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다음 날부터 휴센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쉐리가 노골적으로 그를 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종종 그의 시선을 끌 목적으로 비슷한 일이 있었던 같긴 했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말을 걸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웃기도 하면서도 그와 단둘이 있는 자리는 피하거나, 똑바로 시선을 맞추는 법이 없었다. 최근 들어 무난히 지내 왔기 때문인지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졌다.
제삼자인 나조차 확연히 느껴지는 차이를 휴센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참다 못했는지 그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쉐리,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얘기를 해.”
“으응? 뭐가?”
“아까부터 날 전혀 보고 있지 않잖아. 혹시 어제 일 때문에 아직도 화나 있는 거냐? 그런 거라면…….”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쉐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곤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이번에도 역시 휴센은 끝까지 바라보지 않은 채였다. 그 모습에 이릴이 살짝 휘파람을 불었다.
“어머나, 이번엔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네. 축하해, 휴센.”
“그게 무슨 뜻이지, 이릴?”
“무슨 소리긴. 쉐리의 반응을 보면 몰라? 제대로 마음을 정리하려는 거잖아.”
“……뭐?”
“하긴 이제 정말 지칠 때가 됐지. 그동안 혼자서 내내 힘들어하더니 잘 생각했네. 휴센도 계속 바라던 일 아니었어?”
“…….”
그 순간 휴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쉐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굳어진 얼굴만큼이나 다급한 모습이었다. 빠르게 사라지는 그를 본 일행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헤에, 뭐야. 마음이 달라진 건 휴센도 마찬가지인가?”
“조만간 저 둘 사이에도 봄바람이 불겠군.”
황당해하는 이릴의 옆에서 헤롤이 낮게 키득거렸다. 이미 한 차례 격동의 과정을 지나고 나서인지 두 사람은 매우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그와 다르게 마이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젠장, 그건 안 돼! 나의 쉐리가!”
“어허, 그럼 못써, 마이티. 이럴 때는 그냥 조용히 지켜보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뭐야? 왜 내가 도와줘야 하는데!”
“그럼 굳이 이런 순간에 따라가서 훼방을 놔야겠냐? 너 인마,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심보가 저러니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지. 안 그래, 자기?”
“응응, 자기. 우리 자기 말이 다 맞아.”
서로 솔직해진 탓일까. 사귀기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우기 바쁘더니, 마음을 확인하고 난 뒤로 그들은 이렇게 손발이 잘 맞는 팀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았다.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닭살 행각에 마이티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닥쳐! 이 한 쌍의 바퀴벌레 같은 놈들아! 커플이 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냐?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았다고 붙어 있어?”
“헷, 부럽냐? 그럼 그냥 솔직하게 그렇다고 해.”
“내버려 둬, 자기. 불쌍하잖아. 얼마나 배가 아프면 저러겠어?”
“거참, 왜 연애를 안 하고 사나 몰라? 이렇게 좋은 걸. 그치, 자기?”
“우후후, 자기는 바보구나. 저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야.”
“그런가? 하하, 역시 우리 자기는 똑똑하다니까.”
“으아아! 이 망할 커플 따위! 다 죽어 버려!”
마이티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광분을 터뜨렸다. 물론 그것을 신경 쓸 두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보란 듯 그 앞에서 애정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아악! 그만해! 그만하라고!”
“하하하! 마음껏 부러워해라, 이 패배자!”
나는 점점 더 짙어지는 그들의 애정 행각에서 시선을 돌리며 먼 허공을 훑었다. 이 순간 괜히 가슴이 뜨끔해지는 건 결코 내가 솔로라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 * *
떠나는 날이 가까워지자 머물고 있는 숙소엔 방문객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모두 샴페인 용병단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마수를 잡은 활약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이름은 이 일대에 상당히 유명해진 상태였다. 언뜻 들려오는 얘기론 저녁 만찬에 초대한 귀족들도 상당수 있다고 하던데, 휴센은 그에 대해선 아무런 내색도 비치지 않았다. 서신을 받아도 바로 그 자리에서 돌려보내는 것을 보면 애초에 전혀 고려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다른 용병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매우 부러워했다.
