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77화 (77/608)

제77화

뿌우우우―

여관 밖을 나서자 사방에서 이상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우왕좌왕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바쁜 상태였다.

“비상 신호야. 그 병사들이 영주에게 알리긴 한 것 같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설명해 준 건 트로웰이었다. 곧이어 동일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공의 병사와는 다른 형식이었지만 보호구를 걸친 것을 보아 아마도 치안대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입구 앞을 둘러싼 성벽에 올라가 서로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샴페인 용병단원들이 살짝 혀를 찼다.

“문부터 막을 생각이군.”

“마수가 마을까지 들어오면 끝장이니 이런 거라도 부지런히 하는 수밖에.”

“자, 그럼 아예 봉쇄되기 전에 나가자고. 붙잡히면 괜히 골치 아파져.”

헤롤의 말에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마이티가 찜찜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엘, 너는 따라와도 되는 거야? 일전에 신관 지망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딱히 싸울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아무리 동생이 걱정된다지만 정말 괜찮겠어?”

“네, 저 혼자 기다리는 것보단 그게 훨씬 마음 편해요. 절대 방해되지 않을게요.”

“거참. 미리 말해 두지만 우리가 널 보호해 주긴 힘들 거야. 마수는 지금까지 상대한 조무래기 몬스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거든.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어.”

“알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들은 오히려 더 찜찜한 얼굴을 했다. 변변찮은 무기 하나 소지하지 않은 내가 제대로 도망이나 다닐 수 있을지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그때 헤롤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근데 말이야, 신관 지망생이면 아직 정식 사제는 아닌 거잖아? 그럼 중간에 다른 신으로 바꿀 수도 있나?”

“그, 글쎄요? 그건 갑자기 왜요?”

“아니, 그냥. 내가 전에 읽은 어떤 책에선 말이지, 신들이 사제를 고르는 눈이 꽤 까다롭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외모가 아름다운 인간을 자신의 사제로 삼으려고 서로 다툼도 한다는 거야. 남의 사제를 강제로 뺏어 오기도 한다던데? 그런 걸 보면 사제 본인도 섬기는 신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헤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어차피 관심 없는 화제였기 때문에 나는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헤롤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럼 이참에 넌 차라리 미의 여신으로 전향하는 게 어때?”

“네? 미, 미의 여신요?”

“그래.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너한테는 형벌의 사제라는 직함이 좀 안 어울리거든. 벌레 하나 못 죽일 것 같은 얼굴로 살벌하게 형벌이라니, 좀 그렇지 않아? 그에 비해 여신의 사제들은 사내들도 모두 예쁘게 생겼다고 하더라고. 미의 여신도 너 정도 외모면 흔쾌히 자녀로 받아 주실 거야.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네 얼굴엔 그게 더 어울릴 것 같아. 딱 봐도 위화감이 없잖아. 얼마나 좋냐? 안 그래?”

“아하하…….”

나는 허무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무심히 흘려 넘겼다. 이젠 딱히 이런 얘기엔 화가 나지도 않는다. 점차 적응해 가는 내가 무서울 정도였다.

성문을 나서자 넓은 경작지를 사이에 두고 긴 비탈길이 이어졌다. 그 길은 중간쯤에 이르러 울창한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일꾼들이 알려 준 장소는 바로 그 부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문득 코끝에 불쾌한 냄새가 닿았다. 무심코 코를 막자 일행들 역시 얼굴을 굳히며 서로 마주 보았다. 마치 녹슨 철에서 나는 것 같은 씁쓸하고 텁텁한 냄새. 그건 분명 피비린내였다. 현장이 지척에 이른 것이다.

“윽…….”

“으음…….”

이윽고 드러나기 시작한 광경에 나와 일행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우리 앞에 펼쳐진 건 끔찍하게 훼손된 시체들이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발견하는 시체마다 성별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거야, 원. 정말 끔찍하군.”

