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82화 (82/608)

제82화

마수의 토벌은 성공했지만 마을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희생자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약 스무 명에 해당하는 일꾼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처음 도망쳐서 소식을 알린 대여섯 명뿐. 나머지는 모두 싸늘한 시신이 되거나, 그마저도 수습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무리 규모가 큰 마을이라 해도 이 세계는 지구에 비해 인구 자체가 많지 않았다. 특히 지난 가뭄 이후로 그나마 있던 숫자마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고, 그것은 곧 한 집 건너 한 집끼리 아는 사이라는 말과도 같았다. 마을은 전체가 장례 분위기에 빠졌다.

“……그렇게 됐구나.”

이사나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정신을 차린 그에게 나는 그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전부 알려 준 참이었다. 그는 모든 일이 잘 해결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그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그런데 엘, 다른 사람들은?”

“헤롤은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용병단들과 함께 다음 일정을 의논하고 있어. 상단주가 계약을 해지하지 않은 모양이야. 오히려 의협심에 감동했다며 추가 수당을 주겠다고 했대.”

“와, 그게 정말이야?”

“응. 정말 굉장하지?”

그건 휴센조차 계산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구두쇠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돈에 관련된 일에 인색한 상단주다. 그런 그가 멋대로 계약을 해지하려고 한 책임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추가 수당을 내줄 줄이야. 심지어 마수의 시체를 시세보다 더 비싼 값에 매입해 주기까지 했다. 이름 높은 대상이라고 하더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네가 정령사라는 사실은 크게 주목을 받지 않는 것 같아. 마수를 잡을 때 큰 활약을 한 것도 내가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어.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으응, 그러고 보니 미안해, 엘. 내 맘대로 결정하고 멋대로 밝혀 버려서…….”

“아냐, 어차피 이번 여정은 너를 위한 거잖아.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뭐든 결정해도 괜찮아. 굳이 내 의견은 묻지 않아도 돼.”

“그치만…….”

“괜찮다니까. 그보다 반가운 소식이 있어. 이사나, 너한테 좋은 소식이야.”

“응? 나한테 좋은 소식?”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서 시큐엘을 소환해 볼래?”

“시, 시큐엘? 상급 정령 말이야?”

“응, 이제 할 수 있을 거야.”

정령사로서 큰 체험을 한 덕분일까. 아직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기절한 이후로 이사나가 다룰 수 있는 마나량이 한층 풍부해져 있었다. 잠시간 주저하던 그는 내 시선에 용기를 얻었는지 차분히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시큐엘 소환!”

쏴아아―

그 순간 청량한 바닷가의 내음과 함께 허공에서 물결이 파도처럼 일기 시작했다. 방 안이 온통 물에 잠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납게 몰아치던 파도는 이윽고 점차 한곳으로 뭉치더니 고아한 늑대의 모습으로 화했다.

―온 세상의 물을 주관하시는 분, 나의 군주, 물의 왕을 뵙습니다.

시큐엘은 바닥에 내려앉자마자 내게 인사부터 건넸다. 그러자 이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엘, 나한테 시큐엘의 목소리가 들려!”

“응, 그럴 거야. 상급 정령부터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거든.”

“헤에, 그렇구나.”

상급 정령을 소환한 여파인지 이사나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럼에도 의식을 놓지 않는 걸 보면 다행히 견딜 만한 수준인 듯했다.

이윽고 시큐엘의 시선이 자신에게 이르자 그는 무척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시큐엘은 그에게도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약간의 웃음기를 담은 다정한 목소리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의 계약자시여.

“아, 마, 만나서 반가워. 나는 이사나라고 해.”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 기쁩니다. 당신의 힘이 제게 닿는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나, 나를 기다렸다고?”

―물론입니다. 당신의 성장은 곧 왕의 기쁨, 그것은 모든 물의 정령들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길. 세상의 모든 물의 정령들이 당신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나를…… 축복한다고…….”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처럼, 이사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먹먹하게 잠겨든 목소리와 더불어 눈동자에는 어느새 물기가 서려 있었다.

“이사나?”

“아, 괜찮아, 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무 기뻐서…… 그래서 그래.”

걱정스럽게 응시하는 내게 그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추긴 힘들었는지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누군가에 따스한 위로 한마디, 축언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겠지. 황제가 된 이후로는 특히 더 그랬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어깨를 차분히 두드려 줬다. 그때 시큐엘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이사나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던 이사나는 그의 집요한 애정 공세에 밀려 곧 웃음을 터뜨렸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훈훈해지는 광경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하고 말했다.

“아참, 시큐엘, 지금은 괜찮지만 다음번에 소환될 땐 나한테 그렇게 인사하지 마. 물의 왕이니 뭐니, 대놓고 그런 식으로 부르면 어떡해?”

―저, 저는 억울합니다. 왕께 인사를 드리는 것은 저희 모든 물의 정령들의 당연한 의무…….

“그래도 안 돼. 네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들려서 내가 정령왕이라는 걸 들킨단 말이야.”

―큽, 알겠습니다.

시큐엘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이사나가 위로하듯 그의 털을 쓰다듬었다. 시큐엘 역시 거절하지 않고 냉큼 그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벌써부터 매우 손발이 잘 맞는 두 종족이었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똑똑―

“엘, 안에 계십니까?”

차분한 음성은 카이테인의 것이었다. 나와 이사나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뒤의 행동은 정하지 않아도 일사천리였다. 내가 문 앞으로 다가가는 동안 이사나는 얼른 시큐엘을 돌려보내고 후드를 찾아 뒤집어썼다. 나는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가린 것을 확인한 다음, 문을 살짝 열어 찾아온 상대를 확인했다. 예상했던 대로 카이테인이 서있었다.

