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이제 됐습니까?”
“…….”
나직하게 묻는 목소리에 당황한 건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다갈색의 피부, 그 위로 가볍게 흐트러진 새카만 머리칼. 놀랍게도 후드 속에서 드러난 사람은 바로 트로웰이었다.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시다니, 정말 직업 정신이 투철하신 분들이군요.”
그가 빙긋 웃자 병사들은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익숙해진 나조차 지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외모다.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면서도 어리둥절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내게 살짝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뭔가 특별한 조치를 한 것만은 분명했다.
“흠흠, 너 역시 상당히 수상한 행색이로군. 뭐 하는 녀석이지?”
“보다시피 용병입니다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말이군. 너도 우리와 같이 가서 조사를 받아야겠다.”
병사들은 이번에도 억지를 쓰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우리들 앞으로 나섰다. 휴센이었다.
“그럴 필요 없소. 무슨 오해가 생긴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두 사람은 틀림없이 내 단에 소속된 식구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 용병단의 명예를 걸고 보증하겠소.”
“하! 명예?”
병사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깔보는 듯 오만한 시선이 그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뭘 모르는 것 같아서 해 주는 말이니 잘 들으시오. 현재 수배 중인 죄인들은 용병으로 위장하고 다닐 가능성이 매우 높소. 즉, 여기에 있는 당신들 모두가 용의자란 말이지.”
“우리의 신분을 제대로 증명하면 되는 것이오?”
“흥, 용병 길드의 소속패를 보여 줄 생각이라면 됐소. 어차피 나무로 만든 임시패 따위야 얼마든지 위조가…….”
병사가 무시하는 어조로 중얼거리는 동안 휴센은 묵묵히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소속패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 코웃음을 치며 내려다본 병사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차올랐다.
“그, 금패?”
병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금색의 소속패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른 병사들도 크게 동요한 기색이었다. 이미 익숙한 일인 듯 휴센은 아무렇지 않게 그 시선을 받아 넘기며 말했다.
“샴페인 용병단의 휴센이라 하오.”
“샤, 샴페인 용병단? 이럴 수가. 귀하가 바로 그 휴센 님이셨군요. 귀하의 위명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금패를 지닌 용병은 기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의 태도가 한순간에 달라지자 주위에 있던 용병들이 모두 존경의 시선으로 휴센을 바라보았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휴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내 보증을 믿겠소?”
“그, 그럼요. 물론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금패의 휴센 님의 일행인데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지요. 아무래도 이거 대단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단원분들을 의심하다니,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무에 충실한 탓이니 괜찮소.”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급변한 상황에 불리함을 느낀 것일까. 병사들은 서둘러 돌아갈 기색을 비쳤다.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한층 느슨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것으로 대충 모든 일들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 틈을 타서 나는 트로웰에게 정령어로 말을 걸었다.
『트로웰, 어떻게 한 거야? 이사나는?』
『아아, 아래에.』
『응? 아래?』
어리둥절하기도 잠시간, 나는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굳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아래, 즉 땅속에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트로웰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급히 숨기느라 어쩔 수 없었어. 괜찮아.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마련해 놨으니까. 아마 별다른 얘기를 듣지 못하고 묻혀서 조금 놀랐을 테지만.』
『아하하…….』
알고 보면 우리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바로 트로웰이 아닐까? 지금쯤 땅속에서 겁에 질려 있을 이사나를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잠시간 애도를 표했다.
이윽고 병사들의 시선이 완전히 흐트러지자 트로웰은 다시 이사나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다행히 워낙 정신이 없는 상황인 덕분인지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난 그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사나, 괜찮아?”
“으응.”
작은 목소리로 묻는 말에 이사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땅속에 묻혀 있던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의 외관은 말끔했다. 그래선지 그 자신도 스스로 겪은 일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콰앙!
“주인장! 영주관에 신고를 해 주시오! 지금 당장!”