일방적인 학살을 증명하듯 시체의 위치는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전부 도망을 치는 도중에 죽은 것이다. 도처에 널린 것이라곤 붉은 피와 살덩이들뿐,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동안 여러 전투들을 겪어 오면서 잔인한 광경엔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람의 시체를 보니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런 일에 잔뼈가 굵었을 샴페인 용병단원들 역시 질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마수란 녀석은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설마 그사이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건 아니겠지. 성문 안으로 들어간다면 엄청난 사상자가 생길 게 뻔했기에 내심 불안해졌다. 그 순간 아까전보다 더욱 얼굴이 경직된 휴센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기다. 녀석은 이 근처에 있어. 모두 긴장하고 주위를 살피도록.”

그 말에 일행들은 모두 자세를 낮추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기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아주 쉬웠다. 주변의 공기가 모두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가득히 압박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온몸이 따가운 것 같았다. 정령왕인 내가 이 정도이니 다른 일행들은 더 큰 압력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이사나의 얼굴엔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했다.

헤롤은 긴장한 표정이면서도 이 상황을 즐기듯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쓰읍― 누가 마수 아니랄까 봐 엄청나게 살벌하시구만. 좋아, 이렇게 나오셔야지.”

“넌 이 순간에 웃음이 나오냐?”

“이왕이면 강한 상대랑 싸우는 게 좋잖아. 막 흥분되지 않냐? 이런 녀석이 베어 넘길 때 손맛도 좋다고.”

“그건 너 같은 전투 바보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이나 미리 먹어 둘걸. 저녁에 제대로 먹으려고 점심은 부실하게 때우고 말았는데. 설마 그 음식이 마지막 만찬이 되는 건 아니겠지.”

마이티의 말에 일행들은 일제히 그를 노려봤다. 말이 씨가 된다고, 잘하자고 해도 모자랄 판에 초장부터 초를 치는 그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모두의 싸늘한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마이티는 찔끔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아, 미안, 미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아무튼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유명하지, 마이티 군.”

“넌 언젠가 그 가벼운 입 때문에 망할 거다.”

“거참, 되게 구박하네. 그냥 해 본 말이라니까.”

“다들 조용!”

바로 그때 휴센의 일갈이 울렸다. 그 순간 스치는 바람을 타고 낮은 울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

그것은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고작 한 마리에게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울음소리는 공간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일행들은 서로 등을 마주 댄 자세에서 둥글게 진을 짜며 각자의 무기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마수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이쪽을 탐색하고 있는 건가. 공격 의사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음에도 상대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헤롤은 윗입술을 핥으며 도끼의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자자, 그렇게 간만 보지 말고 얼른 덤비라고.”

바로 그때였다. 무심코 바라본 왼편의 숲 쪽에서 붉은색의 빛 덩어리가 반짝거렸다. 흠칫 놀라는 순간, 트로웰이 품에서 단검을 빠르게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가 단검을 던진 장소는 숲이 아니라 하늘 위였다. 그제야 나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마수의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위치가 달라진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트로웰의 단검은 그 그림자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어 놓고 있었다.

촤아아악― 콰직!

“크와아아앙!”

“으악!”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그림자는 하늘에서 크게 비틀거렸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마수의 공격을 의식하지 못했던 일행들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젠장!”

한발 늦은 반응에 일행들이 당황하는 동안 그림자는 훌쩍 몸을 뒤틀어 맞은편에 안착했다. 그제야 나는 마수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웅장한 산처럼 거대한 덩치를 지닌 하얀색의 짐승이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표범을 닮았고, 두 개의 송곳니가 입 안에서 튀어나와 마치 상아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발톱은 바위도 단숨에 부술 수 있을 것처럼 굉장히 크고 날카로웠다. 보기만 해도 절로 압도되는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마수의 모습을 확인한 일행들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정말 베히모스로군.”

“마계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마수가 어떻게 이곳에…….”

베히모스의 머리에는 세 개의 눈이 달려 있었다. 그중 이마에 있는 눈에 무언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 트로웰이 던졌던 단검이었다. 그 사이에서 붉게 흐르는 선혈이 콧등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설마 단검을 눈에 맞고도 살아 있을 줄이야. 괴로운지 고개를 마구 휘젓기는 했지만 그다지 큰 타격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일행들 역시 질린 표정을 지었다.

“크와아아아앙!”

“엎드려!”

“……!”

