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콰직! 콰드득!
살을 찢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눈앞에 벌어진 참상을 바라보았다.
새로 나타난 베히모스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이릴을 덮쳤다. 거친 바람과 함께 울부짖음이 울리는 순간 나는 틀림없이 그녀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순간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닌 헤롤이었다. 그가 이릴을 끌어안은 채 마수의 방패가 된 것이다.
“…….”
“…….”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모든 동작들이 전부 느릿한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 있을 뿐이었다.
“헤, 헤롤?”
정신을 차린 건 겁에 질린 이릴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그녀는 헤롤의 아래에 감싸인 채로 그의 피를 온 몸에 받아 내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이 핏물로 온통 범벅이었다. 그때까지도 베히모스는 여전히 헤롤을 덮치고 있는 상태였다. 거대한 송곳니가 복부에 깊숙이 박혀 들 때마다 헤롤의 입에서 피가 덩이째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누군가 빠르게 달려가 베히모스의 몸에 뛰어올랐다. 바로 트로웰이었다. 마수의 몸에 올라탄 즉시,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목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고통을 느낀 베히모스가 몸을 크게 뒤틀었고, 겨우 놓인 헤롤의 몸이 풀썩 이릴의 옆으로 쓰러져 내렸다.
“모, 모두 매튜를 도와! 어서!”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휴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말에 혼란을 수습한 일행들이 모두 무기를 움켜쥐고 베히모스에게 달려들었다. 그사이 이릴이 일어나 다급하게 헤롤의 어깨를 흔들었다.
“헤롤! 정신 차려, 헤롤!”
의식이 있는 것일까? 잠시 후 굳게 감겨 있던 헤롤의 두 눈이 힘겹게 떠졌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이릴을 확인하고 흐릿하게 웃었다.
“쿠, 쿨럭! 괜…… 찮냐, 마녀?”
“뭐야! 지금 내 걱정 할 때가 아니잖아, 바보야! 왜, 왜 네가……!”
“거, 거봐. 나도, 하면 한다고…… 했지?”
그 말에 이릴은 잠시간 숨을 멈췄다. 설마 이런 순간까지 농담을 할 줄 몰랐는지 황당함이 깃든 표정이었다. 그것이 우스웠는지 헤롤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면서도 키득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다시금 울컥 피를 토해 냈다.
“헤롤!”
“아아, 괜찮아. 생각보다 아프진 않아.”
기겁한 이릴을 향해 그는 담담히 중얼거렸다. 물론 이 상황에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헤롤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고,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급속도로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본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직하게 숨을 헐떡이는 얼굴은 이미 초연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릴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정신 차려! 지금 바로 응급조치를……!”
이릴은 상처를 지혈을 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상반신 전체가 뚫리다시피 한 상처가 제대로 수습이 될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릴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붕대를 묶는 손은 이미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떨고 있는 상태였다. 그동안 헤롤은 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이제…… 너 어떡하냐, 마녀? 나 없으면 앞으론 재미없을 텐데. 나처럼 묵묵히 구박당해 주는 사람 찾는 것도 쉽지 않을걸? 쿨럭!”
“말하지 마, 헤롤! 움직일수록 피가 더 많이 나온단 말이야!”
“쳇, 죽을 땐 죽더라도 마녀가 결혼하는 건 보고 죽고 싶었는데…….”
“말하지 말라니까? 게다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죽긴 누가 죽는다고!”
“신랑 자식 붙잡고…… 놀려 주고 싶었는데…….”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말하지 마! 그 입 좀 다물어, 제발!”
다그치던 말은 나중에 가선 거의 애원처럼 변했다. 그러나 헤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머릿속의 생각을 전부 뱉어 내려는 것 같았다.
“저거 알고 보면 성질 더러워요. 얼굴 보고 결혼한 거지? 반드시 후회할 거다. 부부싸움하면 그날로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일걸? 그렇게 꼭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리고 또…….”
“말하지 마! 말하지 말란 말이야, 바보야! 정말 죽고 싶어?”
“왜 내가 찍어 놓은 것 뺏어 가냐고…… 한 방 먹여 주고 싶었는데…….”
“……!”
헉! 설마 헤롤이 이릴을?
경악하는 이릴의 표정은 보이지도 않은지, 그는 계속 키득거리고 웃었다. 그 순간 혼란스러운 이릴의 시선과 헤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피에 젖은 손을 천천히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진작에 이래 볼 걸…… 그랬어.”
“무슨…….”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만질 수도…… 있었는데…….”
“헤, 헤롤…… 너…….”
“좋아했다, 이릴.”
이릴의 눈이 크게 떠지자 헤롤은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 순간 뻗어진 그의 팔이 병든 병아리처럼 축 늘어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감겨진 눈이 다시 뜨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릴은 가득 차오른 눈물을 삼키며 소리쳤다.
“이 바보 자식아!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정신 차려!”
그때 쿠웅!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베히모스의 모습이 보였다. 트로웰이 단숨에 해치운 것이다.
기쁜 순간이었지만 웃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행들은 뒤처리도 미루고 곧장 헤롤에게 몰려들었다. 서둘러 맥을 짚어 본 휴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마이티! 어서 성수를!”