“햐, 정말 멋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냥 첨부터 따라가는 건데 그랬어. 그럼 적어도 저분들의 활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설마 마수를 그렇게 간단하게 잡을 줄 누가 알았겠어? 정말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들이라니까.”
변화는 나와 이사나의 주변에서도 나타났다. 이전까지는 그저 샴페인 용병단 틈에 묻어가는 덤들로 보는 눈이었다면, 이젠 어느 정도는 제 몫을 하는 사람으로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신관이나 정령사나 아무래도 흔한 직업(?)은 아니다 보니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의 나이가 어린 데다 직접적으로 활약하는 걸 보지 못해서인지 특별히 주목을 받는 느낌은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우리를 바로 옆에 두고서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이른 아침, 둘러앉은 식탁 위엔 호화로운 음식들이 즐비하게 차려져 있었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솜씨를 발휘한 것으로, 이 마을에서 즐기는 마지막 만찬이었다.
본래는 샴페인 용병단원들도 이 자리에 함께 있어야 했지만 그들은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상단주를 만나러 간 상태였다. 처분한 마수의 값을 수금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지금 식당 안은 그로 인한 화제로 달아올라 있었다.
“베히모스가 두 마리나 되니까 값도 엄청나겠지?”
“당연하지. 아마 이번 의뢰를 완수하고 받는 돈보다 그걸로 번 돈이 훨씬 더 많을걸?”
“하루아침에 떼돈을 벌다니 진짜 부럽다. 어쩐지 오늘따라 다들 분위기가 좋아 보이더라니.”
“그러게. 아주 화기애애하더라. 특히 휴센 씨 얼굴이 굉장히 밝더라고. 그렇게 좋은 표정은 처음 봤어.”
“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그 돈이면 몇 달을 호의호식하면서 놀고먹을 수 있을 거 아냐.”
수군거리는 소리에 나와 이사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휴센이 기분이 좋은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그날 그렇게 나가 버린 두 사람은 한참 만에야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딱히 정확한 결과를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한층 친밀해져 있었고, 조금은 후련한 듯 밝아진 얼굴이었다. 그것만으로 대충 어떻게 됐는지는 짐작이 가능했다.
“야, 그런데 그 얘기 들었어? 이번 마수한테 당한 희생자들 말이야. 유족들이 보상금을 한 푼도 못 받는 것 같더라.”
그 순간 누군가 한 말에 수프를 뜨던 이사나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역시 모두 말을 꺼낸 용병을 향해 있었다.
“보상을 못 받는다고? 아니, 왜?”
“그게 좀 황당해. 죽은 사람들이 원래 정식으로 고용된 일꾼들이 아니라 잡일을 좀 거들어 주면서 이삭줍기를 하던 사람들이었던 모양이야. 허가받지 않은 농지에 무단으로 들어간 셈이니 보상의 책임도 없다고 했다더라.”
“아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이삭줍기는 원래 작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관례 같은 거잖아.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그거라도 주워서 겨우 끼니 연명하는 건데, 그걸 문제 삼으면 어쩌자는 거야?”
“누가 아니래? 아무튼 그래서 지금 다들 분위기가 안 좋은 모양이야. 이런 와중에 영주의 아들이란 놈은 윤락가에 가서 흥청망청 놀고 있다더라.”
“거참, 여기도 단단히 썩었군.”
“말하면 뭘 해? 이놈의 나라가 어디 정상인 곳이 있긴 하겠어?”
“유족들만 안 된 거지, 뭐.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었으니 먹고살 길이 막막하겠군.”
잠시간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든 화제는 곧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안타깝다고 해도 어차피 남의 사정일 뿐,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겐 그저 지나가는 잡담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이사나는 완전히 스푼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나는 굳어진 그의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이야기가 신경 쓰여?”
“으음, 그냥 좀…….”
“입맛이 없어도 그냥 먹어 둬. 앞으로 한동안 또 노숙을 하게 될 텐데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야지.”
“응, 그럴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엘.”
어색하게 답한 그는 느린 속도로 식사를 마저 이어 나갔다. 억지로 먹고는 있지만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 조금 전 대화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뻔했다. 아마 또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겠지.
내가 아무리 위로를 건네도 그의 입장에선 완전한 위안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정령이고, 인간과는 다른 존재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
“응?”
“전부 다 좋아질 거야.”