그 순간 나는 머리 위를 지나가는 또 다른 그림자를 느끼곤 사색이 되어 허리를 숙였다. 방금 전에 이쪽에 있던 것이 잠깐 돌아본 사이에 건너편으로 건너가 있었다. 그 찰나의 사이에 스쳤는지 휴센의 뺨에 한 줄기 선혈이 흘렀다.

“젠장! 뭐가 이렇게 크고 빨라!”

벌써 두 번이나 공격 기회를 놓친 헤롤이 욕설을 내뱉었다. 오늘따라 그의 손에 들린 도끼가 더 무겁게만 보였다. 베히모스는 송곳니 사이로 누런 타액을 흘리며 새빨간 안광을 뿜어냈다. 마치 누구를 가장 먼저 사냥할지 고민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번에도 일행 중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트로웰이었다.

“하압―!”

순식간에 일행들에게서 이탈한 트로웰이 베히모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자 그의 움직임을 눈치챈 마수가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공격 찬스를 놓쳐 버린 트로웰의 등 뒤가 그대로 비었던 것이다.

“트…… 매, 매튜!”

그러나 놀란 것은 잠시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그럴 것이라 예상했단 듯이 그가 바로 몸을 틀고는 품속에서 또 하나의 단검을 꺼내 베히모스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크와아아앙!”

트로웰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빙글 돌아 한 발을 들어 괴로워하고 있던 베히모스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 와중에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앞발을 가볍게 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오예! 좋았어! 이거 해볼 만하겠는데?”

트로웰이 단신으로 여유롭게 싸움을 이끌어 나가자, 멍하게 보고 있던 다른 일행들의 얼굴에도 자신감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신이 난 헤롤은 쥐고 있던 도끼날을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이럇차! 헤롤 어르신이 나가신다아!”

“앗! 기다려, 저 멍청이가!”

옆에 있던 이릴이 기겁하며 말렸지만 이미 그의 도끼는 크게 휘둘러진 뒤였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내리친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그가 달려든 속도보다 마수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던 것이다. 빠르게 도끼를 피한 베히모스는 비어 있던 헤롤의 등허리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으아악!”

“이 바보! 그래서 내가 잠깐이라고 그랬는데!”

이릴은 급히 채찍을 휘둘러 베히모스의 몸을 묶었다. 덕분에 움직임이 잠시간 멈추자 그 틈에 헤롤이 간신히 몸을 굴러 피했다. 동시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이티가 마수를 향해 활을 쏘았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가죽을 뚫고 촘촘히 박혀 들자 제아무리 매서운 마수라도 기세가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년간의 팀워크를 자랑하듯 완벽한 호흡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공격은 베히모스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붉은 안광이 짙어졌다고 느낀 순간 마수는 몸을 크게 뒤틀더니 목에 감겨 있던 채찍을 단번에 물어뜯었다. 그 바람에 녀석을 제압하고 있던 이릴이 크게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졌고, 빈틈을 놓치지 않은 베히모스가 곧장 그녀의 위로 덮쳐들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꺄아악!”

“이릴!”

그때 내가 어떻게 움직인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어느새 이릴의 앞을 막아선 채 베히모스의 무식한 송곳니를 붙잡고 있었다. 얼얼한 감각과 함께 귓가에 경악에 찬 이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맙소사! 엘!”

“피해요, 이릴! 어서요!”

무게감에 둔해졌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오판이었다. 압력에 가속이 더해진 탓일까? 단순히 붙잡고 있을 뿐인데도 엄청난 힘에 밀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방해받은 것에 화가 났는지 베히모스는 크게 몸부림쳤다. 놈의 발톱이 어깨를 스치자 옷이 찢겨지는 느낌과 함께 싸늘한 아픔이 밀려들었다. 흘낏 바라보니 상당 부분의 피부가 찢어져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간 턱하니 숨이 막혔다.

‘피라니! 정령도 피를 흘리나?’

중간계의 육신은 실제 육체가 아니다. 그러니 아마 이 피도 눈속임에 불과할 뿐 진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시각적인 충격은 무시할 수 없었다. 있지도 않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머리가 새하얗게 익어 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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