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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74화 (74/608)

제74화

나는 시험 삼아 옷 몇 벌을 넣은 다음 이사나에게 들어 보게 했다. 받아 들자마자 그는 놀란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와아― 진짜 가벼워, 엘.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것 같아.”

이사나의 감탄에 상인은 껄껄 웃었다.

“내 말이 맞지? 그게 제법 쓸 만하다니까? 아직 어린 손님들 같으니 가격은 적당히 쳐줄게.”

“정말요?”

“물론이지. 실은 잘 팔리지 않아서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고심 중이었거든.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게 도통 마법무구에는 관심이 없단 말이야. 일단 쓰기만 하면 이렇게 편리하다는 걸 알게 될 텐데 말이지. 하긴 나도 카터스 제국에 다녀오기 전까진 이런 게 있다는 것도 잘 몰랐지만.”

“카터스 제국? 거기엔 이런 게 많나요?”

“아무렴. 현자와 마법사들의 땅이잖아. 지천에 널려 있는 게 마법무구지. 심지어 그곳 사람들은 통신구도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닌다니까. 믿겨져? 길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멀리 있는 사람과 통신을 주고받는다고!”

상인의 말에 나는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21세기 최첨단 시대, 휴대폰으로 인터넷도 되는 세상에서 살다 온 나로선 딱히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사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는지 배낭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놀랍군요. 카터스 제국의 문명이 그토록 발달했다니…….”

“그렇다니까. 듣자 하니 카터스 제국은 황실 차원에서 마법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더군. 그곳에 비하면 우리 제국은 너무 뒤쳐졌지. 하기야 몇 년째 내란이 들끓고 있는데 누구든 제대로 국정을 돌아볼 틈이나 있겠어? 사람들도 먹고살기 바빠서 마법무구 같은 건 그저 사치품 취급하기 일쑤니…….”

“…….”

안타깝다는 듯 상인이 혀를 끌끌 차는 동안 이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또 속으로 자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화제를 돌릴 겸 슬쩍 좌판을 둘러보았다.

“혹시 여기 있는 것들도 전부 마법무구인가요?”

“응, 맞아. 그러고 보니 너희들 여행 중이지? 모험가들에게 딱 어울리는 마법무구가 있는데 그것도 볼래?”

고개를 끄덕이자 상인은 곧장 좌판에서 물건을 하나 집어 들었다. 가운데에 투명한 구슬이 박혀 있는 황금색 팔찌였다. 마나가 깃들어 있는 걸 보면 마법무구가 확실했지만 도무지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호신용 팔찌야.”

“호신용이요?”

이런 평범한 팔찌의 어디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거지?

의아해져서 되묻자 상인은 보란 듯 팔찌에 박힌 구슬을 돌려 보였다. 그러자 달칵 하는 금속음과 함께 팔찌의 모양이 순식간에 단검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놀라서 바라보자 상인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구슬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단검이 되고, 왼쪽으로 돌리면 안쪽에서 작은 바늘이 나와. 그걸로 찌르면 일시적으로 온몸이 마비되지. 어때, 꽤 쓸 만한 물건이지 않아?”

“와, 정말 괜찮네요. 그것도 배낭이랑 같이 구입할게요.”

“그럴래? 어린 손님이 보는 눈이 있네. 정말 잘 생각했어.”

저렴하다고 해도 마법무구이기 때문인지 배낭과 팔찌의 가격은 꽤 비싼 편이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값을 치르자 상인은 조금 놀란 표정을 비쳤다. 평범한(심지어 음침하기까지 한) 차림의 소년들이 거금을 지니고 있는 것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은 치안이 좋은 편이 아니라고 했던가. 뒤늦게 떠오른 휴센의 충고에 경각심이 일었다. 가는 곳곳마다 붙어 있던 이사나의 현상 수배 벽보는 이 마을에도 어김없이 퍼져 있는 상태였다. 시비가 붙는 건 상관없지만 그 과정에서 이사나의 정체가 드러나는 건 피해야 했다.

