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84화 (84/608)

제84화

“자, 아무래도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요. 불청객은 이쯤에서 자리를 비켜 주죠.”

“아아, 역시 그래야 할 것 같군.”

“어머, 그러고 보니 우리가 너무 눈치가 없었네? 호호, 두 사람 잘해 봐!”

“너, 너희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 할 말은 무슨! 그런 거 없어! 없다고!”

일행들이 방에서 나가려고 하자 이릴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특히, 헤롤은 전혀 도와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난 있어, 이릴.”

“……!”

“그냥 내보내는 게 나을 거야. 난 괜찮아도 너는 꽤 민망할 테니까.”

원래 헤롤이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던가? 늘 구박당하고 발끈하는 모습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진지한 그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니 이 상황에 직면한 당사자인 이릴은 더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며 우리가 방을 나설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방 안엔 온전히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고 했으면 좋았을 뻔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사람들이 살짝 문틈을 내어 방 안을 염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투에 뼈가 굵은 사람들답게, 그들은 매우 능숙하게 기척을 숨겼다.

“이, 이래도 될까요? 두 사람이 알면…….”

“쉿! 글쎄, 괜찮다니까. 이렇게 된 이상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지켜봐 주는 게 예의지.”

‘……저 안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헤롤도 그렇고 이릴도 역시 이쪽의 상황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마 너무 긴장한 나머지 다른 주변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 안에선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헤롤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고, 이릴은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애먼 입술만 악무는 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줄을 타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헤롤이 번쩍 고개를 들더니 주위의 침묵을 단번에 깨트렸다.

“에잇!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그냥 사귀자, 이릴.”

단순한 헤롤답게 시작부터 바로 정공법이었다. 이릴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 뭐야? 너 미쳤니?”

“뭐, 어떠냐? 지금 우리가 서로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젊고 혼기도 꽉 찬 남녀가 만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소리를 대놓고……!”

“그럼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데? 너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 솔직히 나 아니면 누가 너 같은 마녀를 바라보겠냐? 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세상, 여자를 위해 마수 앞에 뛰어드는 용병이 어디 흔한 줄 알아? 넌 봉 잡은 거라고.”

“우, 웃기지 마!”

이릴은 불쾌한 얼굴로 소리쳤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멋없는(아니, 오히려 시비를 거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프러포즈를 그녀인들 기쁘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다툼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대체 내 어디가 부족한데?”

“그럼 너의 어디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너, 꿈이 너무 큰 거 아니니? 아니면 날 만만히 보는 거야? 목숨 바쳐서 구해 주면 기겁하며 사귀어 줄 여자로 보여?”

“누가 그렇대? 그만큼 내 사랑이 지고지순하단 뜻이잖아.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먹어?”

“그래! 못 알아먹겠다! 내가 너와 사귀어야 할 이유를 대 봐! 그럼 생각이라도 한번 해 볼 테니까. 대체 무슨 심보야? 이제까지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던 주제에!”

앙칼지게 맞받아치는 말에 헤롤은 신경질이 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원하던 분위기는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럼 어떡하냐? 네가 날 그렇게 싫어하는데.”

“하아?”

“나라고 자존심도 없는 줄 아냐? 싫어하는 사람한테 일방적으로 열 낼 수는 없잖아. 그나마 동료 취급이라도 받으려면 얌전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호오, 그러셔? 그러던 마음이 왜 갑자기 변하셨나? 막상 죽을 것 같으니까 아까워졌나 보지? 그래서 이때가 기회라고 고백한 거야? 그렇다면 넌 대단히 이기적인 놈이야, 헤롤. 만약 그때 네가 그런 식으로 죽었으면 나는 뭐가 되니?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라는 거냐고!”

“우씨! 그래! 그렇게라도 날 기억해 주길 바랐다. 왜, 그럼 안 되냐?”

“뭐, 뭐라고?”

쏟아지는 비난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헤롤이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는 당황한 이릴을 노려보다시피 응시하며 입술을 악물었다.

“내가 이기적인 놈인 거 이제 알았어? 그동안 좋아한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네가 날 알아주길 바랐다고.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 마지막인데 좋아한단 고백도 못 해? 사실 나도 무지 고민했어. 과연 해도 좋은 말인지 어떨지! 근데 네가 막상 딴 놈이랑 행복하게 살 미래를 생각하니까 속이 뒤집어지는 걸 어쩌라고!”

“…….”

“그래도 살았잖냐? 살았으니까 이제 기회를 버리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거잖아! 그걸 그렇게 못 봐 주겠냐? 용병이란 게 언제 황천길을 오락가락할지 모르는 직업인데, 그 전에 사랑하는 여자랑 연애 한 번 해 보자는 게 그렇게 어이없냐고!”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지만 헤롤은 이릴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다시 소리쳤다.

