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73화 (73/608)

제73화

“좋아, 호수에 관한 건 다음으로 넘긴다 치지. 하지만 나머지 다른 문제는? 유희 기간 내내 넌 내가 부르는 음성엔 응하지 않겠지?”

“그거야…….”

“똑같은 계약자인데 그건 너무 심한 차별 아닌가? 내가 내 정령을 원할 때 마음껏 부를 수도 없다면 계약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하지만 내가 알기론 다른 드래곤들은 그냥 계약만 한다고 들었는데.”

“다른 녀석들과 나는 달라. 그 녀석들은 계약 자체에 의미를 두는지 몰라도 난 그런 취미는 없거든. 가지고 있는 건 뭐든 제대로 활용하자는 주의지. 비단 호수만의 문제가 아니라도 난 널 자주 만나야겠어. 가급적 매일이면 더 좋고.”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맘대로 정하지 마. 누가 그렇게 해 준대?”

“지금 계약자랑은 계속 같이 붙어 다니고 있잖아!”

“그야 이사나는 내가 지켜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렇지. 보호하려면 함께 다녀야 편한 게 당연하잖아. 너랑은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고.”

“뭐야, 정령왕이 한낱 인간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거냐?”

“맞아, 그러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 아무튼 난 그 녀석 곁을 자주 비울 수 없어. 굳이 꼭 매일 봐야겠다면 차라리 네가 내 일정에 참여하는 건 어때?”

“하, 드래곤인 날더러 인간에게 맞춰 여행을 하라고?”

라피스는 정색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나한테 한 행동은 생각하지도 않고, 고작 그 정도 제안에 모욕이라도 당한 얼굴이었다.

“나 참, 그럼 대체 날더러 어쩌란 거야. 할 수 없네. 너와의 계약은 그냥 다음으로 미루는 수밖에.”

“뭐야?”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방법이 그것뿐이잖아. 그러니까 네 쪽에서 선택해. 미리 계약을 하고 내 유희가 끝나길 기다리든가, 아니면 유희가 끝난 후에 계약을 하든가. 난 둘 다 상관없거든.”

“……순한 건지 영악한 건지 모를 성격이군.”

그럼 내가 계속 당해 주고 있을 줄 알았냐?

황망한 듯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날름 혀를 내밀어 보였다. 그때 재밌다는 듯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트로웰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엘, 이만 돌아가자. 사람들이 기다릴 거야.”

“아, 응!”

그렇지 않아도 이미 정신력이 한계에 달해 있는 상태였기에 나는 반갑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트로웰은 빙긋 웃으며 얼굴이 구겨진 라피스를 돌아보았다.

“결정은 천천히 내리도록 해, 라피. 네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명심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정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알았어.”

“그럼 우린 이만 갈게. 다음에 만날 땐 좀 더 성숙한 모습이길 바라.”

“쳇, 남이사.”

짧게 투덜거린 라피스는 얼른 사라지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겉모습은 훨씬 어른이어도 이런 행동은 확실히 트로웰보다 연하다웠다.

이윽고 우리가 돌아설 때까지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이 함께해 준다면 이사나에게도 꽤 도움이 될 텐데. 무심코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나는 쓰게 웃었다. 척 보기에도 자존심이 무척 센 녀석이다. 내가 먼저 제안하긴 했지만 사실 그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저 드래곤을 다시 만나는 게 되는 건 앞으로 머나먼 후의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때쯤엔 오늘의 일을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분명 피곤했고 힘든 시간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미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레드 일족의 라파스라즐리.

짧은 시간, 강렬할 정도로 선명한 인상을 남긴 존재였다.

* * *

매일 치열했던 전투는 숲을 통과하고 나자 한층 소강상태를 띠었다. 더 이상 떼로 몰려 덤벼드는 몬스터도 없었고 산짐승의 기척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간간이 오크들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 수는 지난 시간 동안 마주친 몬스터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어 위협에 해당되지도 않았다.

매일 피가 마를 날이 없던 용병단의 무기에 휴식의 나날이 이어졌다. 날이 서 있던 공기도 한층 느슨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평화로운 시간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헤롤이었다.

“젠장, 진짜 짜증 나 죽겠네. 이런 조용하고 느긋한 일정은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대체 다음 몬스터는 언제 나오는 거야?”

