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71화 (71/608)

제71화

“부서지고 깨어져!”

세 번째 언령이 떨어졌을 때, 그것은 좀 더 분명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젠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한 떨림이 보인 것이다. 내내 느긋하던 드래곤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의식하며 재차 언령을 사용했다.

“조각조각 깨어져 완전히 흩어져라!”

“제길! 포박의 힘은 더 견고해진다. 사로잡은 먹이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 순간 나직한 욕설과 함께 어디선가 강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처음 나를 사로잡았을 때 사용했던 힘, 바로 그 마력이 발현된 것 같았다. 그러자 크게 흔들리던 빛의 막이 빠르게 정돈되더니, 순식간에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지, 지금 뭘 한 거야?”

당황해서 바라보자 이 모든 일의 주범인 것이 분명한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보다시피 용언을 강화시켰지. 설마 내가 얌전히 두고 볼 줄 알았어?”

“이……! 치사하게!”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방어하지 않겠다는 말은 안 했어.”

가증스러운 대꾸에 나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언령을 사용하는 건 나로서도 부담이 큰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모든 시도가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나니 울고 싶어졌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라피스라즐리의 상태도 그다지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얼굴엔 이미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과연 정령왕이군. 설마 이만한 용언을 퍼붓고도 완전히 제압되지 않을 줄은 몰랐어. 이거 꽤나 사나운 맹수를 길들이는 기분인걸.”

“이게 누구 맘대로 동물 취급이야? 에잇! 사라져, 사라지라고!”

나는 다시금 재차 언령을 사용했다. 하지만 굳건히 자리 잡은 장막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라피스라즐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유감이지만, 이번엔 그렇게 쉽게 안 될걸.”

“시끄러! 안 되면 될 때까지 할 거야!”

“끝까지 이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시겠다?”

“당연하지! 내가 이렇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렷!”

쩌저적!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빛의 장막에 갑자기 큰 진동이 일어나더니, 아래서부터 위까지 긴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큭! 잠깐…….”

그와 동시에 라피스라즐리가 창백해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모습에서 이렇게 큰 변화가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마도 지금 놓치면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반격의 기회였다.

‘바로 지금!’

나는 서둘러 손을 들어 물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진 힘으로 균열이 일어난 부분을 강하게 내리쳤다.

촤아아아! 콰직―!

쨍그랑!

마치 유리창이 깨지듯, 맑은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나를 가두고 있던 장막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굳건히 버티고 있던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눈앞에서 흩뿌려지는 빛의 파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파편은 내 주위만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내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언가가 점점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에서 파생된 파편들이 마치 빛의 비처럼 숲 전체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도 잠시간 잊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이 공간을 무(無)정령화로 만들었던 기묘한 힘의 장악이 풀린 듯했다.

“쿨럭! 쿨럭!”

그때 가까운 곳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돌아보니 라피스라즐리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손으로 틀어막고 있는 그의 입에선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제로 유지하고 있던 결계가 깨지면서 역으로 그가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 역시 상태가 엉망인 건 마찬가지였다. 손발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은 물론이고, 주체하기 힘들 만큼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서 있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온몸이 바짝 말라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주, 죽을 것 같아.’

결국 나는 비틀거리며 바닥(이라고는 해도 물 위였지만)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에선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기운도 없었다.

놀라운 일은 바로 그다음에 벌어졌다. 갑자기 물에서 작은 거품이 일어나더니, 그 속에서 나이아스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너희들…….”

두둥실 허공에 떠오른 그들의 품에는 하나같이 동그란 물방울들이 안겨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날아와 허둥지둥 내 몸 위에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렇게 지독하던 갈증이 점차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들의 힘을 나눠 주고 있는 건가? 예상치 못한 일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완전하게는 아니었지만 운신할 수 있을 만큼은 기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 고마워, 얘들아.”

내 인사에 안절부절못하던 나이아스들이 방긋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마주 웃어 줄 겨를도 가질 수 없었다. 그사이 상태가 호전된 건지, 라피스라즐리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안색만큼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나는 바짝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또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녀석인 만큼 절대로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우려했던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감싸고 있던 이질적인 마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본래의 기운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직전까지 나를 붙들고 있던 황금색의 마법진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가 소환진을 완전히 거둔 것이다. 당황해서 바라보자 라피스라즐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졌어. 돌아가.”

“……헤에, 의외네. 또 가둘 줄 알았는데.”

“드래곤은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약속은 어기지 않아. 네 힘으로 봉인을 부쉈으니 내가 한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야.”

그는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끈질기게 굴 때는 언제고, 막상 놓아주는 얼굴에선 일말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것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 같았다.

“엘!”

그때, 숲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거의 날다시피 달려오고 있는 낯익은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트로웰이었다.

“트로웰……!”

그를 보자 긴장이 단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내내 벗어나지 못했던 호수 위에서 겨우 내려섰다. 성큼 다가온 트로웰이 비틀거리는 나를 급히 부축했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는 다르게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괜찮아?”

“으응, 난 멀쩡해.”

“거짓말. 이렇게 지쳐 있으면서. 대체 힘을 얼마나 쓴 거야? 역소환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늦어서 정말 미안해. 이 부근이라는 것까진 알아냈는데 결계가 계속 방해를 해서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어.”

“아, 아냐. 오히려 사과는 내가 해야지. 이런 일에 휘말리는 바람에 여기까지 와 달라고 해서 미안.”

“그런 말 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는 가볍게 혀를 차고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나른하던 몸에 갑자기 상쾌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이아스들이 전해 주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좀 어때?”

“괴, 굉장해. 완전히 나은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줄래?”