“사귀어야 할 이유를 대 보라고? 그게 널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할 소리냐? 이릴, 너 정말 그렇게 잔인하게 나오기야? 젠장, 이런 여자를 사랑하는 나도 미쳤지.”

“…….”

“하, 아무튼 대단한 여자야. 자존심도 강하고 성격도 더럽고, 심지어 포악하기까지. 게다가 그뿐이야? 다가오는 사람은 밀어내기 바쁘면서 무조건 자신에게 맞춰 주기만을 바라지. 네가 그러니까 평생 연애를 못 하는 거야.”

“……너 지금 시비 거는 거야?”

“근데 더 미치겠는 게 뭔지 아냐? 그런데도 포기가 안 된다는 거야. 황당하지? 그럴 거다. 나도 지금 내가 황당하니까. 근데 이게 정말 어쩔 수가 없거든. 내 마음인데 내 뜻대로 조종이 안 돼. 뭐, 이런 거지 같은 일이 다 있냐? 안 그래?”

기가 막힌 듯 묻는 말에 이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헤롤 역시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두 팔 사이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그러나 그 상태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는 굳어 있는 이릴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조금 전보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귈 이유라고 했지. 그래, 좋아. 이렇게 하자. 앞으로 무슨 일이건 무조건 너한테 전부 맞출게.”

“뭐?”

“여왕님 모시듯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굽히라면 굽힐게. 네 짜증이며 신경질, 구박도 전부 다 말없이 받아 준다고. 나 그거 하나만은 정말 잘할 자신 있다. 아마 이 세상에서 널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남자는 나밖에 없을걸? 그래도 정말 안 되겠냐?”

“…….”

“마지막 기회야. 잘 생각해, 이릴. 나 지금 이 시간 이후론 다시는 너 안 잡아. 너 내가 다른 여자하고 결혼해도 괜찮겠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가 매달릴 때 잡으란 말이야.”

헤롤은 그대로 한 팔을 내밀었다. 침대에 앉아 반쯤은 이불에 덮인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포즈만큼은 개선문에 이른 장군처럼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이리 와.”

“…….”

놀라운 것은 이릴의 반응이었다. 언제까지고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가 천천히 헤롤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저러다 명치에 어퍼컷을 날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지켜보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지척에 이른 즉시 그녀가 망설임 없이 헤롤의 목을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에 나는 무심코 숨을 멈췄다. 충격을 받은 건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모두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굳어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이릴도 헤롤에게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군.”

“허허허, 그러게 말이야. 우와, 이거 미치겠네. 오늘 여러 가지로 진귀한 경험한다. 게다가 헤롤 저 자식, 저걸 지금 프러포즈라고 하는 거야? 저건 암만 봐도 마녀의 머슴 계약이잖아. 아무튼 저놈이 남자 망신은 다 시킨다니까.”

“……멋지다…….”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사람은 쉐리였다. 그녀의 두 뺨은 상기된 채, 맹렬할 정도로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여자애라 그런가, 이런 장면에 더 쉽게 감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기회라고 여겼는지 마이티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쉐리! 고백할게! 나도 오래전부터 너를……!”

“됐거든?”

물론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쉐리는 눈물을 삼키는 마이티를 무시한 채, 바로 옆에 있던 휴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뻔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오래지 않아 무너졌다. 난처한 표정을 지은 휴센이 바로 눈길을 피한 것이다.

“…….”

“…….”

잠시간 응시하는 눈빛이 흔들리고, 쉐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입술을 꾹 악문 채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쉐, 쉐리! 같이 가!”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마이티가 급히 쫓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휴센은 계속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트로웰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당신도 참 솔직하지 못하네요, 휴센.”

“나는…….”

“내게 변명할 필요 없어요. 그것이 당신의 정의라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죠.”

“…….”

곧 트로웰 역시 먼저 자리를 떠나고, 텅 빈 복도엔 나와 휴센 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서있는 휴센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기요, 휴센. 제가 나설 일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요. 어떤 게 더 중요한 일인지 조금 더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무슨……?”

“조금 전의 헤롤처럼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존심도 이익도 전부 버렸잖아요. 제가 만약 상대의 입장이라면 주위를 의식하기보다 나를 더 우선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 감동할 것 같거든요. 사소한 것에 집착하다가 가장 소중한 걸 놓치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억울하지 않을까요?”

“…….”

휴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에 빠진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개선될 여지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십 대는 아직 젊어요, 휴센. 마음의 결정을 내릴 거면 조금이라도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서른 넘어서 장가들면 그때야말로 도둑놈 소리 듣는다구요.”

“……쿨럭.”

아마 휴센은 이 말을 절대로 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그가 고민하고 있을 가장 현실적인 문제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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