“그럼 많이 파세요. 라이, 그만 가자.”

“아, 으응.”

괜한 문제가 생길까 싶어 나는 얼른 이사나를 끌고 좌판을 떠났다. 걸어가면서 내내 주위를 살폈지만 다행히 따라붙는 시선이나 발길은 없는 것 같았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한적한 곳에 이르고서야 우리는 빠르게 걷던 걸음을 멈췄다. 이미 좌판의 모습은 멀찍이 떨어져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이사나, 손 내밀어 봐.”

내 말에 이사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팔을 쭉 잡아끈 다음, 드러난 팔목에 조금 전에 산 팔찌를 채웠다. 그 행동이 뜻밖이었는지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걸 내게?”

“처음부터 너 주려고 산거야. 사용법은 아까 들었지? 잊지 말고 몸에서 절대 떼어 놓지 마.”

“고, 고마워, 엘. 미안해서 어쩌지? 계속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신경 쓰지 마.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웃으며 답한 말에 그는 또 어쩔 줄 몰라 했다. 날 때부터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고, 주위에서 챙겨 주는 것에 익숙할 텐데도 이렇게 대접받는 것에 어색해하다니. 아마도 이건 그의 천성일 것이다. 누구와는 다르게 정말 착하고 심성이 고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그 붉은 도마뱀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지.’

생각해 보면 난 정말 운이 좋은 편이다. 만약 이사나가 아니었다면 내 첫 번째 계약자는 라피스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지금쯤 레어에 틀어박혀 호수에 물이나 채워 주고 있었을 테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이사나는 팔찌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신기해하면서도 다른 상념에 빠진 듯 복잡한 얼굴이었다. 지내 온 시간이 제법 여문 건지 이제 표정만 봐도 대충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카터스 제국은 어떤 곳이야, 이사나?”

“응? 아아…… 아까 그 상인이 말했던 그대로야. 마법 문화를 토대로 번성한 지성과 학문의 본고장이지.”

“지성과 학문의 본고장?”

“역사는 우리 스왈트 제국에 비해 짧은 데 비해 빠른 시간에 문화 발전을 이뤘거든. 특히 마법 분야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전 대륙에서 가장 유명해. 이름이 알려진 현자나 마법사들은 대부분 카터스 제국 출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야.”

“헤에, 그렇구나.”

“카터스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가 마법사 출신이었는데, 그 때문에 학문과 마법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해. 그 황제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아카데미는 우리 제국의 귀족들도 수학을 다녀올 정도로 유명하다고 들었어. 카터스가 부강한 제국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어. 마법무구가 백성들 사이에서 일상품으로 쓰일 정도라니, 그에 비하면 우리 스왈트 제국은…….”

오히려 역효과였던 걸까. 설명하면서 풀이 죽었는지 이사나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얼른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넌 이제부터 시작이잖아. 다시 돌아가면 너도 그 제국 못지않게 이곳을 발전시키면 되는 거야.”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황제가 바라는데 이루지 못할 게 뭐가 있겠어? 게다가 그 제국의 황제보다 네가 더 젊을 거 아냐.”

내 말에 이사나는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 보였지만 번민에 휩싸인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제국의 황태자가 나와 같은 나이라고 들었어.”

“황태자?”

“응. 그래서 어릴 때부터 곧잘 비교당하곤 했어. 카터스 제국의 태자는 머리가 매우 명석한 데다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대. 다섯 살 때 기초 마법을 모두 완료하고 열 살 때 초급 숙련자가 된 자타 공인 천재라는 모양이야.”

“에이, 그런 거 부러워할 거 없어. 소문이란 건 실제보다 과장되기 마련이고, 정말 그런 재능이 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어? 오히려 너로서는 더 어깨가 으쓱한 일이지. 같은 나이인데 네가 더 잘나가잖아.”

“그, 그런 건가?”

“당연하지. 아무리 뛰어나 봤자 결국 태자는 황제보다 아랫사람인걸. 게다가 재능만으로 치면 너도 만만치 않다고. 잊어버린 모양인데, 넌 인간 중에서 최초로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사람이거든?”

