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그 뒤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성토하기까지 나는 꽤 오랜 인내의 과정을 밟아야 했다. 몇 번이나 되풀어 강조하자 그들은 긴가민가해하면서도 결국 내 말을 믿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완전히 의심의 눈길이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샴페인 용병단원들이 괜히 후드를 쓰라고 한 게 아니었군.”
“그러게 말이야. 계집애보다 더 계집애 같은 얼굴을 가진 사내 녀석이라니. 장담하는데 넌 여장만 하면 당장 귀족가의 첩으로 들어가서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을 거다. 아니, 여장을 안 해도 가능할 것 같은데?”
“그만 좀 놀리세요.”
“아냐, 진짜야. 넌 정말 남자로 태어난 게 이상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사실은 저도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요.”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정체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가 여성체일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사람들이라면 사실은 여자라고 밝혀도 전혀 의심 없이 믿어 줄 것만 같아 더 무섭다. 비참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생각났다는 듯 누군가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클모어에 도착하면 샴페인 용병단과 헤어지는 거지? 거기에선 더 각별히 조심하는 게 좋겠다. 꼭 후드를 쓰고 다니도록 해.”
“네? 왜요?”
“왜긴. 대공의 기사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잖아.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말인데 말이야, 요즘 대공이 아이들을 모으고 있다고 하더라고.”
“……아이?”
“그래,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나이라면 누구든. 외형만 괜찮으면 성별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잡아가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괜히 눈에 띄었다간 너도 바로 잡혀갈지도 몰라. 물론 단지 소문일 뿐이지만 말이야.”
“잡아가서 뭘 하는데요?”
“그거야 뻔하지, 뭐. 아직 성혼도 하지 않았겠다, 밤 시중을 들게 하는 거 아니겠어?”
“쿨럭!”
맙소사. 형의 죽음에 일조하고 친조카를 쫓아내는 걸로도 모자라 이젠 그런 변태 짓까지 한다고? 뭐,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이 다 있어?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문의 일부랍시고 가르쳐 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미 상당수의 소녀들이 대공에게 바쳐졌다지?”
“어디 소녀들뿐이야? 사내 중에서도 예쁘장한 것들은 진즉에 바쳐졌다고. 오히려 남색을 더 밝힌다는 말도 있던데.”
“우웩, 소름 돋아. 대공 정도의 신분이면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여자들일 텐데 굳이 그러고 싶나?”
“높으신 분의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 사실 대공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건 예전부터 꽤 유명했잖아.”
“맞아, 주기적으로 노예시장에 들러 소년 소녀들을 사 갔다고 들었어. 신관이라고 해도 어차피 마신교는 금욕을 강요하지 않으니 아주 대놓고 즐긴 것 같던데.”
“오죽하면 황제가 도망친 이유가 대공이 추근거려서라는 말이 다 있겠어?”
“푸핫, 그게 정말이야? 진짜 웃기다!”
“…….”
그들로서는 시간 때우기용의 심심풀이 대화에 불과하겠지만 듣고 있는 나는 결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남들에겐 사소한 이야깃거리일지라도 나와 이사나에겐 당장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으니까. 우리가 앞으로 대적해야 할 상대가 그런 초특급 변태였다니. 그야말로 눈앞이 아득한 심정이었다.
* * *
밤이 깊어짐에 따라 들떠 있던 공기도 차츰 진정되었다. 그즈음 나는 용병들을 일별하고 자리를 떠났다. 더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할 겸, 가볍게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너무 멀리가지는 마라.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비명 지르고.”
“네, 근처만 돌아보는 것뿐인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당부를 건네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숲 쪽으로 다가서자 가을 특유의 진한 흙냄새가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넘실거리는 바람 위에선 잠을 잊은 실프들이 신 나게 발을 구르는 중이었다.
계절의 전환을 증명하듯, 얼마 전과는 다르게 그들의 투명한 몸 위엔 작은 서리들이 맺혀 있었다. 반짝이는 눈의 결정이 그들의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 한 올 한 올을 전부 새하얗게 뒤덮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바람이 아닌 얼음의 요정인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가장 확연히 달라진 변화는 바로 진, 바람의 상급 정령의 숫자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간간이 한두 명 정도에 불과하던 그들의 숫자가 최근 들어서는 어디를 가도 보일 정도로 눈에 띄게 불어 있었다. 그때마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 역시 한층 낮은 온도를 띠었다.
