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정령으로 태어난 이후로 내 일상은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한적한 장소를 찾기가 힘들어 졌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선 어느 곳을 가도 크고 작은 정령들의 모습이 쉽게 눈에 띄었다. 그들은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의 기초였으며, 배경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선 그 어디를 보아도 자연체의 정령들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물의 정령조차 말이다.
대체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이렇게 거대한 호수에 나이아스가 단 하나도 없다니. 이건 결코 자연적으로는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나를 직접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빛의 막 외에도, 무언가 알지 못하는 힘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싶은 기분에 나는 급히 손을 투영하고 있는 마나를 일부 거둬 냈다. 그러자 생기 있는 피부가 사라지고, 자연체 특유의 투명한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령의 본육신은 거의 영체에 가깝다. 보통 이런 상태일 땐 무엇이든 그대로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살짝 내밀어 본 손은 여전히 단단한 벽에 가로막혔다. 나는 황망한 심정으로 헛숨을 삼켰다.
‘……뭐야, 이거 설마 정령의 본신에도 통하는 거야?’
그런 내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라피스라즐리가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놀랄 거 없어. 당연한 일이니까. 내 용언은 완벽하거든.”
“말도 안 돼…….”
“아니. 확실히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나 정도로 뛰어난 두뇌와 재능이 받쳐 준다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애초에 보이지 않는 정령을 가두는 것도 아니고, 난 지금 네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잖아. 더구나 내가 선택한 장소, 내가 만든 소환진에 의해 마나가 묶여 있지.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된 것 같은데?”
그제야 나는 녀석의 술수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으로 작정하고 준비를 해 뒀던 것이다. 미리 함정을 파 두고, 나를 그 자리에 불러냈다. 주위에 정령이 전혀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가 숨어서 이런 걸 만들고 있었기 때문인 걸까? 막막한 기분에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위로하듯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계약만 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야.”
“누구 맘대로. 이렇게 되면 오기로라도 할 생각이 없거든?”
“정말 고집이 세군. 뭐, 상관없어.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알다시피 우리 종족의 수명은 길거든.”
“……진심이야?”
“물론 진심이지. 아아, 너무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진 마. 그래도 정령계는 오갈 수 있을 테니까.”
“정령계?”
“그래. 아무리 나라도 그것까진 막을 방법이 없더군. 물론 지상으로 내려오면 무조건 이 장소에 갇히겠지만 말이야.”
알겠지, 엘? 갑자기 일행들과 떨어지게 되면 당황하지 말고 바로 정령계로 돌아가.
그 순간 불현듯 트로웰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제대로 인지했으면서도 너무 경황이 없어 지금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말이었다.
그 뒤에 할 일은 아마 너 스스로 알게 될 거야.
캄캄하던 암흑 속에 한 줄기 섬광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라피스라즐리를 바라보았다.
“정령계로 갈 거야.”
“마음대로. 하지만 이 소환진은 계속 유지될 거다. 그리고 넌 다시 이 장소로 끌려오게 되겠지. 그 점은 각오하고 가도록 해.”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이 정말 얄미웠다. 나는 말없이 녀석을 쏘아본 다음 그 즉시 정령계로 향하는 공간의 문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는 수밖에!
정령계로 귀환하자 물의 영역 특유의 잔잔하고 포근한 느낌이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돌아온 순간부터 나는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득달같이 달려드는 소환진 때문이었다. 무시하려 했지만 작정을 한 것인지 쉴 새 없이 불러 대는 목소리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돌아와, 엘퀴네스.』
『내 말 들리는 거 다 알아.』
『그만 포기하고 오지그래?』
“젠장, 누가 보면 여기 온 지 몇 년은 지난 줄 알겠다. 나 지금 방금 돌아왔거든?”
『별다른 소득이 없다는 걸 알면서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하는 이유가 궁금하네. 설마 괴롭힘당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야?』
“내가 미쳤냐!”
『반응을 하지 않겠다, 이건가? 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해보지.』
“이 지독한 자식!”
대체 이 대륙의 신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저런 미친 드래곤은 정신 병원 같은 곳에라도 집어넣어야 할 것 아냐!
이후에도 라피스라즐리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대로 놔두면 아예 노래라도 부를 기세였다. 나는 몸서리치며 곧장 에바스에덴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보석으로 된 꽃밭, 지천의 화려한 풍경들이 나를 맞이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트로웰이 말했던 것처럼,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놈! 놈 어딨어! 클레이! 멀든! 아무나 좋으니까 나와 봐!”
비명 같은 외침에 곧 땅속에서 불쑥 무언가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밀조밀하게 생긴 작은 난쟁이의 얼굴. 땅의 하급 정령인 놈이었다. 놈은 하급 정령들 중에서도 가장 겁이 많은 정령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를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부, 부르셨사옵니까. 고귀하신 물의 정령왕이시여.
“그래, 잘 왔어.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다. 너 혹시 내 말을 트로웰에게 전해 줄 수 있어?”
―무, 물론입니다. 하명하시옵소서.
“하아, 잘됐다. 그럼 지금 당장 가서 도움 좀 청해 줄래?”
―예? 도, 도움이라 하시옴은?
“실은 내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려서 아무래도 혼자서는 못 빠져나올 것 같거든. 정확한 지점은 잘 모르겠는데, 꽤 깊은 숲 속이고 그 안에 굉장히 큰 호수가 있어. 아마 기억을 되짚으면 그런 장소들 중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령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젠 다가가지 못하게 된 곳이 있을 거야. 트로웰에게 그쪽으로 와 달라고 해 줘.”
