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그런데 엘뤼엔도 마속성의 신 아닌가요?”
“맞습니다. 저희 사제들은 조금 특별한 사례죠. 마속성이면서도 치유의 성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단죄를 뜻하는 형벌의 사제들이 치유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분들도 많기는 합니다만…….”
“뭐, 육체의 고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겠죠.”
“그게 무슨 뜻인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말에 카이테인은 유난히 관심을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단죄 방식이 전부 똑같지는 않잖아요. 때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형벌이 되는 경우도 있죠. 본인에게는 물론, 다른 누군가에게도요.”
“살아 있음으로 형벌이 된다…….”
“네. 더구나 단죄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거든요. 아무리 선량하다 해도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단죄는 신에게 맡기되, 사제들은 오히려 죄인을 위해 기도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엘뤼엔의 문장을 봐도 저울은 양쪽 다 똑같이 평행을 이루고 있잖아요. 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과연. 멋진 대답이군요.”
“그, 그런가요?”
뜻밖의 칭찬에 나는 당황했다. 사실 큰 고민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심 건방지게 여기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 예상을 깨고 카이테인은 오히려 한층 더 부드러워진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더 엄청난 말까지 건넸다.
“엘, 당신이라면 신의 음성을 들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저, 정말요?”
“물론입니다. 왠지 좋은 예감이 드는군요. 신전에 도착하시면 원하시는 바를 꼭 이루게 되실 겁니다.”
“아하하…… 그럼 저야 영광이죠.”
……하지만 과연 엘뤼엔이 만나 줄지 모르겠는걸요. 아니, 만난다 하더라도 그가 순순히 협조해 줄 거란 보장도 없어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뒷말을 삼키며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그러자 카이테인은 불안해할 것 없다며 차분히 나를 위안했다. 복잡한 심경에 굳어진 얼굴을 긴장한 탓으로 오해한 듯했다.
그 덕분에 나는 오히려 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아마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실은 정령왕이며, 단지 유희를 편하게 하기 위해 신을 이용할 생각이나 하는 괘씸한 녀석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정령왕이라니, 생각해 보니 이 무슨 처량한 신세인가 싶다.
유희라는 것,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 * *
부상자들을 돌보고 난 것은 해가 거의 다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이미 야영을 시작한 용병들은 각자 침낭을 꺼내 들고 취침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앓는 소리로 가득하던 공간도 어느새 고요한 숨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카이테인은 마지막으로 환자들의 상태를 점검한 다음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엘.”
“뭘요. 앞으로도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쁜걸요.”
사실 조금 더 솔직한 기분을 말하자면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 마음 놓고 치료술을 쓸 수 없다면 하다못해 치료 행위에 일조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 신의 문장을 받으러 갈 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결국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위선인 것이다. 그런 주제에 아무렇지 않게 너스레를 떠는 나 자신이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그 뒤 나는 카이테인과 일별하고 일행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런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트로웰이었다. 그런데 그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묘하게 기분이 상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그래, 매튜?”
“지금까지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었던 거야?”
“응. 아, 하지만 치료술은 안 썼어. 걱정 안 해도 돼.”
“그게 아냐.”
“응?”
“신관 옆에서 내내 잔일을 도왔잖아. 난 엘이 인간의 심부름 따위를 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그는 꼭 토라진 것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잔뜩 부푼 두 볼에 퉁명스러움이 가득했다.
트로웰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항상 어른스러운 모습밖에 보지 못했기에 나는 매우 당황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푸흡, 지금 뭐 하는 거야, 매튜. 겨우 잔심부름한 걸 가지고.”
“겨우라니. 엘, 너는 네 자신의 가치를 너무 모르고 있어. 그런 조잡한 일에까지 일부러 나서지 않아도 돼.”
“내가 좋아서 한 거야. 마냥 누리는 생활만 할 생각이라면 애초에 유희를 할 필요가 없잖아. 그러는 매튜도 일행들과 함께 텐트를 치거나 무기를 정비하는 일을 돕기도 하면서.”
“그건…….”
“나도 별로 다르지 않아. 그냥 도울 수 있는 일을 돕는 것뿐이야. 내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사실이지만, 매튜는 너무 날 과보호하는 것 같아.”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트로웰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미간을 좁히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말이 맞아, 엘.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다. 미안해.”
“아, 아냐. 나야말로 마음 써 준 건데 그런 식으로 말해서 미안해.”
“아니, 내가 지나쳤어. 나도 모르게 무심코 너를 내 보호 대상으로 대했어. 네 입장을 너무 배려하지 못한 행동이었던 것 같아.”
“아니라니까. 그건 전부 나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 난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매튜는 아무 잘못 없어. 진짜야.”
“하지만…….”
“정말이래도? 또 미안하다고 하면 나도 계속 사과할 거야. 누가 더 미안한가, 가를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그래그래. 알았어. 내가 졌어.”
트로웰은 피식 웃으며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하지만 확실히 그가 내게 유난히 관대한 편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어리바리하다 해도 보통 정령왕이 다른 정령왕의 유희를 옆에서 돕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내가 특이해서 그렇지, 만약 보통의 정령왕이었다면 오히려 자존심이 상해 역정이 났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그 역시 처음부터 이런 배려를 할 리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 점이 고마우면서도 또 한없이 미안했다.
