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정말이네. 엘뤼엔의 문장이야. 굉장하다, 말로만 듣던 엘뤼엔의 사제가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니.”
그제야 나는 신관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엘뤼엔과 몹시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친숙한 느낌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인상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른 탓에 미처 연관성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저 문양의 의미가 뭔지 알아, 엘?”
“의미?”
“저울이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건 판결의 공정함을, 그리고 뱀이 축을 감싸고 있는 것은 그 결과가 어찌 되든 신벌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해. 형벌의 신인 엘뤼엔에게 딱 어울리는 문장이지?”
“아하하, 저, 정말 그렇네.”
어울리다 뿐인가. 누가 형벌의 신 아니랄까 봐 문양의 의미조차 삭막하다. 그런데도 저절로 수긍하게 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선 무서울 정도였다.
“아무튼 문장의 위치를 봐선 그저 평범한 하급 신관은 아니야. 아마 꽤 고위급이겠지.”
“위치라니? 그것도 의미가 있는 거야?”
“맞아. 신관의 등급은 신성력에 따라 결정되는데,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문장이 새겨지는 위치거든. 신성력이 높을수록 신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고, 문장이 눈에 띄기 쉬운 부위에 나타나. 팔목 정도면 상당한 신성력을 지니고 있을 거야.”
“헤에…….”
나는 다시 한 번 신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 순간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윽, 눈이 마주쳤다. 어떡하지?’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어설프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더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무시할 거라 생각했던 신관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실례합니다. 조금 전에 상단주님을 무사히 모시고 와 주신 분이지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 형벌의 신을 섬기는 사제 카이테인이라 합니다.”
“앗, 아, 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엘…… 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엘. 그런데 아까부터 저를 계속 보시는 것 같더군요. 혹시 제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예? 아, 그, 그게 아니라…….”
대비하지 못한 상황은 언제나 당혹스럽기 마련이다. 더구나 일방적으로 이쪽이 찔리는 경우라면 말이다. 나는 뭐라고 말할지 망설이다 곧 어색하게 대꾸했다.
“죄송해요. 엘뤼엔의 사제를 직접 본 건 처음이라 신기한 기분에 그만…….”
“아뇨, 사과를 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드문 일이군요. 그분의 이름이 엘뤼엔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
“아아, 저도 신기해서 여쭌 겁니다. 대게는 형벌의 신이라고 말씀드려도 그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라서요. 특히 이곳 스왈트 제국은 타 종교를 포용하면서도 마신을 최고신으로 믿는 풍습이 있어 다른 신의 이름은 거의 언급도 하지 않는 분위기인지라…….”
“아, 그, 그렇죠. 아하하…….”
여기서 내가 엘뤼엔의 (양)아들이오, 라고 대답했다간 신성모독 죄로 잡혀가겠지?
예로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논쟁을 피해야 할 주제가 종교와 정치라고 들었다. 카이테인은 비교적 온순해 보이지만,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믿는 종교가 관계된 문제엔 어떤 식으로 변모할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심각하게 굴렸다. 정령왕으로서 새로 인지하기 시작한 지식들이 이번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지식과 재치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지 도통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런 나를 구원해준 건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트로웰이었다.
“실은 엘은 엘뤼엔 신과 매우 인연이 깊습니다. 과거에 그를 통해서 마음의 위안과 평안을 얻었거든요.”
그 순간 나는 무심코 터져 나오려는 안도의 한숨을 겨우 삼켰다. 새삼 느끼는 바지만 트로웰이야말로 내 마음의 안식처인 게 분명했다. 이런 정황을 알 리가 없는 카이테인은 그가 한 말에 곧장 반응을 보였다.
“아, 그러셨군요. 이런 곳에서 엘뤼엔 님의 은혜를 아는 분을 뵙게 되다니 매우 기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중에 개인적인 자리를 마련해서 더 자세한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엘도 그러길 바랄 겁니다. 아마 나누실 대화가 많으실 것 같군요. 엘 역시 사제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중이거든요. 이번에 클모어에 가면 엘뤼엔의 음성을 듣기 위해 신전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 말에 카이테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제가 되시려 하십니까?”
“예, 그, 그런데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찌 되시는지…….”
“열일곱 살입니다.”
카이테인은 나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심각하게 바라보던 눈빛에 잠시간 경탄의 빛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상당히 정직한 수련을 거치신 것 같군요. 청결하고 정순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 정도로 정갈한 기운은 사제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것인데, 정말 마음이 순수하신 분이로군요.”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신의 부름을 받는 시기는 보통 열 살 이하일 때가 대부분이라서 말입니다. 그에 비하면 비교적 나이가 많은 것이 걸리는군요.”
“헉! 열 살 이하요? 그럼 그 이후로는 못 받는 건가요?”
“극히 드뭅니다. 아무래도 때가 덜 탄, 영혼이 순결한 상태일수록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제가 이 문장을 받은 때의 나이도 두 살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덧붙인 말에 의하면, 고위 사제일수록 매우 어린 시기에 신의 문장을 받게 된다고 했다.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문장을 지니고 있다는 말에 나는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제라니. 그런 사람들은 따로 수련을 거칠 필요도 없겠네요.”
“아뇨, 방식이 달라질 뿐 수련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문장을 받는 시기가 늦어질수록 마음을 정결히 하고 신의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을, 문장을 일찍 받은 사람은 신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고 그 힘을 다스리기 위한 수련을 하지요. 후자의 경우 대부분 어려서부터 신전 내에서 생활하다가 적절한 때가 되면 치료 순례를 떠납니다. 저 역시 열다섯에 시작하여 이제 순례를 행한 지 사 년이 되어 가는 중입니다.”
