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87화 (87/608)

제87화

“으, 으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지고 한 발짝 물러난 병사들 사이로 새파란 형체가 우아하게 내려앉았다. 그것은 물로 이뤄진 거대한 늑대의 모습이었다. 푸르른 색의 투명한 눈동자가 흘끗 나를 훑더니 병사들을 향해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냈다. 빠르게 스쳐 가는 갈기 속에서 옅은 물기가 느껴졌다.

‘시큐엘?’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멀찍이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이사나였다. 아무래도 내 뒤를 쫓아 나온 모양이었다.

“괴, 괴물이다!”

갑작스러운 늑대의 등장에 병사들은 혼비백산했다. 정령의 존재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다들 시큐엘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저건 대체 뭐지? 처음 보는 몬스터인데!”

“마수일지도 모릅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도련님!”

“마, 마수라고!”

이미 한 차례 두 마리의 마수가 나타난 전적이 있는 곳이다. 덩치가 매우 큰 만큼 시큐엘 역시 충분히 마수로 오해할 만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매우 기분이 나쁜 말이었다.

‘괴물이라니! 시큐엘의 어디가 괴물 같이 생겼단 거야? 완전 멋지기만 하구만!’

“크르르르!”

그러자 내 기분이 전염됐는지 시큐엘 역시 이를 드러내고 분노를 표현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더욱 기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사이 근처로 다가온 이사나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엘, 괜찮아?”

“이사나, 어떻게 된 거야?”

“미안, 아무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따라왔어. 뭔가 곤란한 일을 겪는 것 같기에 시큐엘을 불렀는데…… 혹시 내가 괜한 관여를 한 건 아니지?”

“아냐, 잘했어. 귀찮았었는데 덕분에 살았어.”

내 대답에 이사나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우르릉 거대한 울림과 함께 영주관의 방벽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시큐엘이 달려들어 깨부순 것이다.

“도련님! 이쪽으로!”

“어, 어서 아버지께 알려라! 어서!”

영주의 아들이 외치자 병사들 중 몇몇이 급히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것을 본 이사나가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 틈에 얼른 달아나자. 곧 사람들이 더 몰려나올 거야.”

이사나는 급히 내 팔을 붙잡고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따라가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엘?”

도망가기에도 바쁜 시간에 가만히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이사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관 앞에선 여전히 시큐엘이 포효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마다 기겁한 병사들이 엉거주춤 바닥에 엎드려졌다. 그 모습에서 전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 * *

“으아아악! 사람 살려!”

요란한 고함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우렁찬 비명의 주인은 바로 영주의 큰아들이었다.

현재 그는 시큐엘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영주관의 지붕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퉁퉁 부운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얼룩져 있었고 멀끔했던 비단옷은 시큐엘의 이빨에 물리고 찢긴 흔적으로 온통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쿠웅! 거대한 발톱이 찍힐 때마다 지붕을 덮은 장식들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허물어진 벽과 뭉개진 철문으로 인해 이미 저택을 비롯한 근방은 마치 폭격이라도 당한 듯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모두 시큐엘이 조금 전까지 날뛴 결과물이었다.

“알키노!”

쩔쩔매는 병사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크게 소리쳤다. 고급스러운 정장을 걸친 채 투박한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노령의 남자였다. 지붕에서 비명이 터져 나올 때마다 남자의 얼굴 또한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가 바로 저 망나니의 부친이자 이 마을을 다스리는 할버크의 영주였다.

“다들 뭘 하는 거냐! 어서 알키노를 구하지 않고!”

소식을 받고 달려온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무작정 재촉한다고 해서 지붕 위의 마수(실제론 정령이지만)를 공격할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주의 큰아들을 인질로 삼은 상태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까지 다칠 우려가 있는 만큼 병사들은 누구하나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엘,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나는 옆에서 속삭이는 이사나를 향해 씩 웃었다.

“괜찮아, 그냥 겁만 주는 건데, 뭐. 저 사람들은 좀 당해 봐야 해.”

“하지만 그러다 들키면 어떡해.”

“안 들켜. 시큐엘의 정체도 못 알아보는 사람들이잖아. 어쩌다 운 좋게 정령인 걸 알게 된다고 해도 여기 사람들 수준으로는 정령사의 위치까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있어. 솔직히 속 시원하지 않아?”

내 질문에 이사나는 잠시간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천천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 보였다. 사실 혼쭐을 내 주고 싶은 마음은 나보다 그가 더 굴뚝같았을 터, 이 순간이 통쾌한 것이 당연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우리는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금 우리들은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시큐엘의 활약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위엔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 어슴푸레 날이 저물어 가는 시각, 갑자기 일어난 소동을 느끼고 몰려나온 마을 사람들이었다.

어리둥절해서 나온 사람들은 지붕 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영주의 아들을 발견하고 모두 황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사람에 비해 대부분은 영화를 관람하듯 즐거운 시선이었다. 사상자가 나왔다면 결과가 달랐겠지만 사태가 그 정도로는 심각하지 않은 데다, 오직 영주관만 집중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 듯했다. 전부 나와 이사나가 계획한 일들이었다.

“영주님! 지붕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에이잇! 활을 쏴라! 당장 저 마수를 쏘아 맞히란 말이다!”

“도련님이 화살에 맞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이대로 수수방관하고 있을 거냐! 저러다 내 아들이 죽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대책을 세우란 말이다, 대책을!”