갑작스럽게 여관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일꾼 차림을 한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전부 하나같이 전신이 피투성이였기 때문이다. 돌아갈 채비를 하던 병사들 역시 당황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니, 이게 대체 어찌 된 것이오? 어디서 이렇게……!”
“오오, 병사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마수입니다! 마수가 나타났습니다!”
“마, 마수?”
일꾼의 말에 홀 안이 전부 술렁거렸다. 마수란 마계에 사는 짐승을 뜻하는 말로, 몬스터보다 상위의 생물이었다. 보통은 중간계에 나타날 일이 거의 없는 존재지만 간혹 마족들이 오가는 통로를 통해 우연히 한두 마리씩 흘러들어 오는 일이 있다고 했다. 그런 경우 마수가 토벌되기 전까지 그 지역은 몹시 큰 피해를 입는 편이었다.
“굉장히 거대하고 흉포한 놈입니다! 경작지를 돌보고 있는데 놈이 우리를 덮쳤습니다! 십수 명의 일꾼들 중에서 저희만 간신히 도망쳐 온 상태입니다. 당장 남아 있는 사람들을 도우러 가야 합니다!”
일꾼의 말에 병사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서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 몸을 털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벼, 병사님?”
“유감이지만 우리는 다른 임무가 있어서 도울 수가 없소.”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들은 이 제국의 병사잖습니까!”
“글쎄, 우리의 역할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 것은 이 도시의 치안대에게나 가서 부탁하시오. 자,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그, 그런!”
붙잡는 손길을 뿌리친 병사들은 무언가에 쫓기듯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누가 보아도 겁이 나서 달아나는 모양새였다. 사람들은 모두 황망한 얼굴로 매정하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중에선 서슴없이 욕설을 내뱉는 자들도 있었다.
“젠장, 제국의 병사라는 자들이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나서기는커녕 줄행랑을 치다니.”
“뭐가 백성을 위한 군주야? 대공에게 속았어! 마치 다 해 줄 것처럼 섭정을 시작해 놓고는 정작 이런 일 하나 제대로 해결해 주지 않잖아!”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이 나라의 황실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 근본부터가 썩어 빠졌다고!”
투덜거리는 말들에 이사나가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의 참담한 표정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마수의 생김새가 어땠소?”
“굉장히 덩치가 크고 송곳니가 거대했습니다! 모습은 마치 표범에 가까웠는데 털이 희고 눈이 세 개였습니다. 눈동자는 모두 붉은색이었구요!”
“하얀 털에 세 개의 붉은 눈동자라…….”
“가만, 그거 혹시 베히모스 아냐?”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더 커졌다. 급격히 창백해진 얼굴들을 보아 아마 마수 중에서도 꽤 강한 존재인 게 틀림없었다.
“이거 정말 큰일이군. 정말 베히모스라면 여기도 안전한 장소는 아닐 거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달아나야 할지도.”
“그러게. 그냥 상급 몬스터도 상대하기 힘든데 자그마치 마수라니. 놈이 여기까지 오면 우리도 개죽음을 피하긴 어려울 거라고.”
“젠장, 하필 도착한 첫날부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이제야 푹 쉴 수 있다고 생각했더니.”
사람들은 모두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배회했다. 이미 술자리는 완전히 파장이 난 분위기였다.
그사이 휴센은 묵묵히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다른 샴페인 용병단원들도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하나둘씩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본 칵테일 용병단의 코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형씨들. 설마 마수를 잡으러 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의 질문에 주변의 소란이 그치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샴페인 용병단원들을 향했다. 휴센은 무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대꾸했다.
“베히모스는 헌터 길드에서도 위험등급을 최상급으로 지정한 마수다. 그리고 이곳 할버크는 규모에 비해 치안대가 협소한 도시지. 토벌군이 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어.”
“자, 잠깐 기다려 봐. 마음은 알지만 이렇게 멋대로 결정을 내려도 돼? 상단주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우린 계약에 묶여 있는 몸이잖아.”