‘슬슬 겨울옷을 장만해야겠는걸.’
나는 상관없지만 이사나에겐 두터운 솜옷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도망칠 때 급하게 마련한 거라 재질도 별로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겨울을 나기엔 너무 낡고 얇았다. 마을에 닿는 대로 서둘러 옷 가게부터 들러야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스.』
“응?”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나?
왠지 기묘한 기분에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일행들이 있는 곳과는 상당히 거리가 벌어진 참이라 근처에 누군가 있을 리 없었다. 굳이 있다면 자연체의 정령들이겠지만, 그들 역시 내게선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잘못 들은 건가.’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그 순간 다시금 귓가를 스치는 소리가 있었다.
『엘퀴네스.』
“……!”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나는 절로 굳는 얼굴을 느끼며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애칭도 아니고 ‘엘퀴네스’라니. 이곳에서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트로웰과 이사나뿐이다. 그들 외에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를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들려온 음색은 그들 중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전혀 낯선 이의 것이 분명했다.
“뭐야…… 누구야?”
『엘퀴네스.』
음성은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해졌다. 소름 끼치도록 낮은, 그럼에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묘하게 달콤한 미성이었다.
『내게 대답해라, 엘퀴네스.』
재차 반복된 음성이 이번엔 좀 더 분명한 형태로, 그리고 몹시 오만한 태도를 띠고 내게 명령을 내렸다. 듣기 좋은 목소리임은 분명했지만, 그다지 호감이 가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나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누가 나를 부르고 있는 거지? 목소리는 확실히 들리는데 상대의 정체를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건 마치 이사나가 나를 소환했을 때 같은…….
‘잠깐! 소환이라고?’
퍼뜩 미치는 생각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발밑으로 금빛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둥근 원형의 테두리와 복잡한 문자의 향연, 그 안을 가득 채운 수많은 기호와 도형들. 이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던 소환의 마법진이었다.
“말도 안 돼…….”
나는 절로 튀어나온 탄식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떠오른 지식에 의하면 정령왕의 계약은 한 시대에 단 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이미 이사나가 나와 계약한 이상, 물의 정령왕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발밑에 일렁거리고 있는 금빛의 무늬는 분명 누군가 나를 소환한 증거였다.
『부름에 답해, 엘퀴네스.』
망설임을 읽은 것일까.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가 다시 반복해서 나를 불렀다.
『나는 자격을 갖췄어. 넌 나를 무시할 수 없어.』
으르렁거리듯이 사나운 음성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계속 소환에 응하지 않자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일단은 가 봐야겠지? 일이 어떻게 된 건지도 알아봐야 하고…….”
설마 트로웰이 말했던 예언이 바로 이것이었을까? 이사나가 아닌 또 다른 인물에 의한 소환? 과연 그렇다면 일행들과 떨어지게 되는 게 당연했다. 누가 부르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 이 근처에 있는 사람이 소환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혹시 나에게 보이는 누군가의 지나칠 정도의 관심이라는 것도 이 소환진 밖의 상대와 관계가 있는 걸까?
복잡한 기분으로 마법진을 바라보고 있자, 재촉하듯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한테만 들려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보초를 서던 용병들이 전부 달려오고도 남을 만큼 큰 소리였다.
『엘퀴네스! 날 거부하지 마!』
“……젠장, 누군지 몰라도 쓰는 어휘 표현하고는. 간다, 가! 간다고!”
똑같은 소환인데 어째 이사나와는 이렇게 다른 건지. 그 녀석은 애절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듯이 불렀는데 말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차라리 이런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난 이사나 외에 다른 존재와 계약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착한 사람이었다면 거절하는 것도 난처했을 텐데 왠지 이 사람만은 당당하게 거부하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힌 나는 천천히 마법진 위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이전에 겪은 것과 똑같이 우악스러운 힘이 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악물었다.
제기랄, 이 끔찍한 느낌을 또 받게 하다니! 누군지 만나기만 해 봐! 가자마자 한 대 때려 줄 테다!