“응?”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는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곤 몸을 돌려 성큼성큼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라피스라즐리의 앞이었다. 똑바로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서 잠시간 기묘한 공기가 흘렀다.

“…….”

“…….”

잘못을 알기 때문일까. 라피스라즐리는 이상하리만치 트로웰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반대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트로웰의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런데 그 순간, 느닷없이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트로웰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날려 버린 것이다.

퍼억!

“트, 트로웰!”

당황해서 소리쳤을 땐 이미 라피스라즐리는 맥없이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몬스터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힘이다. 그것에 정통으로 맞았으니 온전할 리가 없었다.

나는 황급히 라피스라즐리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입술이 완전히 터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곧 몸을 일으킨 다음 찌푸린 얼굴로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꽤 아픈지 건드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설마 이러다 일이 더 커지는 건 아니겠지? 잠깐 겪어 본 것에 불과하지만 타고난 천성이 더러운 녀석이었다. 자신을 때린 사람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그저 묵묵히 맞은 부위를 쓰다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트로웰이 냉담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레드 일족의 라피스라즐리. 이 정도에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알아. 엘이 먼저 결계를 부수지 않았다면 넌 내 손으로 죽였어.”

서늘하게 말하는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는 새삼 트로웰이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겉모습만 소년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눈앞의 드래곤보다 연장자라는 것도 말이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대형 사고를 터뜨려? 대체 언제부터 왕과의 계약이 이렇게 우스운 방식이 됐지? 넌 엘만이 아니라 우리 4대 정령 전체의 자긍심을 짓밟았어. 로드에게 말해 엄중한 훈계 조치를 받게 하겠다.”

“…….”

“대답은?”

가라앉은 눈빛이 몹시 찼다. 이렇게 화난 모습의 트로웰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나는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었다. 곧 라피스라즐리가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심했단 거 인정해. 어떤 처벌이든 감수하지. 앞으론 절대 이런 일 없을 거다.”

“그건 약속이겠지?”

“물론이야.”

그가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자 트로웰도 한층 기분이 풀린 듯했다. 그는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거냐. 너답지 않게.”

“……나답지 않다니.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건 다 너희의 그 잘나신 엘퀴네스잖아. 아니, 이젠 전대의 엘퀴네스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대체 그 녀석은 언제 소멸한 거야?”

투덜거리는 말에 트로웰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한심해하는 표정이었다.

“벌써 이십 년도 더 됐어. 예상은 했지만 정말 전혀 몰랐던 모양이네.”

“알아주길 바라면 은퇴식이라도 해. 말도 하지 않고 떠나는데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쳇, 사실 이번 결계도 다 그 녀석한테 쓰려고 만든 거라고. 그동안 당해 준 게 얼만데 한 번 정도는 골탕 먹여도 되는 거 아냐? 그런데 설마 이렇게 갑자기 소멸하다니. 정말 끝까지 재수 없는 놈이야.”

“그건 예측하지 못한 쪽이 바보지. 네가 처음 그를 소환했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만 칠천 세를 넘어 있었어. 일반적으론 소멸할 시기가 훨씬 지난 상태였다고.”

“그러니까 더 짜증 난다는 거야. 이왕 지난 김에 좀 더 있다가 소멸해도 되는 거잖아. 게다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열 받는데 이번 엘퀴네스까지 계약할 생각이 없다질 않나!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그래서 스스로 이미지를 쇄신할 기회마저 버린 거야? 정말 어리석네. 연장자로서 말하는데, 넌 일단 그 발끈하는 성격을 고칠 필요가 있어.”

“시끄러! 겨우 나보다 이천 살가량 더 먹은 것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트로웰.”

이제 보니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 온 사이인 모양이다. 그것도 그저 단순히 아는 것만이 아니라 꽤 친밀한 관계인 것 같았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점차 편안해지는 분위기가 그것을 반증했다.

“저어, 트로웰……?”

마치 홀로 동떨어진 기분에 나는 민망해져서 그를 불렀다. 그러자 트로웰이 당황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아, 미안해, 엘. 사실은 이 녀석, 내 계약자의 아들이야.”

“에? 아들?”

“전에 말했던 블랙 드래곤 말이야. 그리고 좀 더 관계를 덧붙이자면 나의 대자(代子)이기도 해. 부친의 부탁으로 대부가 되어 주기로 했거든.”

“헤에, 정말?”

트로웰이 저 레드 드래곤의 대부였다고? 뜻밖의 관계에 놀라서 바라보자 라피스라즐리는 벌레를 잔뜩 씹은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트로웰이 그의 무릎을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큽! 뭐 하는 거야!”

“그에게 무례한 표정 짓지 마.”

“뭐?”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말해 줄까?”

“……젠장, 대체 무슨 생각이야? 언제부터 그렇게 같은 정령왕을 챙기셨다고.”

투덜거리는 그를 향해 트로웰은 말없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입을 다물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이런 녀석이라 정말 미안해. 사실 이번 일은 대부로서 그를 잘 가르치지 못한 내 잘못이기도 해. 그래서 너한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내가 단단히 감시할게.”

“아, 아냐. 벌써 다 잊었는걸. 뭐, 보아하니 그저 내가 운이 나빴던 것 같은데,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자랑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예전부터 익숙하거든. 아하하…….”

“……넌 성격이 너무 좋아서 문제야.”

어색한 대답에 트로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이 불쾌했던 걸까? 더 이상 못 봐 주겠다는 듯 라피스라즐리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쳇, 시시한 대화나 할 거면 그만 가 버려. 괜히 남 염장이나 지르지 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