며칠째 평온한 날이 계속되자 그는 점차 히스테릭해졌다. 특히 얼마 전에 있었던 작은 전투가 그가 나서기도 전에 마무리된 뒤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듣기 좋은 소리도 반복이 되면 지치기 마련, 하물며 불만의 소리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매일같이 연이어지는 투정은 일행들 모두를 괴롭게 만들었다. 결국 더 이상 참다 못했는지 이릴이 버럭 짜증을 냈다.

“시끄러, 이 학살광아! 평안해서 좋기만 하구만, 왜 이렇게 죽이질 못해 안달하는 거야? 닥치고 조용히 걷기나 해!”

“우씨, 왜 맨날 나만 미워해?”

“미운 짓을 하니까 미워하지! 휴센, 저 녀석 이제 그만 단에서 쫓아낼 생각 없어? 저놈 하나 때문에 우리들까지 덩달아 평판이 떨어지겠다고!”

“정말 그렇군.”

묵묵히 말을 몰던 휴센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헤롤을 괴롭히는 일에만은 적극적으로 동참하길 좋아하는 그였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비웃음을 본 헤롤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렇긴 뭐가 그렇다는 거야, 이 망할 단장아! 그저 여자라면 눈이 실실 풀려서는!”

“그런 적 없어.”

“흥, 과연 그러실까? 단장이 얼마 전에도 쉐리 쳐다보고 있는 거 내가 다 봤는데?”

“……뭐?”

잠잠하던 휴센의 두 눈에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 쉐리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그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의 표시를 보냈다. 그러나 눈치 없는 헤롤은 멈출 줄을 몰랐다.

“모른 척해도 소용없어. 아주 쉐리한테서 눈을 떼지를 못하시더만. 하긴 쉐리가 좀 예쁘긴 하지. 남자로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는 건 이해해.”

“대체 무슨 소리를…….”

“어허, 계속 모른 척해도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근데 두 사람 나이 차이가 범죄라는 건 알고나 있나? 하긴 모를 리가 없지. 그러니까 조심해! 당신, 자꾸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쉐리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내 버릴 거야!”

꿈틀. 그 순간 휴센의 얼굴 근육이 크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헤롤의 명복을 빌었다. 재수가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하필이면 하고 많은 것들 중에서 그 부분을 언급할 것은 뭔가. 심지어 그가 가장 우려하던 방식으로 말이다. 한마디로 헤롤은 지금 벌집을 제대로 건드린 셈이었다.

스르릉.

휴센은 조용히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검날이 눈부시다고 느낀 찰나, 곧 칼끝이 빠른 속도로 헤롤의 품을 파고들었다. 경고도 없이 날아든 공격에 헤롤은 기겁하여 소리쳤다.

“우와악!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위험하잖아!”

“닥치고 죽어.”

“뭐, 뭐? 자, 잠깐! 진심이야? 눈이 웃고 있질 않다고!”

“당연한 말을 하는군.”

“으헉! 사람 살려! 단장이 미쳤다아!”

제아무리 헤롤이라도 샴페인 용병단에서는 일개 단원에 불과할 뿐. 하물며 전 대륙의 용병들 중에 단 몇 사람, 특별한 존재에게만 허락되는 금패를 소유한 휴센과는 압도적인 실력 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본격적인 공세가 이어지자 헤롤은 꽁지에 불붙은 토끼처럼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비극은 누구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용병단의 사람들은 휴센의 매서운 기세에 질려 차마 다가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일행들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고난을 즐겼다.

“휘익, 단장 최고다! 이참에 완전 끝장을 내 버려!”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어요, 헤롤.”

“잘 가, 헤롤. 시체는 내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줄게.”

“너희들! 정말 이러기야?”

헤롤은 이를 갈았지만, 쉴 틈 없이 밀어닥치는 공격에 떠밀려 복수의 말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이후 휴센은 정말 딱 죽기 직전까지만 헤롤을 구타했다. 일방적인 폭력이 끝나고 모진 비명이 겨우 사그라졌을 때, 현장에 남은 건 퉁퉁 부은 얼굴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헤롤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쉐리가 조용히 한마디 중얼거렸다.

“멍청이.”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인덕을 쌓고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 * *

끝이 보이지 않는 이동에 지칠 무렵 상단 행렬은 인가로 들어섰다. 두 번째 검문을 지난 이후 처음으로 들르는 마을이었다.

벽돌 길에 높은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마을은 이름만 마을일 뿐 규모로 치면 도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거리는 몹시 활발했고,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래선지 제법 큰 행렬인데도 우리들의 모습을 주목하는 시선은 없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숙박 시설을 이용하게 되자 용병들은 매우 들떴다. 연이은 노숙에 고생을 한 건 상단 소속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그들 역시 얼굴이 한층 밝아진 상태였다.