* * *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거대한 호수와 그 주변을 자욱하게 둘러싼 나무숲이었다. 짙은 어둠이 깔린 한밤, 달빛에 반사되는 호수의 표면은 마치 얼음처럼 고운 은백색을 띠었다. 그리고 나는 그 호수의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갑자기 달라진 공간의 변화는 여전히 낯설었지만 이미 겪었던 일이라 처음처럼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소환진을 통과한 탓일까. 나를 감싸고 있던 마나가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지금 나를 소환한 상대의 것일 터였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나를 부른 소환자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쪽이다.”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나는 흠칫 놀라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어둑한 나무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와 물 위에 착지했다. 이번 소환은 이사나 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부르는 말투도 그렇지만 의식을 잃지도,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 그사이 상대 역시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얼굴을 뒤덮고 있던 그늘이 걷히며, 새하얀 달빛 아래 섬세한 이목구비가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점차 선명해지는 상대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숨을 멈췄다. 그는 어림잡아 이십 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것 같은 청년이었다. 어깨 아래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짙은 붉은색, 조각처럼 새하얀 얼굴 사이에 자리 잡은 눈동자 또한 그와 같았다. 키는 훤칠하게 컸고, 오랫동안 운동을 했는지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날씬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아주 조금 과하게 말하면 엘뤼엔보다 더 잘생긴 것 같았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 또 있었다니.’
외모에 압도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덕분에 만나자마자 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쑥 들어갔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바짝 긴장해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약간 미간을 좁힌 그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야, 넌?”
“……네?”
“너 누구냐고. 난 분명히 엘퀴네스를 불렀는데.”
“저 엘퀴네스 맞는데요.”
뭐야, 자기가 불렀으면서 알아보지도 못하는 건가? 불쾌한 태도였지만 초면이었으므로 나는 일단 얌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점점 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조각 같던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웬 존댓말? 정말 뭔가 이상한데? 기운은 확실히 엘퀴네스가 맞는데 말이야. 하지만 외모가…… 설마 정령이 폴리모프할 수 있을 리는 없고…….”
“죄송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절 어디서 보신 적이 있나요?”
“하아? 본 적이 있냐고? 이번 것까지 합치면 벌써 250번째의 소환이다. 날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할 참이야?”
“그게 무슨…….”
“아아, 됐어. 그보다 대체 무슨 변덕이야? 갑자기 물을 걷어 버리기에 드디어 아크아돈을 멸망시키려나 보다 했더니, 요 몇 달 사이에 또 갑자기 회복시키질 않나. 게다가 외형은 대체 어떻게 바꾼 거야?”
“저기, 잠깐만 기다려요.”
한꺼번에 쏟아지는 말들에 나는 서둘러 손을 들어 그를 제지시켰다. 상황 판단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왠지 그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설마, 당신…… 드래곤?”
그러자 그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그제야 나는 그의 전신에 흐르는 강력한 마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몸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심장, 그로부터 시작되는 순수한 마력 덩어리. 그건 결코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더불어 그 안에 잠식된 본질은 몹시 뜨겁고 날카로웠다. 거대한 분화구 속, 타오르는 화염의 열기를 떠오르게 하는 기운이었다.
……그래, 마치 이프리트처럼.
그 순간 한동안 기억 속에 묻어 뒀던 한 존재가 떠올랐다. 전대의 엘퀴네스에게 유달리 집착했다는 특이한 성격의 레드 드래곤. 덕분에 내 유희를 시작부터 좌절로 이끌었던 바로 그 라피스라즐리라는 녀석 말이다.
“이건 노파심에 묻는 건데요. 혹시 그쪽 이름이 라피스라즐리라든가, 그런 건 아니죠?”
“……너야말로 무슨 농담을 하고 있는 거지?”
“하하! 그렇죠? 그럴 리가…….”
“흥, 날 모른 척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래 봤자 소용없어. 이번엔 절대 그냥 물러나지 않을 테니까.”
“…….”
젠장, 역시 맞았잖아.
나는 절로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가까스로 수습했다. 설마 이렇게 갑자기 라피스라즐리를 만나게 될 줄이야. 게다가 눈치를 보아하니 그는 아직도 정령왕의 세대교체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엘뤼엔과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의 나를 보고도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가는 것만 봐도 그랬다.
‘대체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살았기에.’
그러고 보니 250번이나 소환을 했다고 했던가? 언젠가 만나게 되면 복수해 줄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이렇게 되고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입장에선 평생 보답받지 못한 짝사랑을 한 셈이었으니까. 물론 남자라는 점은 상당히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