…… 그게 정말이야?”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휴센 일행은 모두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이사나 역시 침울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기껏 말끔하게 해결된 일이 뜻밖의 부분에서 찝찝하게 끝나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무거운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던 트로웰이 품을 뒤지더니 그 안에서 묵직한 자루를 꺼내 보이는 게 아닌가.

“돈이라면, 이거 말이야?”

“어? 그, 그거 뭐야, 매튜?”

대체 왜 저걸 트로웰이 가지고 있는 거지?

착각이 아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분명 유족들 손에서 영주의 아들에게 건네졌던 바로 그 금화 자루가 틀림없었다. 당황해서 바라보자 그는 자루를 가볍게 허공으로 던졌다 받으며 웃었다.

“아까 구하러 갔을 때 품속에 있는 게 보였거든. 그래서 슬쩍했지.”

“……!”

즉, 훔쳤다는 말이었다.

정령왕이 소매치기를 하다니! 하지만 황당한 기분은 잠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폐부까지 상쾌하리만치 유쾌한 느낌이 더 컸다. 한동안 멍해져 있던 다른 일행들도 모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역시 매튜다! 정말 잘했어!”

“아, 진짜 통쾌하다! 이거 완전 엄청난 반전 아냐?”

“나중에 영주 아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볼만하겠네.”

“아이고, 배야! 웃겨 죽을 것 같아!”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이후로 찾아온 것은 더 이상 즐겁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점차 잔웃음이 그치고, 다시금 고요한 공기가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은 조금 전까지 있던 곳과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된 것 같았다.

“……”

“…….”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일행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들 모두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어차피 이런 일은 또 반복되겠지?”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연 사람은 쉐리였다. 그녀의 말에 이릴 역시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그 영주의 아들이 변할 리는 없으니까. 비단 이곳만이 아니라 다른 영지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할거야. 이제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나?”

“젠장, 호의로 베푼 것도 빼앗기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정말 거지 같은 세상이야.”

중얼거리는 그들의 얼굴은 저마다 삶에 대한 짙은 회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코웰이나 다른 용병들이 그랬던 것처럼, 늘 활기차고 밝아보이던 그들 또한 이 세상을 개탄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 한없이 우울해진 분위기를 달래기 시작한 사람은 뜻밖에도 헤롤이었다.

“자자, 모두 기운들 내라고. 지금은 시국이 어려우니까 할 수 없잖아. 그래도 언젠가는 좋아지지 않겠어?”

“뭐야, 헤롤. 너야말로 맨날 투덜거렸으면서. 앞장서서 불만을 토로할 땐 언제고 왜 갑자기 낙관적이 된 거야?”

일행들에게도 그의 행동은 의외였는지 바라보는 눈길이 의아했다. 헤롤은 머쓱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게 아니라, 전에 엘이 그러더라고. 갑자기 세상이 좋아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높은 사람 중에서도 분명 괜찮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이지. 그 말을 듣고 나니 또 그럴 법도 한 것 같아서.”

“헤에, 엘이 그렇게 말했어?”

그 즉시 쏟아지는 시선들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언젠가 이사나를 두둔하기 위해 주장했던 말인데 그걸 계속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엘은 신관 지망생이니까.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심어 주려고 노력할 것 같아.”

“으음, 딱히 그렇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무엇이든 좋게 생각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언젠가는 다 좋아진다고 여기고 살아야죠.”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

“될 겁니다.”

차분하게 울린 음성은 내가 아닌 다른 쪽에서 울렸다. 바로 이사나였다.

휴센 일행은 멍하니 고개를 들고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 때보다 결연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반드시 좋아지는 날이 올 겁니다. 부패하지 않은 관리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은 관리를 믿고 따를 수 있는 세상이. 그래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분명히 올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삼킨 뒷말이 귓가에 선연히 들리는 듯했다.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고 여긴 걸까. 이사나가 말을 마친 후에도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 고요해서 모처럼 용기를 낸 이사나가 무안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때 휴센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는 세상이라……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좋겠군.”

“오, 올 겁니다.”

“좋아,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묻자. 라이, 넌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지?”

“군주에게 필요한 것?”

“그래.”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이사나는 잠시간 우물거렸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힘입니다.”

“……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힘. 또한 이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힘 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이라…….

아마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갖기 어려운 힘이 아닐까? 지금의 이사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대답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그가 겪어 온 번민과 진심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답이 마음에 든 건 휴센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굳어 있던 얼굴을 펴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거 정말 멋진 대답이구나.”

이후 이사나는 순식간에 일행들과 친해졌다. 지금까지는 내 뒤에 숨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데다 조용하기만 한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일행들은 내성적인 그를 묘하게 꺼렸고, 이사나 역시 그것을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그를 대하는 샴페인 용병단의 태도도 그랬지만, 이사나 자체도 이전보다는 한층 적극적인 자세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 그가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구경했다. 처음엔 인사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그때 누군가 내 옆에 팔짱을 끼고 서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트로웰이었다.

『네 계약자, 표정이 점점 쓸 만해지고 있네.』

『정말?』

『응. 처음보다는 확실히 좋아졌어.』

『헤헤, 역시 황제는 황제인가 봐. 평범한 것 같다가도 가만 보면 생각이 남다르다니까.』

계약자이기 때문일까. 내가 칭찬을 받은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든 마음껏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자 트로웰이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엘, 네 영향인 것 같은데?』

『응? 그치만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니, 분명히 네 영향이야.』

『그, 그래?』

머쓱해하는 내게 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생기면 강해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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