―예. 아, 알겠습니다. 그대로 전하겠사옵니다.
“그래, 정말 고마워. 잘 부탁할게.”
긍정적인 대답에 나는 깊이 안도했다. 빈약한 정보이긴 했지만 트로웰이라면 아마도 금방 날 찾아내 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니 다른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드래곤에게 붙잡힌 정령왕이라니. 그가 유리컵에 갇혀 있는 날 보면 얼마나 황당해할까? 심지어 사전에 위험한 일이 있을 거라 친히 경고까지 해 줬는데 말이다.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면 일찍 맞는 게 나았지만,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난 최선을 다했다는 말도 꼭 같이 전해 줘.”
* * *
차오른 달빛이 사라지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한층 밝아진 하늘은 자욱하게 깔린 구름에 맞물려 어슴푸레한 색을 띠고 있었다. 이제 슬슬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 행렬을 정비할 시각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트로웰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놈에게 직접 맡긴 일이니 연락이 닿기는 했을 것이다. 단지 장소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긴 건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답답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느긋하게 걸터앉은 붉은 머리의 남자가 두 팔을 깍지 낀 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미소 지은 얼굴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긴, 보란 듯이 정령계로 도망간 녀석이 다시 제 발로 돌아와 이러고 있으니 재밌기야 할 것이다.
지금 내 심정을 말하자면, 마치 탈옥한 죄수가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스스로 자수한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몹시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정령계에서 내내 소음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이편이 더 나았다. 꼴 보기 싫은 얼굴이야 보지 않으면 그만이고, 트로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때운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다행히 그렇게 수다스러웠던 녀석도 내가 다시 돌아오고 나서부턴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 역시 말을 건넬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주위는 매우 깊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상태가 길어지고 나니 먼저 지치게 되는 건 나였다. 차라리 서로 관심을 두지 않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뚫어질 듯 응시하는 시선이 빤히 느껴지는데 아무런 말이 없으니 오히려 점점 더 부담스러웠다. 이것도 날 괴롭히는 방법 중 하나라면 매우 성공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결국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이야.”
“네가 계약을 한다고 할 때까지. 이미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그는 여전히 밉살맞은 어투로, 노래하듯이 대답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바닥을 노려보았다. 일렁거리는 호수의 표면, 금빛으로 반짝이는 마법진이 보였다. 아름다운 문양이었지만 내겐 그저 이곳에 날 가둬 두는 족쇄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다른 부분이 더 신경 쓰였다. 그건 바로…….
“이 소환진, 네 힘으로 유지되고 있는 거 아냐? 이렇게 계속 마나를 퍼붓고 있어도 돼? 그러다 죽을지도 몰라.”
당연한 말이지만 정령왕의 소환에는 무지막지한 마나가 소비된다. 앞서 날 소환한 이사나의 경우만 보더라도, 소환진을 형성하는 단계에서 탈진해 의식을 잃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이 소환진을 유지하기 위해선 계속 같은 양의 마나를 꾸준히 공급해야 한다. 즉,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에도 라피스라즐리는 엄청난 마나를 쓰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녀석은 그저 가볍게 코웃음 칠 뿐이었다.
“성룡인 드래곤의 마나를 우습게 보는군. 내게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오히려 사정이 급한 건 너겠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윽…….”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해지지? 돌아가지 못해서 괴로울 거야. 보아하니 꽤 재밌는 유희를 시작한 것 같던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정령왕의 세대교체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녀석이 설마 이번 나의 여행에 대해서 알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떻게라니, 그렇게 눈에 띄는 일을 벌여 놓고 모르길 바라는 게 오히려 우스운 거 아닌가?”
“무슨…….”
“삼 일의 기적.”
“……!”
“내가 알기로 이 땅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 존재는 단 하나뿐이거든.”
의미심장하게 웃는 얼굴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소문의 주체가 나라는 걸 알았다면, 내 계약자가 누군지 알아맞히는 건 더 간단한 문제다.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이미 녀석에게 들은 말이 있는 만큼 마음이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층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설마, 정말 내 계약자를 죽이려는 건 아니지?”
“글쎄, 어떻게 할까.”
“그러기만 해 봐. 진짜 용서 안 할 거야.”
“그렇게 말해 봤자, 지금 네 모습으로는 전혀 위협이 안 되는데? 그냥 새장 속에 갇힌 카나리아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거든. 아니지, 머리카락이 푸른색이니까 파랑새이려나?”
“뭐, 뭐야? 너 지금 말 다 했어?”
“분하면 그 안에서 나와 봐. 네 힘으로 직접.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네 계약자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덧붙여 더 이상 계약해 달라는 요구도 하지 않겠어.”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그의 표정엔 노골적인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애초에 불가능을 전제로 제시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좋아,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나는 이를 갈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수한 물리력만으로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정령왕에게는 신에 가까운 힘, 바로 언령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 언령도 중간계에선 위력이 상당히 감소된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시도를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저 밉살맞은 얼굴을 조금이라도 찌푸리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의식을 집중시켰다. 언령은 의지를 통한 발현, 마음속 염원이 강할수록 발현했을 때의 효과도 그만큼 컸다. 그 상태에서 나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 빛의 막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라져.”
이미 한 번 해 봤던 일이기 때문에 언령을 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중간계이기 때문일까. 장막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금 긴장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던 라피스라즐리가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시도했다.
“부서져라.”
이번에도 장막은 변화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언령이 떨어진 순간 빛무리가 미세하게 흔들린 것이다. 그건 틀림없이 내 힘에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