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이후 나와 카이테인은 공터에 앉아 한동안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나는 그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 님, 혹시 이전에도 엘뤼엔의 사제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제가 직접 꾸민 건 아니에요. 아픈 아이가 있어서 치료를 해 줬더니 저를 사제로 오해하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헤어진 기사들도 그 사건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레이라고 했던가? 훗날 그 아이가 목걸이를 가지고 황성으로 찾아올 때를 대비해 기사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사정은 설명해 둔 터였다. 카이테인은 납득한 표정을 지으며 매끄러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아아, 역시. 그 소문은 그것 때문이었군요.”
“네? 무슨 소문이요?”
“모르고 계셨습니까? 실은 삼 일의 기적 이후로 제국에 여러 가지 소문들이 파다합니다. 그중 하나가 현 황제의 뒤를 지키고 있는 신이 형벌의 신 엘뤼엔이라는 것이었지요.”
“엑? 그, 그게 정말이에요?”
당황해서 바라보자 카이테인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 역시 삼 일의 기적을 소문낸 의적단에게서 나온 말이었죠. 국교신인 마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희 같은 작은 교단이 언급되는 것이 조금 이상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해소되었네요.”
“자, 잠깐만요. 설마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건…….”
“아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어차피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니까요.”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여긴 마신을 최고신으로 섬긴다면서요. 교황조차 황제를 찾는 수배령을 내릴 정도인데, 그런 소문을 듣는다면 거기서 시비를 걸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음, 그렇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저도 자세한 연유는 모르겠지만, 마신교에선 저희 교단을 조금 꺼리는 성향이 있더군요. 아마 소문을 낸 기사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꺼린다고요?”
“네, 확실히 꺼립니다. 보통 작은 교단은 큰 세를 지닌 신전 측에서 내정 간섭을 하는 편인데, 저희들은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편의를 봐주려고 했을 정도지요. 지금도 소문이 파다한 상황인데 아직 본교 쪽에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보통은 기실을 확인하기 위한 서신이라도 보내는 것이 정상인데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엘뤼엔 님의 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 엘뤼엔의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이겠지.
나는 목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삼키며 억지로 웃었다. 그 악명이 얼마나 높은지, 마족은 물론 다른 신들조차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했던가. 설마 그것이 인간들 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영향을 보일 줄은 몰랐다.
이 순간, 이 가련하고도 순진한 어린양에게 차마 진실을 알리지 못하는 것이 애달플 뿐이었다.
* * *
헤롤이 의식을 차린 것은 이튿날 늦은 오후였다. 오랫동안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상처가 완전히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 탓에 일행들은 온종일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한 자리를 맴돌고 있는 상태였다.
“으음…….”
“헤롤!”
“나야, 헤롤! 정신이 들어?”
그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일행들은 모두 환해진 얼굴로 침대 앞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작 헤롤은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한참이나 멍하니 눈을 껌뻑거리며 일행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납득하지 못한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거, 혹시 꿈?”
부르튼 입술 사이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질문엔 누구도 대답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킨 그가 눈을 부릅뜬 채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아, 이런 젠장! 뭐야, 너희들! 설마 그깟 마수 하나를 못 이겨서 죄다 죽은 거야?”
“엥?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런 게 아니라면 너희들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 거야! 난 죽었잖아! 죽은 사람과 같은 장소에 있다면 너희들도 당연히 죽은 거 아니야?”
당당한 외침에 일행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깨어났나 했더니 설마 일어나자마자 헛소리를 늘어놓을 줄이야. 다만 그가 아직 정상이 아니라는 것, 그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으음, 잠깐 기다려, 헤롤. 지금 네가 막 일어나서 뭔가 혼동이 온 모양인데…….”
“아아, 됐어. 변명은 하지 말아 줘. 하긴, 그 마수가 좀 강하긴 했어. 이 헤롤 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녀석인데 너희들 정도는 당연히 손쉽게 해치웠겠지. 나 참,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됐어. 내가 다 이해한다니까 그러네. 설마 죽어서까지 너희들과 부대끼며 살게 될 줄 몰랐지만 이게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아무튼 이렇게 되면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군. 자, 그래서 여긴 천국이냐, 지옥이냐?”
“…….”
진지한 질문을 마지막으로 방 안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헤롤은 주변의 기묘하게 굳어진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음으로 이릴을 발견하고는 바로 실망한 얼굴을 했다.
“쳇, 엘이 있어서 천국인가 했더니, 역시 지옥이었던 거냐.”
“……죽을래?”
이릴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두 사람 사이에 잦은 다툼은 이제 일상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번은 다른 때보다 한층 눈빛이 살벌했다. 애틋한 고백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완전히 태도가 달라졌으니 아무래도 더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러자 헤롤이 다급히 두 손을 흔들었다.
“아, 잠깐. 그런 뜻 아니야. 그러니까 뭐랄까…… 이왕이면 너는 살았으면 했거든.”
“……뭐?”
“바보냐, 너?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은 살아 주는 편이 행복하잖아. 너까지 여기로 와 버리면 내가 지켜 준 보람도 없고, 그게 뭐냐?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플 텐데 그게 지옥이 아니면 뭐겠냐고.”