“카이 씨, 무슨 일이세요?”

“아, 늦은 시간에 갑자기 죄송합니다. 제가 쉬시는 걸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혹시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서요.”

“아, 네. 그럼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으음, 그게…… 가급적 사람이 없는 장소가 좋겠습니다.”

그건 즉, 나와 단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는 말인가? 카이테인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평온했지만 나는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낮의 일도 있다 보니 그 의미가 그저 단순하게만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멋대로 급조했던 변명이 우연히 맞아떨어졌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긴 했었다. 오죽하면 코웰 역시 대놓고 감싸 준다고 의심했을까. 그 뒤 신탁에 대한 것이 공개되면서 흐지부지 넘어가긴 했지만 나 역시 그 점이 내심 찝찝했던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나는 이사나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카이테인을 따라 문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여관 뒤편에 마련된 작은 공터였다. 본래도 그렇게 눈에 띄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꽤 늦은 탓인지 근처에도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카이테인은 잠시간 주위를 살핀 다음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곤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곳까지 오시게 해서 좀 놀라셨지요?”

“아하하, 뭐…….”

그는 어색하게 웃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시선엔 여전히 호의가 담겨있었다. 당황스러운 건 그의 다음 행동이었다. 그가 갑자기 내게 정중히 허리를 굽힌 것이다. 그 순간 귓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한 세계의 흐름을 관장하는 존재. 물의 왕, 엘퀴네스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지금, 날 엘퀴네스라고 부른 거 맞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설마 조금 전 시큐엘이 소환된 걸 보기라도 한 걸까? 얼굴이 굳는 것이 느껴졌지만 표정이 도무지 수습되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떻게…….”

다행히 꺼질 듯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를 카이테인은 용케 알아들었다.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신탁입니다.”

“……신탁?”

“제가 사람들 앞에서 공개한 신탁은 사실은 전체 내용 중 일부였을 뿐입니다. 엘뤼엔께서 제게 내리신 자세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일부였다고?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카이테인은 눈을 감고 호흡을 정돈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바다의 머리색을 지닌 소년을 보필하여 내 곁으로 인도하라. 내 종에게 내리는 특별한 소명이니. 이는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만들기 위함이라. 그는 곧 신의 아들이자 물의 왕이라.”

말을 마친 후 카이테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동시에 나는 멈췄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떨떠름해하는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처음엔 물의 왕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굉장히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묻기 위해 당신을 찾아가려고 했었지요. 그러다 당신이 사람을 치료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물의 정령왕에게 치료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하하, 역시 너무 억지였죠. 문장도 받지 않은 신관이 성력을 쓴다는 거짓말 따위…….”

“그렇기도 합니다만, 사실 눈에 띄는 건 엘퀴네스 님의 치료 능력 자체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신관이라도 그만한 부상을 완전하게 치료하긴 어렵거든요. 설령 가능하다 해도 상당한 성력을 써야 하기 때문에 치료 직후엔 탈진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으시더군요.”

“그, 그렇군요.”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대놓고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을 줄이야. 유희를 처음 해 본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쳤을까 싶으니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마치 실수만 연발하는 사회 초년생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그럼 혹시 신전 쪽에서도 절 알고 있나요?”

“아아, 그건 아닙니다. 엘퀴네스 님의 정체는 제게만 따로 알려 주신 것 같았습니다. 제가 감히 신의 뜻을 헤아리긴 힘들지만, 짐작건대 아마도 이번 사건을 수습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셨나 싶습니다.”

그래, 역시 그렇겠지.

만약 내 정체를 알지 못했다면 신관인 카이테인이 성력에 관계된 일을 그렇게 쉽게 수습해 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엘뤼엔의 이름을 파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그가 직접 그런 신탁을 내린 것이다.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지금 내 상황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일단 카이테인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그라면 누군가에게 함부로 내 정체를 발설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엘뤼엔도 생각이 있을 테니 아무한테나 진실을 알려 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착잡한 심정까지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으음, 우선 일을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제가 민폐를 끼쳤네요.”

“아닙니다. 곤란한 상황이셨으니 이해합니다. 오히려 저로서는 감격스럽기만 합니다. 간혹 문헌을 통해 정령왕들께서 인간들의 세상을 유람한다는 이야기는 읽었지만 설마 이렇게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함께하시는 라이라는 소년이 계약자이신 겁니까?”

“네, 맞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테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잠시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더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네? 무엇을…….”

“혹시 라이라는 분의 정체가…… 이 제국 스왈트의 황제 폐하는 아니신지요.”

“……!”

이번에도 나는 소리 없이 굳었다. 정직한 반응을 본 카이테인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삼 일의 기적 역시 엘퀴네스 님의 작품이겠군요.”

“으음, 그게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내 표정이 급격히 흐려진 탓인지 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제 와선 그를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카이 씨의 성품을 믿어요. 그 말을 지켜 주시길 바랄게요.”

“물론입니다. 엘뤼엔 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강직한 대답에 나는 안심했다. 성직자가 하는 약속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특히 이 세계에서는 신의 영향이 강한 만큼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을 함부로 내뱉지 못했다. 어길 경우 그대로 저주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최악으로는 모든 성력을 잃고 교단에서 파면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한 만큼, 그는 반드시 자신이 한 말을 지켜 낼 터였다. 왠지 든든한 아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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