휴센의 말에 마이티는 급히 품 안에서 병을 꺼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작은 병 안에 쓰고 남은 양이 넉넉할 리가 없었다. 몇 방울 떨어트리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병은 전부 비어 있었다. 그에 비해 상처가 회복되는 속도는 현저히 느렸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남겨 놓는 건데……!”
마이티는 욕설을 내뱉으며 이미 비어진 병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없던 성수가 나올 리는 없었다. 더 이상 희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한 듯 일행들 사이에서 무거운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 이릴은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이 바보 헤롤! 죽지 마! 죽으면 가만히 안 둘 거야! 내 말 들려? 내 말 들리냐고, 헤롤!”
“이릴, 진정해! 네가 흥분을 하면 어떡해?”
“일단 헤롤을 옮기자! 당장 신관에게 데려가야 해!”
“안 돼! 헤롤 상처 안 보여? 옮기는 도중에 죽을 거라고! 차라리 신관을 여기로 데려오는 게 낫겠어.”
“말도 안 돼! 한시가 급한데 그걸 언제 기다려? 그때까지 헤롤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상황이 급박해지자 일행들은 완전히 여유를 잃은 듯했다. 쉐리와 마이티는 물론이고 평소 차분했던 휴센까지 몹시 격양된 모습을 보였다.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헤롤을 살폈다. ‘간신히’라고 부를 수준이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상태를 봐선 얼마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사실 지금까지 흘린 피의 양만 봐도 출혈과다로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갈등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쉰 다음 털썩 헤롤 앞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한창 실랑이 하던 일행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엘?”
“제가 치료해 볼게요.”
“뭐? 네가 어떻게?”
“신관 지망생이라고 했잖아요. 사실은 조금 성력을 쓸 줄 알거든요.”
“그, 그게 정말이야?”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머쓱히 고개를 끄덕였다. 슬그머니 트로웰의 눈치를 봤지만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신관이 아닌데 성력을 쓰는 게 가능해?”
“그러게. 보통은 문장을 받은 후에 쓸 수 있지 않나?”
“아, 으음, 그게 말이죠…….”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헤롤을 살릴 수 있다면 뭐든 해 봐야지! 자, 엘. 뭐 하고 있는 거야? 얼른 시작해, 얼른!”
일행들의 입을 다물게 한 사람은 이릴이었다. 그녀의 재촉에 나는 어색하게 웃은 다음 헤롤의 몸 위에 손을 얹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에도 뒷수습이 걱정이 되긴 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파장이 불거질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동고동락해 왔던 동료가 눈앞에서 죽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이 순간을 그냥 넘겼다가는 앞으로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곧 의식을 집중하고 치유 능력을 발휘했다. 그 순간 희미한 물안개와 함께, 내게서 빠져나간 힘이 헤롤의 전신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은은한 광채에 휩싸인 듯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물안개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어 들었다. 투두둑, 부서졌던 뼈가 다시 맞춰지고 그 자리를 빠르게 새살이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일행들이 크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치유가 끝났을 때 헤롤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발톱에 찢겨 너덜너덜해진 옷이나 몸에 묻은 핏자국만 아니었다면 조금 전 목숨이 위중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조차 믿기 힘들 것 같았다.
완전히 나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주변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고개를 든 나는 말없이 굳어져 있는 일행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귀신이라도 본 듯이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 저기…… 이제 다 끝났는데요.”
“응? 아, 아아, 그래.”
내 말에 일행들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이곤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곤히 잠들어 있는 헤롤의 모습을 확인하고 모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놀랍군. 정말 완전히 다 나았어.”
“세상에,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이게 정말 가능한 거야?”
“신관들도 이렇게 완전하게 치유하지는 못해. 하물며 정식 신관도 아니면서 이런 엄청난 성력을 가지고 있다니. 엘…… 넌 도대체?”
사고는 이미 쳤겠다, 이제 뒷수습을 감당할 차례였다. 쏟아지는 시선들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 이번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원래 이렇게 잘 낫지는 않거든요. 아하하…….”
“원래 이렇진 않다고?”
“네, 그래서 사실 저도 별로 기대는 안 했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좋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 뭐랄까. 아무래도 신께서 제 기도를 잘 들어주셨나 봐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나는 제발 속내가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일부러 안심한 듯 표정을 연기했다. 다행히 제법 그럴듯했는지 의심을 사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신은 때때로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기적을 일으키시니 말이야.”
“그, 그렇죠. 그러니 저 같은 불완전한 신관도 성력을 쓸 수 있던 게 아니겠어요? 아하하…….”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엘 네가 대단하다는 건 변함이 없어. 네가 아니었다면 헤롤은 낫지 않았을 테니까.”
“그, 그런가요?”
“당연하지. 네가 헤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이런 기적이 일어난 거잖아? 아아, 이 예쁜 것! 고마워, 엘! 덕분에 헤롤이 살았어! 정말 고마워!”
“우왓!”
그 순간 이릴이 나를 덥석 끌어안고 마구잡이로 볼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무작정 그녀를 밀어내지도 못했다. 어느새 이릴의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라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