“어? 최초?”

“어라, 기억 안 나? 전에 트로웰도 말해 줬잖아. 네가 내 첫 계약자라고.”

이사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간단히 언급했던 탓인지 죄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양이었다. 나는 멋쩍은 기분에 볼을 긁었다.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 못 들었구나. 네가 첫 계약자야. 지금까지 누가 엘퀴네스를 소환했다는 기록 본 적 있어?”

“아, 아니.”

“그렇다니까. 마법 신동이 다 뭐야. 희소성으로 치면 네가 더 특별하다고.”

“헤에, 그런가? ……그렇구나.”

이제 이사나는 완전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후드를 푹 눌러쓴 상태임에도 들뜬 기색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단순한 녀석. 나는 실소가 나는 것을 참느라 괜히 헛기침을 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래도 되나 싶긴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오히려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던 과거에 비해 이제는 점점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굉장해, 엘. 너의 말엔 내게 용기를 주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많이 불안했는데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앞으로는 점점 더 좋아질 거야. 그러니까 어떤 일에든 절대 쉽게 비관하지 마. 나쁜 생각은 결국 더 나쁜 생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거든. 희망은 자신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응, 그럴게! 노력할게!”

이사나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대답했다. 환하게 밝아진 얼굴에서 빛 가루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때 이사나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어? 저기 봐, 엘. 특이한 색깔의 고양이야.”

“고양이?”

이사나가 가리킨 곳은 내 뒤편에 있는 작은 담벼락이었다. 그 위에 황금색의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고양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단모였는데, 이사나의 말처럼 털색이 조금 독특했다. 다른 부분은 평범한 은회색인 반면 얼굴에만 진한 붉은색의 얼룩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얼룩이 굉장히 화려해서,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린 무늬처럼 보였다. 거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길고양이처럼 보이진 않았다.

“야옹.”

시선이 마주치자 고양이는 냉큼 담벼락에서 내려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걸 보아 집에서 자란 것이 분명했다.

“어디서 온 거지? 주인이 있는 고양이 같은데.”

이사나는 반색하며 고양이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았다. 나는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그를 향해 말했다.

“잠깐! 만지지 마, 이사나.”

“응? 왜?”

“느낌이 좀 이상해.”

난 원래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평소라면 털색이 특이해서라도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이번만큼은 고양이의 등장이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올수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사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밀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그 순간, 얌전히 있던 고양이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우왓!”

“이사나!”

놀라서 소리치자 고양이는 후다닥 담을 타고 달아났다. 나는 급히 이사나의 상태를 살폈다. 손을 물렸는지 송곳니 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괜찮아?”

“으응, 그냥 살짝 물렸을 뿐이야.”

“윽, 피가 나잖아. 일단 치료부터 하자.”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조금 까진 것뿐인걸?”

“모르는 소리.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동물한테 물린 건 조심해야 돼. 나쁜 균에 감염될지 모르거든.”

“아아, 그렇구나.”

나는 꼼꼼하게 이사나의 상처를 치료했다. 피부가 말끔해지자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양이가 달아난 담 너머를 바라보았다.

“고양이가 기분이 안 좋았나 봐. 그렇게 갑자기 덤벼들 줄은 몰랐어.”

“정말 고양이일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고양이치고는 생김새가 좀 묘했잖아. 꼭 일부러 공격하려고 나타난 것 같지 않아?”

“에이, 설마 그럴 리가.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이야, 엘.”

“으음, 그렇겠지?”

하기야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발상이긴 했다. 아무리 쫓기는 신세라지만 이제 하다못해 지나가는 고양이까지 경계를 하다니. 그동안 숨어만 지낸 탓에 신경이 너무 예민해진 것이 분명했다.

“이만 돌아가자, 이사나. 슬슬 자유 시간도 끝나갈 때야.”

“응, 그래.”

돌아서기 전 나는 다시 한 번 고양이가 사라진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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