“이곳에서 부족한 물자들을 보충할 거다. 약 이틀 정도 여유 시간이 주어질 테니 그동안 필요한 것들을 사거나 무기를 정비하도록 해. 그리고 이곳은 그리 치안이 좋은 편이 아니다. 쓸데없는 소동에 휘말리지 않게 각별히 주의하도록.”

숙소를 정한 뒤 휴센은 일행들을 향해 간단히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 뒤에는 바로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따로 언급이 없어도 일행들은 알아서 각자의 짐을 챙겨 원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눈치를 보아 그동안 미뤄 왔던 잠을 몰아 자거나 술을 마시러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이사나의 팔을 붙잡았다. 그동안 마음속으로 구상만 했던 계획을 드디어 실현할 순간이었다.

“옷 사러 가자.”

“응? 무슨 옷?”

“네 옷 말이야. 지금 입고 있는 건 많이 더러워졌잖아. 겨울에 입기엔 너무 얇기도 하고.”

“난 괜찮은데…….”

“괜찮긴. 앞으로 점점 더 추워질 텐데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려. 사는 김에 후드랑 여벌옷도 넉넉하게 준비하자. 아무리 여행 중이라도 잘 챙겨 입어야지.”

나는 끝까지 괜찮다고 우기는 이사나를 강제로 끌고 거리로 나섰다. 도시 못지않은 거대한 규모답게, 번화가에는 갖가지 상가와 의류점들이 즐비했다. 그곳에서 나는 두터운 여행복을 비롯한 여러 겨울 용품들을 구입했다. 여유 있는 기간이 아니다 보니 기성품 중에서 고르는 게 고작이었지만 이사나의 체형이 무난해서인지 원하는 걸 찾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아직 성장기라는 점을 감안하여(실제로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조금 짧아져 있었다) 치수는 하나씩 큰 걸로 골랐다.

처음엔 주저하던 이사나도 막상 쇼핑이 시작되고 나서는 신이 났는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덕분에 상가를 한 바퀴 돌고 났을 땐 나와 이사나는 양손 한가득 짐을 짊어진 채였다.

“잔뜩 산 것 같다.”

“그러게. 이걸 전부 들고 다닐 수 있을까?”

“잘 개어서 묶으면 어떻게든 될 거야. 정 안 되면 내가 다 들고 다니지, 뭐. 어차피 나한텐 딱히 무겁지도 않은걸.”

정령이 돼서 좋은 점은 무게감도 잘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땅을 딛고 걸어 다닐 만큼 중력의 영향은 받지만 내게는 조약돌이나 바위나 다 비슷한 무게로 느껴졌다. 그로 인해 낭패를 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트로웰이다. 휴센에게 스카웃되던 당시, 그저 적당히 고른다는 것이 하필이면 기준 이상의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렸던 것이다(그래서 그 뒤로는 아예 천하장사 컨셉을 내세우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내 경우엔 인간으로서의 생활 습관이 남아 있어 무심코 바위를 집어 드는 실수를 벌인 적은 없었다. 이럴 땐 인간으로 살아 봤던 것도 딱히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단점이 더 많은 것 같긴 하지만.

“하하, 어린 친구가 힘이 상당히 센가 보구나. 그러지 말고 이걸 사용해 보는 게 어때?”

그때 바로 옆쪽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길가에서 노점 형식으로 물건을 팔고 있던 상인이었다. 그가 내민 물건을 보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척 보기에도 그저 평범한 배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의 의문을 알겠다는 듯 상인이 냉큼 설명을 덧붙였다.

“이거 이렇게 보여도 경량화 마법이 걸린 거야.”

“에? 경량화 마법?”

“그래. 무려 바다 건너 카터스 제국에서 직접 공수해 온 거라고. 이게 얼마나 신기한 거냐면, 바윗덩어리를 넣어도 솜털을 든 듯이 가볍단 말이지. 의심스러우면 한번 시험해 봐도 좋아.”

“헤에…….”

무게를 줄여 주는 마법이 걸린 배낭이라…… 여기엔 이런 것도 있는 건가?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에 배낭을 받아 들었다. 내부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으나 자세히 들여다보자 미세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스며든 농도를 보아선 그리 수준 높은 마법사가 만든 것은 아닌 듯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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