“……고마워, 엘.”
짧은 침묵 끝에 이사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그가 이렇게 이 제국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아준다면 좋을 텐데. 앞으로 한동안 홀로 죄책감에 시달릴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언젠가는 그의 진심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오길 바랄 뿐이었다.
* * *
“자, 이거 받아라.”
식사를 마친 후 휴센은 우리에게 큼직한 자루를 하나 내밀었다. 척 보기에도 제법 무게가 나가 보이는 자루였다. 얼결에 받아든 나는 자루 속을 확인하고 흠칫 놀랐다. 묵직함만큼이나 번쩍이는 금화가 안쪽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게 뭐예요, 휴센?”
내 질문에 그는 흐뭇한 얼굴로 대꾸했다.
“마수를 매입하고 받은 금액의 반이다. 너희도 마수를 잡는 일을 도왔으니 수익은 함께 나눠야지.”
“그렇다고 절반씩이나 주시는 건…….”
“한 마리는 라이가 혼자 잡은 거나 다름없으니 당연한 일이지. 부담 가질 필요 없다. 정당한 몫을 받는 거니까.”
누가 강직한 휴센 아니랄까 봐 배분하는 방식도 지극히 그다웠다. 경비는 충분했지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나는 난처한 기분으로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사나도 개인 비상금은 필요할 텐데…….’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그에게 용돈을 따로 챙겨 준 적이 없었다. 돈을 줘도 받을 리도 없고, 필요한 건 내가 알아서 충당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사나도 딱히 그것을 불편해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창 갖고 싶은 게 많을 시기니만큼 신경이 쓰였다. 그의 성격상 내가 권하기까지 먼저 요구하지는 못할 테니까.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결정권을 주기로 했다.
“자, 라이. 받아.”
“으응? 왜 내게?”
“너한테 주시는 거잖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금화가 든 자루를 넘기자 이사나는 멍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아마 그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가져 보는 ‘자신만의 돈’이 아닐까? 황성에서는 물론이고 나를 만나기 전에도 기사들이 다 알아서 했을 테니 직접 돈을 관리할 기회는 가져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궁금했다. 이사나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자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무언가 결심을 굳힌 얼굴이 되어 있었다.
“저…… 이 돈, 정말 제가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겁니까?”
“그래, 네 몫이다.”
“그럼 부탁을 한 가지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뜻밖의 말이었는지 휴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이사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를 향해 자루를 내밀었다.
“이 돈은 제 대신 유족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마수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 말입니다.”
“……!”
설마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이야. 생각지 못한 선택에 나는 속으로 매우 감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크게 놀란 건 샴페인 용병단원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심이냐?”
“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이번 일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유족들일 겁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진지한 대답에 말문을 잃은 것일까. 휴센은 한동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진위를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감동하는 것 같기도 했다.
“라이, 너는…… 으음, 아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내 생각이 짧았군. 유족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흠, 그렇구나.”
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이사나의 모습을 훑었다. 그를 향한 시선이 이전보다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라이. 네 몫만이 아니라 마수를 팔아 받은 금액 전부를 그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말이야.”
“네? 그, 그러셔도 됩니까?”
파격적인 결정에 이사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절반의 금액만으로도 한 자루를 묵직하게 채울 수 있을 정도다. 선뜻 내놓기에는 엄청난 금액일 터였다. 당황한 그에게 휴센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린 네가 하는 일을 어른인 우리들이 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신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지.”
“하지만…….”
“괜찮다. 오히려 이런 결정을 내려 줘서 고맙다. 덕분에 시야가 한층 넓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구나.”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휴센은 다시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묘하게 후련한 표정이었다.
“엑? 전부 다 준다고? 그럼 우리 몫은?”
그때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마이티가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건 그의 실수였다. 그 즉시 사방에서 구박하는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멍청아! 눈치 좀 있어라! 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그러게 말이야. 감동할 시간을 안 주네.”
“그, 그치만 저게 다 얼만데! 적어도 성수 값은 남겨야……!”
“됐거든? 쪽팔리니까 앞으로 어디 가서 우리 동료라고 하지 마. 알았어?”
“아무튼 수전노는 이래서 문제라니까.”
마이티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의기투합한 일행들은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마이티의 별명은 수전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