“참, 혹시 몰라서 미리 말해 두는 건데 말이야, 엘.”
“응?”
불쑥 진지하게 말하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 또한 덩달아 긴장해서 눈을 깜빡였다. 그는 힐끗 주위를 살피고는 곧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굳게 다물어진 입에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갑자기 일행들과 떨어지게 되면 당황하지 말고 바로 정령계로 돌아가.』
마치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 정령의 대화법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킨 채 차분히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질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딱히 큰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아무튼 잊지 마. 혼자가 되면 바로 정령계로 돌아가는 거야. 알겠지? 그 뒤에 할 일은 아마 너 스스로 알게 될 거야.』
『설마, 그건 예언이야?』
당황해서 되묻는 말에 트로웰은 굳어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말하길, 가까운 미래에 내게 인연의 별이 깃들었다는 것이다.
『인연의 별?』
『위험할 정도로 선명한 기운이야. 그것이 엘, 너를 향해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 그것의 정체는 조만간 알아낼 수 있을 테지만…… 현재까진 적의인지 호의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아. 다만 그것이 네게 미칠 영향이 굉장히 클 거라는 것만은 확실해.』
그렇게 말한 뒤 트로웰은 담담히 나를 직시했다. 투명하게 발하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이 순간 처음으로 두렵게 느껴졌다. 마치 살아 있지 않은, 무기질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혜안을 열었을 때의 트로웰의 눈빛은 이렇구나. 이전에도 그가 예언을 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자세히 얼굴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속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 피할 방법은 없는 거야?』
『으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렇게 강한 인연의 별은 떨쳐 내는 것도 쉽지 않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너는 그것으로 인해 여러 가지 일들에 휘말리게 될 거고, 반드시 한 번은 많은 사람들과 이별을 겪을 거야.』
『이, 이별?』
『미안, 엘.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야.』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유리알 같던 눈동자도 어느새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뒤였다. 아쉬움에 앞서 안도감이 밀려오는, 복잡 미묘한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때 문득 언젠가 그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사나와 관계가 있다는 ‘불온한 움직임’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나는 그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된다고 했던가.
‘……설마 이번 예언이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니겠지?’
설명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아무래도 두 번 다 상대의 정체가 모호하다 보니 연관성을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내 염려를 읽은 듯 트로웰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인연이 반드시 나쁜 쪽으로 이뤄진다는 법은 없으니까. 오히려 좋은 쪽으로 적용이 되면 네게 가장 큰 힘을 주는 존재가 될 거야. 이렇게 강한 인연의 별은 연인들 중에서도 찾기 쉽지 않거든.”
“그렇구나.”
문제는 굉장한 악연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는 거겠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는 그저 어설프게 웃었다.
진심으로 앞날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 * *
그날 밤 나는 이상하리만치 불안한 기분에 휩싸여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어차피 수면이 필요한 몸은 아니지만 늘 버릇처럼 이어 오던 일과를 하지 못하게 되니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컸다. 그보다 정령왕에게도 불면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당황스럽다고 해야 할까.
누운 상태에서 눈만 뜬 채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기를 잠시간, 나는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찍이 있는 모닥불 앞엔 오늘 불침번을 맡은 용병들 몇몇이 앉아 있었고, 그 주위로 곤히 누워 있는 낯익은 모습들이 보였다. 잠들어 있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요 며칠 계속된 전투로 몸이 남아나질 않았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게 신의 문장이 있다면 이럴 때 체력이라도 회복시켜 줄 수 있었을 텐데. 정체를 숨긴 정령왕, 그것도 유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생초보 정령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같다. 확실히 누가 보기에도 나는 짐덩어리였다.
‘더구나 순탄치 않은 미래까지 기다리고 있단 말이지.’
어쩐지 이쪽에서 태어난 후로는 지나치게 운이 좋다 했다. 그동안 참고 있던 악운들이 기회를 틈타 한꺼번에 밀려드는 듯 착각마저 일었다.
잠 못 이루는 새벽엔 상념이 자리 잡기 마련. 생각이 깊어질수록 잠은 더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누워 있느니 차라리 일어나는 편이 정신 건강에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기척을 느꼈는지 바로 옆에서 잠들어 있던 이사나가 가늘게 눈을 떴다.
“우움…… 엘?”
“아아, 잠깐 산책 다녀올게.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자.”
조용히 다독이자 이사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깊은 잠에 빠져든 듯 곧 살짝 벌어진 입에서 곤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노숙을 막 시작했을 때의 생각이 났다.
처음에 이사나는 맨바닥에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평생 고운 옷감과 푹신한 침대에 길들여져 온 사람인 만큼 아무래도 적응 과정이 쉬울 리 없었다. 기사들과 함께 있을 땐 적어도 그들이 짚으로 된 간이침대를 만들기라도 했었다. 그러나 나와 동행하고 나서부턴 짚은커녕 얇은 담요조차 제대로 깔지 못하고 잘 때가 많았다.
겨울로 접어든 계절, 바닥은 기온을 잘 느끼지 않는 나조차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얼음장 같았다. 불편하다는 내색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밤, 한참을 끙끙거리다 겨우 잠드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어디를 가서든 아무렇지 않게 눕고 숙면을 취한다. 그런 점이 대견한 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