“헤에, 그럼 카이테인 씨는…….”
“그냥 카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쪽이 더 편합니다.”
“아, 네. 그럼 카이 씨는 지금 열아홉 살이라는 거군요. 지금도 순례 중이신 거구요.”
카이테인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례 중인 사제들은 대부분 화전민이나 관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빈민촌, 윤락가 등을 대상으로 봉사 활동을 한다고 했다. 그런 그가 이번 상단 일행에 합류하게 된 것은 클모어에 있는 엘뤼엔의 신전에 가기 위해서였다. 순례 중에는 정기적으로 신전으로 돌아가 교단에 보고할 의무가 있는데, 마침 그 시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침 운이 좋았습니다. 이 길목은 워낙 험해서 혼자 갈 생각을 하니 자신이 없었거든요. 상단주님의 배려로 신세를 지는 대신 다친 분들을 보살펴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러시군요. 매일 그렇게 치료를 하시려면 굉장히 힘드시겠어요.”
“그만큼 보람되는 일입니다. 오히려 제 입장에서는 환자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순례를 도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엘뤼엔께서 주신 힘이니 그분을 위해 쓰는 것이 저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카이테인은 뼛속까지 신관다운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그는 곧 자리를 떠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나는 이미 지겹게 지켜본 그의 진료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봤다. 그는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쉽게 넘기는 법이 없었다. 호소하는 증상에는 전부 관심을 기울였고, 치료를 마친 후에는 짧게라도 반드시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어떻게 보면 경건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저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관이 아닐까? 그것을 보니 단순히 유희를 편하게 하기 위해 신의 문장을 받으려고 한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더불어 지금까지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했던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경외와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엘뤼엔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긴 했다. 처음부터 그는 그저 호의를 베푼 것일 뿐, 그것을 내가 독식할 자격 같은 건 없었으니까.
더구나 이미 그의 곁에는 자녀 같은 소중한 천사들이 함께하고 있지 않던가. 양아들이라곤 해도 어차피 그의 입장에선 별로 특별한 의미는 아닐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전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러다 몬스터란 몬스터 종류는 전부 씨가 마르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행렬이 지나는 길에는 마치 훈장처럼 몬스터 떼의 시체가 수북이 쌓였다. 물론 그만큼 우리 쪽에서도 꾸준히 부상자가 늘어나는 중이었다. 그렇게 되자 가장 바빠진 사람은 신관인 카이테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신성력을 쓰는 일엔 많은 체력이 소모됐다. 더불어 소모된 성력을 다시 채우기 위해선 그만큼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카이테인은 아무리 위급한 환자라도 단번에 완치시키는 대신, 매일 조금씩 신성력을 사용하여 호전을 돕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관심이 가는 곳에 시선이 간다고, 그가 엘뤼엔의 사제라는 걸 알고 나니 그전에는 있어도 의식하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우연히 볼 때마다 그는 항상 분주한 모습이었다. 최근엔 잠까지 줄여 가며 부상자를 돌보는 일에 매진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엘, 당신이 여긴 무슨 일로…… 혹시 어디 다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많이 바쁘신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뭔가 도와 드릴 건 없을까요? 시키는 일은 전부 할 수 있는데.”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옷이 더러워질 겁니다. 게다가 생각보다 심하게 다친 사람도 많아서 보시기에 끔찍할 수도 있습니다만.”
“괜찮아요. 몬스터들의 시체를 하도 많이 봤더니 이제 어지간한 상처는 아무렇지 않은걸요. 부상자가 이렇게 많은데 카이 씨 혼자 다 감당하시긴 힘들잖아요. 제가 뭐부터 도와 드리면 될까요?”
그 말에 카이테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의 입장에선 한 손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일 테니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그 뒤 본격적으로 치료를 도우면서 나는 부쩍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오랫동안 다양한 지역을 돌아본 만큼 카이테인은 지식이 매우 풍성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주로 신관들의 삶과 그들이 지닌 성력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아, 그렇군요. 마(魔)속성의 사제들에겐 치유 능력이 없다는 거죠?”
“예, 신의 속성이 크게 천과 마로 나뉜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이 중 천의 속성을 가진 신들이 인간의 행복과 같은 밝은 부분을 관장한다면, 대체적으로 마속성의 신들은 인간의 삶 중에서 어두운 부분을 관장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힘은 사람을 보호하기보다 파괴하고 공격하는 쪽에 더욱 치중되어 있죠. 적에겐 고통과 저주를, 전사들에겐 투지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마속성의 신관들은 대게 암흑 사제라고도 불립니다.”
더불어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성력을 지닌 자들은 바로 마신의 사제들이었다. 그들의 성기사는 참여한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며, 오직 성력의 힘만으로 적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이다. 오래전 작은 왕국에 불과했던 스왈트가 지금의 제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도 그들의 힘이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스왈트 제국의 백성들은 거의 맹목적이다시피 마신의 사제들을 신뢰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신탁에 아무렇지 않게 휩쓸린 것도, 이미 신에게 귀의했으면서도 대공이 정치에 관여하고 섭정을 할 수 있던 것도 전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가능하다면 그놈의 마신이란 존재를 만나 보고 싶은데 말이지.’
만나서, 작금의 사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다. 물론 현실은 가까운 엘뤼엔조차 맘대로 만날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상념을 털어 냈다.