“자, 잠깐! 지금 무슨 소리를!”
그 순간 이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언제나 도도하던 그녀도 이럴 땐 당황하는구나 싶으니 재밌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릴이 여전히 빨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우, 웃지 마, 너희들! 헤롤, 너도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사람들 앞에서 민망하지도 않니?”
“이미 죽었는데 여기서 체면 차릴 게 뭐가 있겠어? 그리고 난 더 이상 내 진심을 숨기지 않기로 했거든.”
“뭐, 뭐?”
경직된 이릴이 말을 잇지 못하자 헤롤은 천천히 몸을 내밀어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점차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이릴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얼어붙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곧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이릴, 난 진심으로 너를…….”
퍼억!
그러나 달콤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지켜보다 못한 마이티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큽!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자식! 아프잖아!”
앞으로 고꾸라진 헤롤은 이를 갈며 마이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이티는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호오? 아프냐? 이미 죽은 주제에 챙기는 것도 많다, 너?”
“에엥? 어라? 그,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이거 뭐지? 영혼도 아픔을 느끼나?”
경험자로서 대답하는 거지만 정답은 ‘아니’다. 애초에 영혼은 무언가에 부딪히거나 닿을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통과해 버리기 일쑤였으니까. 아, 그래도 같은 영혼들끼리는 접촉이 가능했던가? 그럼 부딪힐 때 아플지도?
내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실로 고민하고 있는 동안 일행들은 헤롤을 마구 구박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보자 보자 했더니…… 아주 소설을 써라, 이놈아! 네가 죽긴 왜 죽어?”
“엥? 그럼, 설마…… 내가 안 죽었다고?”
“그래, 보면 모르냐? 몸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하잖아!”
“에엥?”
그제야 부상에 생각이 미쳤는지 헤롤은 급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맨살은 흔한 흉터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는 두 손으로 몸을 더듬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나 분명히 다쳤는데? 근데 왜 상처가 하나도 없지? 게다가 아프지도 않잖아. 잠깐, 그럼 설마…… 내가 마수랑 싸운 것이 꿈?”
“……정신 차려, 인마. 어떻게 된 게 네 머리는 죄다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이 안 돌아가냐? 치료를 했다는 생각은 도무지 못 하겠든?”
“에? 치료? 아! 그러고 보니 성수가 있었지!”
이제야 상황 판단이 되었다는 듯 그는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푹 한숨을 내쉰 쉐리가 말했다.
“그 머리로 거기까지 생각한 것만으로 대단하긴 한데, 아쉽지만 틀렸어. 그 성수, 마이티가 자기 치료할 때 이미 거의 다 써 버렸거든?”
“뭐? 으음…… 맞아, 그건 나도 기억나. 뭐야, 그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헤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자 쉐리가 대뜸 나를 가리켰다.
“생명의 은인은 여기 이쪽에 있는 엘이야. 자, 어서 고맙다고 해, 헤롤.”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엘이 생명의 은인이라니?”
“당연히 치료해 준 사람이 엘이니까 그렇지. 운 좋은 줄 알아, 헤롤. 알고 봤더니 엘이 그냥 단순히 신관 지망생인 정도가 아닌 거 있지? 엄청난 성력을 쓸 수 있더라고.”
“뭐? 그런 게 가능해?”
“잘 몰랐는데 이 교단에선 가능하다나 봐. 이건 카이테인 신관님이 직접 증명해 주신 거니까 틀림없는 사실이야. 심지어 신탁까지 받았다더라니까? 신관님 말로는 신이 엘을 너무 사랑한대. 그래서 아직 정식 신관이 아닌데도 성력을 쓸 수 있는 거래.”
“헤에에…….”
나는 뚫어지게 바라보는 헤롤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선 그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알아서 잘 흘러가는 분위기를 일부러 망칠 순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엘뤼엔에게 백번을 감사해도 부족했다. 창피하고 민망하긴 해도, 그가 나서 준 덕분에 자칫 골치 아파졌을 상황을 면한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아직 뭐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날 치료해 줬다니 정말 고맙다, 엘.”
“아니에요. 그보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기분은 좀 어떠세요?”
“응, 완전 상쾌해. 마치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야.”
“그건 그럴 만도 하지. 이틀이나 잤으니까.”
불쑥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은 마이티였다. 그 말에 헤롤이 느긋하게 팔을 주무르다 말고 경악했다.
“헉, 이틀? 내가 그렇게나 오래 잤다고?”
“그래, 인마. 그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상처가 다 나았는데도 깨질 않으니까 혹시 다른 어딘가 잘못된 건 아닌가 싶어서 다들 노심초사했다고. 특히 이릴이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마, 마이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랬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카이테인 신관님과 엘을 번갈아 가며 추궁하지 않았던가? 대체 언제쯤 깨어나냐고 계속 귀찮게 묻고 채근했으면서.”
“윽! 나, 나는 그저……!”
그때 변명하려던 이릴의 시선과 헤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이릴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나 걱정했어, 이릴?”
“…….”
“정말?”
간신히 가라앉았던 이릴의 얼굴이 다시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사람이 더 민망해질 정도로 노골적인 반응이었다. 일행들은 모두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상황을 수습한 건 트로웰의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