영주의 노호성이 울려 퍼질 때마다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나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진행 과정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그들 선에서는 무슨 수를 쓰든 시큐엘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상급 정령이란 타이틀은 폼으로 달고 있는 게 아니니까. 이대로 계속 궁지에 몰린다면 영주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영주가 옆에 있던 병사들을 향해 무어라 지시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어디론가 사라진 병사들이 곧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바로 샴페인 용병단, 휴센 일행이었다.

“와아아!”

이미 유명 인사인 만큼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마치 경기 시작 전 선수의 입장을 보는 것처럼 곳곳에서 환호성과 뜨거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비해 휴센 일행은 그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전후 설명 없이 무작정 데리고 나온 것인지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내 아들을 살려 주시오!”

다짜고짜 내뱉은 영주의 요청에 휴센 일행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시큐엘이 지붕에서 날뛰고 있는 현장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뭐야, 저건.”

황당해하는 휴센 일행을 향해 영주는 다급히 애원했다.

“제발 도와주시오! 마수가 내 아들을 공격하고 있소!”

“……마수?”

“아들을 무사히 구출만 해 준다면 오늘 만찬에서의 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방면할 것이오! 뿐만이 아니라 충분한 포상도 지급하겠소!”

영주의 말에 휴센 일행은 서로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들의 입장에선 얌전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느닷없이 이상한 상황에 휘말렸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대체 저게 뭡니까?”

“보면 모르오? 마수잖소!”

“하지만 저건…….”

휴센은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마수를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때 휴센의 옆에 서있던 트로웰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휴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영주의 시선을 피해 슬쩍 내 쪽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와 이사나를 발견한 휴센이 입을 꾹 다물었다. 드디어 모든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흠, 알겠습니다. 아드님을 구해 드리지요.”

“하, 할 수 있겠소?”

“솔직히 자신하긴 어렵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마수라서요.”

“그, 그렇게 흉포한 놈이오?”

기겁한 영주를 향해 휴센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람을 산 채로 하나씩 끊어 먹는 식성을 가진 마수라는 둥, 지금까지 몰살시킨 영지만 몇 개라는 둥, 대부분 잔뜩 겁을 집어먹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한순간에 시큐엘은 식인을 즐기는 데다, 마계를 마음대로 오가는 것이 가능하고, 툭하면 마을을 전멸시키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잔인한 마수가 됐다. 설명을 전부 들은 영주가 하얗게 질리자, 휴센은 매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튼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저 마수를 죽이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이오! 설마 전혀 방법이 없겠소?”

“말씀드렸다시피 죽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거의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마수라서 죽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공격을 하면 더 흉포해질 공산만 큽니다. 하지만 그냥 쫓아내는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그, 그럼 마수가 다시 돌아오진 않겠소?”

“아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마수의 유일한 특성이 바로 같은 장소에는 두 번 다시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거든요. 일단 한번 돌려보내면, 이 마을에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혹시 천부적인 사기꾼 기질이 있는 게 아닐까. 마치 처음부터 짜 맞춘 사람처럼 휴센은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로군! 그럼 그렇게라도 해 주시오. 내 모든 걸 그대들에게 맡기리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 조건?”

영주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휴센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상금은 필요 없습니다. 그 대신 저희에게 이번 일을 사과해 주십시오.”

“무슨……!”

“비록 저희 측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고는 하나 원인은 분명 아드님께서 제 일행들을 희롱한 탓이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무, 무엄하군! 감히 귀족인 내게……!”

“한낱 용병이라 해도 지켜야 할 자긍심과 명예가 있습니다. 할버크의 영주께선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무시하시는 분이셨습니까?”

싸늘하게 쏘아붙인 말에 영주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간 굳어진 얼굴로 휴센을 응시하던 영주는 이내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망설이듯 한참을 벌어지지 않던 입매가 곧 결심을 굳혔는지 단호하게 열리는 것이 보였다.

“……끄응, 알겠소. 그건 내 아들이 잘못한 일이 분명하오. 내 이렇게 사과하겠소.”

물론 기대했던 것만큼 정중하고 진중한 사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휴센 일행은 충분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아마 귀족에게서 사과를 받았다는 자체에 의의를 둔 것 같았다. 매섭던 분위기가 한층 풀어지며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도는 것이 보였다.

“어려운 결단이셨을 텐데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드님을 생각하시는 영주님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그럼 이제 내 아들을 구해 주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지금 바로 구출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내 아들만 무사히 살아난다면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

“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지하게 답하는 휴센의 얼굴에선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함이 느껴졌다. 누가 보기에도 크나큰 전투를 앞두고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 상태에서 심각하게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자, 다들 시작하지.”

“으음, 알겠어. 근데 단장, 저거 진짜 마수 맞아?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건데.”

아직 진실을 알지 못하는 단원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휴센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내 말을 못 믿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시간이 없으니 바로 진행하자. 매튜, 네가 제일 몸이 빠르니까 지붕으로 올라가서 마수를 유인하도록 해.”

“네.”

태연한 반응은 트로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간 몸을 푸는 시늉을 한 그는 단 두 번의 도약만으로 가볍게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사다리를 가져오기 위해 밑에서 아등바등하고 있던 병사들이 모두 멍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움찔한 건 바로 시큐엘이었다. 아무리 유희 중이라곤 해도 정령왕은 정령왕. 설마 트로웰과 직접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지 눈동자가 안쓰러울 만큼 떨리고 있었다. 축 늘어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곧추세운 귀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트로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자, 덤벼 봐, 마수 씨.”

“…….”

‘미안하다, 시큐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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