“아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 무기는 내려놓고…….”
설득이 통했다고 여겼는지 코웰은 겨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휴센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유감스럽지만 이번 의뢰는 완수하지 못하는 걸로 해야겠어. 상단주께는 죄송하다고 전해 주게. 위약금은 추후 길드 편으로 지불한다고도.”
“컥, 진심이야? 정말 가려고?”
기겁한 코웰이 재차 되물었지만 휴센은 더 이상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곧장 일꾼들을 향해 돌아섰다.
“마수가 나타난 장소가 어디요? 안내해 줄 필요는 없고, 위치만 대충 알려 주시오.”
“저, 정말 저희들을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우리가 간다고 딱히 상황이 좋아질 거란 보장은 없소. 그래도 일단 가 보기나 합시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용병 나리들! 정말 감사합니다!”
넙죽 절한 일꾼들은 곧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설명했다. 휴센은 지도를 펼쳐 들고 몇 번에 걸쳐 방향을 꼼꼼히 파악했다. 어깨너머로 대강 살펴보니 이 근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잠시 후 정비를 마친 샴페인 용병단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 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럼 뒷일을 부탁하겠다.”
“이, 이봐! 아무리 실력이 있다곤 해도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상대는 마수야! 죽을 수도 있다고!”
코웰이 다시금 소리쳤지만 샴페인 용병단원들 중 누구도 그 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코웰 쪽이 더 질린 것 같았다. 그나마 말리는 시늉이라도 하는 건 그뿐, 다른 사람들은 차마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위험하니까 너와 라이는 이곳에 있도록 해라.”
출발하기에 앞서 휴센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사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뇨, 저희도 같이 가겠습니다.”
조금 전 사람들의 말에 자극을 받은 탓일까. 그는 어느 때보다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그의 말에 휴센의 얼굴이 살짝 꿈틀거렸다.
“어린애들이 함부로 따라나설 장소가 아니다. 만약의 상황이 생겨도 너희를 보호할 수 없을 거야.”
“괜찮습니다.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하겠습니다. 같이 가게 해 주세요.”
“무기도 없으면서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미약하지만 정령술을 조금 다룰 줄 압니다.”
이사나의 대답에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퍼졌다. 샴페인 용병단원들은 물론, 주위에 있던 모두가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그저 평범한 심부름꾼에 불과하던 아이가 사실은 특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의 말에 특히 관심을 보인 건 헤롤이었다.
“헤에, 정령술? 혹시 마법이랑 비슷한 그거 아니야? 막 불도 일으켰다가 물도 쏘고 그러는 것 같던데.”
“멍청아! 그건 너같이 뭘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지. 정령이란 말이지, 각자 정해진 원소가 있어. 그리고 정령사마다 다룰 수 있는 원소가 다르다고.”
“그래? 그럼 라이는 뭘 다룰 수 있는데?”
“아, 전 물을…….”
“호오, 물의 정령사? 그건 정령사 중에서도 굉장히 드문 편인데.”
“그게 정말이야, 이릴? 우와, 굉장한데! 그런 대단한 능력을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거야?”
쏟아지는 탄성이 어색한 듯 이사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막상 거침없이 밝히고 나니 슬슬 뒷수습이 걱정이 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설마 이렇게 밝힐 줄은 몰랐지만 스스로 용기를 내어 나선 것을 나무라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이 여행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이사나였으니까. 능동적으로 변해 간다는 건 자신감을 찾았다는 의미일 테니 오히려 나로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단장, 그냥 같이 데려가지? 정령사라면 꽤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맞아, 사실 우리가 지금 거절할 군번은 아니잖아.”
“…….”
주위의 부추김에도 휴센은 말없이 이사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사나가 물끄러미 그 시선을 마주하자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대신 상황이 나빠지면 즉각 몸을 피할 것. 알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잠시간 휴센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서렸다. 그러나 돌아섰을 때 그의 얼굴은 다시금 매서운 전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이만 출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